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살아온 날들이 늘어나고 머리로, 가슴으로 들어오는 텍스트들이 늘어나면서 괴로운 것은 책임의 문제다.  

취미생활로 하는 블로그에 쏟아내는 텍스트에 대한 책임,
사회생활을 하며 저질러 놓은 일들, 맡은 일들에 대한 책임,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의 책임,
기아와 폭력에 시달리는 국내외의 약자에 대한 책임,
넓게는 고통받는 동물들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의 책임까지, 

이러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아서 생기는 고통과 상처가 어찌나 많았던지, 반세기가 넘어서도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은 개인에서부터 국가로까지 부패시키고 있고, 수많은 영상물과 책자들이 지금까지도 쏟아져나오고 있다. [더 리더]도 그 상처의 한 줄기에서 태어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며 아픈 곳을 찌르고 있기는 하지만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이성에 호소할 뿐, 마땅한 답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책을 꿰뚫는 문제인 '당시에 표면적으로나마 대학살에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마땅한 처벌을 받았는가'에 대한 답 마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하나가 저지르는 일들에 대한 책임도 못져서 급급하고 있는데, 이 책 덕분에 지구 반대편, 몇십년전 과거의 사람들의 책임까지 넘겨받게 생겼다 이말이다. 문제제기만 해놓고 답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은 소설만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않을까.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라고 당돌하게 묻는 한나의 모습은 익히 예고편과 리뷰들에서 접했기에 여파가 별로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이 여자 참 이기적이다 싶다. 사랑할 때도 이기적이더니,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경비의 일을 해 놓고는 자기는 주어진 자기 일을 했을 뿐이라며 뻔뻔하게 대답하여 대중들을 놀라게한다. 물론 자기애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요즘시대에 열광받을만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홀로코스트를 새롭게 보는 참신한 시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멋지고 쿨하게 여겨지는 이시대가 나는 참 쓰다. 

그녀가 시대의 희생양이었냐- 고 묻는다면 답은 yes이다. 그러나 희생양이었다고 해서, 실제로 저지른 죄보다 더 고된 벌을 받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면죄부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벌을 받기로 결정한 것은 죄를 뉘우쳐서가 아니라 문맹인것을 인정하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생계를 위해 일을 했던 것 뿐이다, 라는 변명은 당시 나치에 반대하던 수많은 독일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에고이즘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야한다는 전제조건을 필수로 갖고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한나와 남자주인공(?)은 모든 것이 세월에 씻겨 희미해질 무렵에 다시 만나게된다. 둘다 실로 처참한 모습으로. 그동안 무엇을 깨달았냐는 남자주인공의 질문에 한나는 글을 깨우쳤다고 대답한다. 윤리교과서 같은 남자주인공의 질문도, 여전히 지독한 자기애를 자랑하는 한나의 대답도 역겨웠다. 차라리 그 때 왜 말도 없이 떠났냐고, 그럼 너는 왜 답장해주지 않았냐고, 왜 한번도 날 보러오지 않았냐고 신파조로 원망했으면 같이 울고 속시원했을텐데, 그러기에 그들은 너무 찌들었고, 늙었던 것일까. 평생을 서로 사랑했으면서 시대가 이러했으니, 라고 자조하며 참고 참아 결국 무덤덤한 모습만 드러내는 그 쪼잔한 에고이즘이 정말 토할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바로 나와 다르지 않아서 더 괴로웠던 것이다. 나였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인간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로 포장되어서 너라면 어쩔거야, 라고 묻는데 이거야말로 울지도 웃지도 비난하지도 못하겠다. '한나'라는 이여자 뭐야.. 라고 황당해하면서도 끝내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의 냉랭함에 공감할 수 없었던 까닭은 바로 내 모습이 한나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밉고, 그래서 더 역겨웠다.
나역시 아무것에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추악한 인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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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8-3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자마자 영화를 바로 봐서 내용이 약간 뒤섞였다.

순오기 2009-09-06 12:09   좋아요 0 | URL
나는 영화를 먼저 보고 몇 달 뒤에 책을 봤어요.
영화가 표현하지 못한 게 책에 나와서 그런대로 ~ 마음이 편치 않은 독서, 공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