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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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은 봄밤에 사랑스러운 쉴라가 나오는 [한아이]를 보시며 마음이 따뜻해지셨다지만,
난 바람 쌩쌩부는 꽃샘추위 봄밤에 덜덜 떨면서 [다섯째 아이]를 읽으며 시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가족이데올로기의 허상 이라고,
이런 비평이 더 허구이다. 결국 가족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었던 해리엇이 아니었다면 악마(?)같은 벤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또 가족이데올로기로 한정짓기엔 작가가 노리는 범위가 너무 크다. 그게 뭔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며칠 전 게릴라 극장에서 이오네스크의 [코뿔소]를 보았다.
코뿔소로 변해가는 주위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도 언젠가는 코뿔소로 변하지 않을까, 그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의 공포는 점차 내가 혼자 남게되지 않을까의 공포로 변질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코뿔소의 집단에 속하길 원하게 된다. 내가 너무나도 모르던, 그래서 폄하하던 코뿔소의 세계. 

베랑제는 애인마저 코뿔소가 되어버린 사실에 분노하다가, 차라리 나도 코뿔소가 되고싶다고 울부짖다가, 결국엔 저항하기로 한다. 
베랑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약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나약하던 베랑제가 저항을 한다? 얼핏 아이러니해볼 수도 있겠지만 베랑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항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이 어쩔 수 없이 벤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너무도 나약해서 코뿔소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코뿔소를 죽일수도, 내가 죽을 수도 없다.  

차라리 그 아이가 차에 치어 죽기를 바라면서, 그런 자신에게 죄책감과 증오심을 쟁여가면서 해리엇은 계속해서 아이를 지켜본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끔찍해하고, 아이가 언젠가는 떠나길 바라며, 아이가 망친 내 결혼생활이 돌아올 수 있을까란 희망을 놓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아이의 곁에 있는다.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내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반항일까? 아니면 정상적인 집단에 속해있다는 안도감을 비판하는 것? 우리는 너무나도 집단 속에 안주한다. '공감'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 속에 내가 속해 있다. 내 편이다. 내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일단 공공의 적이다. 그래서 '너의 잘못이다' 라고 단정지어버리고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다.  

해리엇은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버려버리는 과정을 통해 점차 좌절한다. 분노하고, 우울해하고, 때론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지만 점점 그 집단의 이기적인 폭력에 잠식당한다.

   
  해리엇은 떠나면서 교장이 어떤식으로 자신을 지켜보는지 보았다. 말하지 않은 불편함과 공포마저 담은 그 길고 불안한 검열의 눈 - 그것이 또 다른 대화요, 진짜 대화였다.  
   

그렇다고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일까- 이건 또 아닌데,, 뭐 하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말자는 것이겠다. 초간단-

어쨌든 난 자신을 '불쌍한 벤'이라고 말하는 악의 근원을 차마 악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 아이가 느끼는 외로운 공포가 너무 안쓰럽고, 그 공포를 이해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엄마 해리엇의 노력도 대견했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책 속 깊숙히 숨겨두었지만, 난 오히려 내 맘 속 깊숙히 숨겨두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엄마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다. 엄마는, 그럼 애를 많이 낳지 말라는건가- 라고 갸우뚱하며 설거지를 하러 가신다. 머리 속을 좀 정리해보고자 이야길 시작했는데, 계속 혼란스러워하던 난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 단순한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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