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스 - 박찬욱 감독 영화 <어쩔수가없다> 원작소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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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중략)

이런 생각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무장한 킬러다. 무자비한 괴물. 내 안에는 바로 그 괴물이 담겨 있다.

(p.162)

'나쁜 짓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안의 괴물이야'라는 궤변을 어디서 봤더라...


잠재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자인 독자는 소설의 화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엑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주인공- 버크 데보레가 역겨웠던 소설이다. 건조한 서술을 보면 작가도 버크에게 동정을 느끼지말라는 것 같고.


버크 데보레는 해고된 지 2년 째인 실직자다. 실직 수당은 떨어졌고 아내는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 해고 열풍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따라서 버크의 재취업도 요원해보인다. 그리하여 버크는 결단을 내린다. 미래 경쟁자를 제거하기로.


생각해보자.


버크의 경쟁자는 중간 관리자다. '중간 관리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이는 중년일 것이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큰 실수 없이 성실하게 일했을 것이고, 당연히 가정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버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평생 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다 실직하고 재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버크의 제거 명단인 것이다.


버크와 사적 이해 관계가 전혀 없지만 재취업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버크의 제거 대상 리스트에 오르는 사람들. 이 소설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이웃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당하는 것. 연쇄살인마 덱스터는 그나마 살인자를 죽이기라도 했지.


집 근처 식당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는 세 번째 대상을 제거하고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버크는 흐느껴 우는데(p.110) 그 모습이 너무너무 역겨웠다. 개새끼. 

세 번째 살인 후 형사가 버크를 찾아오고 연쇄살인의 수법이 총이라는 단서를 흘린다. 형사의 얘기에 버크는 살인을 멈추는 게 아니라 총을 포기한다. 이쯤되면 버크에게 이제 살인은 생존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는' 뭔가를 확인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네 번째 경쟁자는 아직 40대라는 이유로 50대 버크의 분노를 산다. 젊음이 죄인양, 부부사이가 좋은 것이 죄인양 네 번째 경쟁자를 증오하는 버크는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다. 하긴 경쟁자리스트를 들고 살인하러 돌아다니는 놈이 정상이면 안 될 말이지. 버크는 젊고 유능한 네 번째 경쟁자를 쇼핑몰 주차장에서 둔기로 때려죽인다. 개새끼.


버크의 범행수법은 점점 대담해진다. 이제 잠긴 문을 열고 타인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킬러 소질을 타고난 것인지, 버크의 믿음처럼 절실한 생존욕구가 만든 당위인지는 버크 본인만이 알 것이다. 어쨌거나 버크는 경쟁자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효율적이며 결과가 확실한 자신의 '노하우'가 아주 마음에 들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웃에게 필요하다면 노하우를 알려줄 마음도 있다. 혹시 나중에 또 일이 잘 안 풀린대도 자신에겐 노하우가 있으니 더는 불안하지 않다.


버크 리스트엔 모두 일곱 개의 명단이 있지만 못생겨서 이혼당한 덕분에 살아남은 헨리8세의 네 번째 부인처럼 버크가 찾아오기 직전에 구직에 성공한 한 명은 운 좋게 살아남는다. 

마지막 일곱 번째 대상이 버크 리스트의 하이라이트인데 그는 버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회사에 재직 중인 직원이다. 구직이라는 공동 목적을 가진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기 위해 시작한 살인은 내가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버크의 눈물이 왜 그토록 역겨웠는지 확인했던 반전이다.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영화'라는 해설을 봤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영화는 아직 안 봤지만 아마 앞으로도 안 볼 것 같다.


책을 덮으며 의문이 남는다. 과연 버크의 살인을, 전국을 휩쓰는 실직 사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생존방식의 우화로 봐도 되는가 라는.

물론 국가가 돌보지 않는 산업 현장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각자도생하는 야만의 몸부림이라는, 사회소설의 메타포로 읽을 수도 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에 원작 제목 대신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no other choice

과연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그럴리도 없지만 그래서도 안 된다. 이것이 공동체 구성원인 개인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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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엘즈워스-존스 『뱅크시_ 벽 뒤의 남자』




"사람들은 종종 낙서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음, 틀림없이 예술이죠. 그 얼어 죽을 테이트에도 걸려 있잖아요?"


『뱅크시_ 벽 뒤의 남자』


뱅크시의 그래피티에서 느끼는 가장 큰 쾌감은 역시 패러디와 패러독스에 있다. 예전에 M과 '예술을 한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선구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창작은 어려운 작업이고 선구적인 경향을 끌어내는 프론티어가 되는 건 순전히 '재능'의 영역이다. 세상엔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뱅크시는 명화에 변형을 주는 작업을 곧잘 했다. 이 책의 저자도 언급했지만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인기가 좋은데 뱅크시의 작업에 국한하면 내 취향은 밀레보단 모네다. 콕 집어 수련 연못에 쇼핑 카트를 처박은 발상이 무척 재미있다. 뱅크시가 붙인 제목도 재미있는데 이를테면 밀레는 '직업소개(Agency job)', 모네는 '쇼 미 더 모네(show me the monet)' 하는 식이다.





(위)『벽 뒤의 남자』 ㅣ (아래)『Wall and Piece』


(아래) 'show me the monet' 왼쪽에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다. 제목 'Sunflowers'옆에 'Petrol station'을 덧붙였는데 뱅크시의 작업물은 보면 볼수록 선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말하지만 '선동'이 아니라 '선언'이다.


-


Banksy 『Wall and Piece』  





표지와 목차






'쥐'가 뱅크시에게 의미가 있는 건지, 그래피티 작업자들에게 의미가 있는지 가끔 궁금하다.

어쨌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쥐가 아닐까 싶은 뱅크스의 쥐(들).

'The human race is the most stupid and unfair kind of race'에서 뱅크시가 인간을 보는 시각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든다.


이하 책장을 훌훌 넘기다 손이 멈춘 몇 페이지.




Why would someone just paint pictures of revolutionary when you can actually behave like one instead?




I told her 'I'd had an epiphany that night and she told me to stop taking that drug 'cos it's bad for your heart'



뱅크시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웹서핑 중 sns에서 뱅크시의 글을 읽고서였다. 뱅크시의 육성이 궁금해서 원서를 주문하고 며칠을 기다려 마침내 읽은 'when i was eighteen'으로 시작하는 '그날밤의 일화'.




재미있는 우연인데 책을 읽기 며칠 전 S와 차로 이동 중에 이 페이지와 동일한 내용, 이른바 'Brandalism'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고 잠시 정차했을 때의 일이다. 정면 옥외 광고판이 번쩍이는 걸 보다가 갑자기 불만이 터져나왔다. 나는 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데 왜 도로 한복판에서 일방적으로 저 기업의 광고를 봐야 하는 거냐고!





뱅크시가 주목하는 사회담론을 쫓아가다보면 책의 제목인 'Wall'이 중의적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wall'은 뱅크시가 작업을 하는 담벼락일 수도 있고, 팔레스타인을 위협하는 장벽일 수도 있고, 편견과 불평등을 용인하는 인식의 부조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겐 뱅크시의 작업의 시작과 끝이 결국 작가주의처럼 느껴진다. 뱅크시는 저항하는 자일까 자유주의자일까.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처음엔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려면 어떤가 싶다. 분명한 건 뱅크시의 관심이 늘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거다. 

뱅크시의 그래피티는 변방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주류에 안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변방에 있다. 변방에서 변방을 얘기하고, 변방에서 주류를 얘기한다. 


“The Bad artists imitate, The Great artists steal

- Picaso


예전에 봤을 땐 별 감흥 없었는데 이제 보니 피카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구나 싶다.



그리고 외전_ 코로나 시대의 뱅크시 (출처.banksy.co.uk)




디테일이 위트가 넘치고 재미있는 작업물이다.

뱅크시가 하면 놀이도 작품이 되는 부러운 재능의 세계.


팬데믹으로 락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황을 견뎠다. 혹은 즐기거나.

뱅크시는 아마도 '즐긴' 쪽인 것 같다. 뱅크시에 의하면 부인이 질색했다고...

부인의 질색에 공감한다. 나라면 저 욕실에 절대로 안 들어갈거다.





여담_

1. 엊그제 페이퍼에 뱅크시를 언급한 김에 내처 뱅크시 하나 더! 까지는 좋았는데 페이퍼 하나를 썼을 뿐인데 즈질체력이 바닥났다.  

2. 사실 '뱅크시'는 예전에 작성한 글인데 이미지와 내용을 정리해서 새로 쓰려니 바늘이 소가 됐다.

3. 그나저나 T1은 어쩌고 있는지. 슈뢰딩거 고양이 같은 녀석들! 고백하건대 이 페이퍼의 목적은 월즈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2R를 관전할 용기가 없어 도피성 회피성이다.

4. 이대로 가을인가? 당황하기엔 벌써 9월 중순도 끝무렵이다. 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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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단토의 예술 철학에서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예술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통찰의 끝에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 테제는 단토의 저서들에서 여러 번 논의된 바 있지만 그만큼 자주 왜곡되고 오인되어 왔다. 이 책은 그가 거듭 주장한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 개념을 재확인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더 나아가 워홀 말고도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책 후면 표지 발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을 고함'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비견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선언'이라는 의미로는. 물론 단토가 선언한 '종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술과 함께 그 안에 요요히 퇴적되어 온 역사도 봐야 한다. 선언이라 함은, 그것이 지닌 무게란 무릇 그런 것이다.

예술문외한인 일반인으로서 한마디 첨언하자면 단토의 선언은 뱅크시의 퍼포먼스로 1막 1장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뱅크시의 근황이다.

최근 뱅크시가 영국 런던 왕립 법원에 남긴 벽화는 '피켓을 든 비무장 시위자를 법봉으로 때리는 판사'다. 현지 언론은 최근 영국 정부가 친팔레스타인 단체 '팔레스타인 행동'을 금지 단체로 지정한 것과 관련있을 거라고 해석한다는데... 

지난 6일 런던 도심에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고 약 900명이 체포됐는데 이에 시위 주최 측은 '법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면 저항은 꺾이지 않고 강해진다'고 했다고 하니 사법부의 권위? 신뢰? 정의? 그게 뭐든 사법부의 뭔가가 땅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건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인 듯.




출처_ banksy.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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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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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언어의 유목민인 다와다 요코의 문장을 읽는 경험이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것은 아마도 독자도 이미 다양한 언어의 경계를 부유하는 유목민이기 때문일 터. 결국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의 언어를 공감하는 시공간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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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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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사이'가 서양식 표현은 아닐 것 같다는 근본 없는 의심을 하며 표지를 확인하니 원제가 'LES INSEPARABELES'다. 프랑스어 직역은 '떨어질 수 없는(분리할 수 없는)'.


자전적 소설 『둘도 없는 사이』의 실비는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는 자자(엘리자베스) 라쿠엥의 또다른 자아다.


자의식 강한 9살 실비와 새학기 짝으로 등장한 앙드레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되면서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성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단순히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고 억압적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토론을 했고, 항상 우리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곤 했다. 오늘은 아주 실제적인 일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한 믿음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너져 내렸다. (pp.168-169)

그렇고 그런 흔한 여자아이들의 우정에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여자아이들의 우정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담하며 재기발랄한 여자아이들을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내용으로, 기성세대가 공고히 구축한 교육은 형식으로 억압하는 당시 풍토다. 한 예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을 계급의 결과로 인식하는 선민의식이 20세기 초 프랑스 소도시의 풍경이라는 사실이 의외롭다.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인권선언의 나라가 아닌가. 일종의 '프랑스 너마저도'하는 배신감이랄지.


삶의 내용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웠단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그 자체로 미완이다. 그리고 죽은 이가 남긴 미완의 영역을 채우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아마도 뇌수막염으로 추측되는 앙드레의 죽음은 사건이라기엔 느닷없고 사고라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데, 선택을 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내몰린 앙드레가 고열에 시달리는 몸으로 연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장면은 이것이 살아있는 앙드레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 몹시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잔상을 남긴다. 더 큰 불행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조차 자신의 신에게로 도망치는 비겁한 부모다.


갈라르 부인은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는 도구들이었을 뿐이야." 갈라르 씨가 부인에게 말했다. (p.189)

당사자의 의사를 배제하고 결혼- '짝짓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지드의 표현처럼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도식화시켜 집단에 강제 편입시킴으로써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기성 질서의 권력은 또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누구도 자신의 도덕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집단과 개인 간 헤게모니 쟁취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아포리즘 '목적지는 있지만 경로가 없다. 우리가 경로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를 빌리자면, 실비와 앙드레는 부모와 학교와 사회가 선의로 포장해 그들에게 내민 꾸러미가 정직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정의할 단어를 몰라 망설이고, 경로 이탈을 두려워한 아이들이 망설이는 사이 기성세대의 질서가 앙드레를 집어삼켰다고 할 수 있다. 실비 입장에선 둘도 없는 사이였던 앙드레를 빼앗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첫 장을 열었던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일종의 고발문학으로 다가왔다.


자자에게


오늘 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네가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일까? 이 이야기를 너에게 바치고 싶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여기서 네게 문학적 기교를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거지. 게다가 이것은 너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일 뿐이야. 너는 앙드레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 실비가 아니었잖아.


시몬이 원고를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다듬었던 심정을 어쩐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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