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이 많은데 정말로 잘 울고, 많이 운다. 
그런데 몇 년 전, 막상 안과에서 안구 건조증으로 눈물샘 검사를 했을 때 내 눈물샘은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바짝 메말라 있었다. 눈물이 많으면 눈물샘이 건조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눈물과 눈물샘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신파’라고 해서 무조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눈물이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울린 영화는, 단연 <간첩 리철진>이다. 순진하고 착한 간첩 리철진이 너무나 불쌍해서 얼마나 심하게 울었던지, 어떻게 울었는고 하니 그야말로 대성통곡하듯 엉엉엉 목놓아 울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떻게 된 것이 리철진을 연기했던 배우 유오성 씨만 보면 울고 있는 것이다.
유오성 씨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난 한 놈만 패!’ 할 때도 울었고, 모CF에서 남들이 모두 예, 할 때 혼자만 ‘아니오!’ 할 때도 울고, <별>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때는 간첩 리철진이 생각나서 또다시 통곡하면서 울고... 하여튼 좀 과장해서 유오성 씨 그림자만 나와도 울었다.
그러니 아예, ‘손수건, 휴지 옆에 갖다 놓고 마음껏 우십시오.’라고 신파를 대놓고 부추기는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는 일부러라도 안 봤다.
- 예전 일이지만 오빠의 소개로 어느 유명 영화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설문지를 작성할 때 일이다. 그 때 질문란에 ‘제일 좋아하는 국내 배우’란이 있었는데 내가 유오성이라고 정성스럽게 써넣자, 오빠가 장난하냐고 해서 내가 발끈한 적이 있었다. 당시 유오성 씨는 ‘난 한 놈만 패!’로 한창 떴을 때였다.

서론이 길어진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 ‘신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딸 부잣집 둘째로 태어난 엄마 덕분에 나는 이모들이 많은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이모들이 주루룩 여고생, 여대생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큰 언니들 같기도 했다.
어려서 외가에 가면 바로 그 이모들 방에 틀어박혀서 이모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때 읽었던 것들 중, 신달자 씨의『물 위를 걷는 여자』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국내 여류작가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신파를 싫어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 바로 이『물 위를 걷는 여자』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우희와 난희라는, 환경은 극과 극을 달리지만 친한 친구인 두 여자가 나온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우희는 개인의 성공을 위해 완벽하게 멋있는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유학을 떠나고, 이 남자는 난희와 결혼한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에도 우희가 불행해지는 걸로 결말을 맺는 이 소설을 읽고 어린 마음에도 화나고 불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책 한 권이 청소년기에 미치는 영향이란 이렇게 대단하다.

이후로 국내 여류작가의 소설에 대한 불신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공지영 씨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나『착한 여자』에 등장하는 청승의 대표주자처럼 보이는 여자들의 얘기에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었다. 결국『인간에 대한 예의』가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이 작가의 소설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다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나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행.시는 너무 괜찮았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책을 주문하고, 이틀 뒤에 받아들고 그리고 읽었다. 원래 눈물이 많으니 울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눈물 없이는 못 읽는다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거의 안 울었다. 그 흔한 내 눈물이 인색했던 것은 소설 외적인 것에 대한 반발심이라거나, 소설에 감정이입이 덜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소심한 이유가 아니다. 사형수를 통해 ‘용서’를 얘기하고 있는 이 소설의 주제를, 몇 달 전 모 방송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픽션이 아닌 논픽션으로 이미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평하지 못하게도, 허구인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내게서 신파를 끌어낼 힘을 잃었던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는, 실제로 사형을 선고받은 여러 명의 사형수들이 나왔다. 어떤 피해자의 가족은 죄를 짓고서라도 감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가해자 사형수를 죽여버리겠다고 절규했고, 또 어떤 피해자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존재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아프고 안타까웠던 얘기는 6년 째 복역중인 사형수와 그 사형수를 용서한 피해자의 아버지가 나왔을 때였다. 그는 목사님이었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가해자를 용서했다. 하지만 용서받은 사형수도, 용서한 아버지도 날마다 고통 받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 소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날이 시큰해졌던 부분이 바로 ‘용서’ 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크게 두 곳이다.

수녀님 내가 나쁜 짓 하려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시간이 더 가서 나라에서 그놈을 덜컥 죽여버리기 전에 만나고 싶다구요. 이 늙은이가 배운 것도 없구, 하는 게 하나 없는데…… 가서 내가, 이놈아 네가 죽인 그 여자 에미다! 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놈을 용서해주고 싶어요……. - p.103

용서할 수 없었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용서하기…… 싫어! 그 인간보다 더 용서할 수 없었던 엄마를…… 그런데 오늘…… 용서, 해보려구 온 거야! - p.280

각각, 사형수인 윤수의 일당에게 딸을 잃은 할머니와 가장 필요할 때 정작 자신을 외면해 버린 엄마를 향한 여자주인공 유정의 대사인데 책을 읽다가 가슴이 찌르르 아프면서 내가 훌쩍였던 부분이다.

어렸을 때 누군가가 내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아. 이 상투성이란...) 라고 물으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은 대다수는 보통 라스콜리니코프가 광장 한 복판에서 바닥에 입을 맞추고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 외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는데(이 부분은『우.행.시』에도 나온다) 나는 그가 전당포 노파를 살인하기로 계획을 세울 때 ‘모두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뒤에 다시 깨닫게 되는 ‘세상에 죽어도 마땅한 자는 없다’라던 부분에 이르면 죄지은 자라고 해서 과연 누가 그를 단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형폐지론자다.
가해자를 사형 집행하는 이유가,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피해자를 대신한 사회의 복수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공공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사형이 아니라 무기형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건 '그'를 우리 사회에서 쫓아내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죽여서 안 보든, 격리시켜 안 보든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어차피 죽잖아. 그래봤자 살려놓아봤자, 기껏 오십 년도 안 돼서 다 죽잖아…… 오빠는 사는 게 그렇게 좋아? 그래서 살려주는 게 그렇게 배 아파? - p.234

그러나 누군가가 내게 ‘네가 피해자여도 그렇게 말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면 나 역시 ‘그래’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었던 부분도 ‘용서’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기 희생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다 읽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차라리 늙은 수녀님이랑 사이코패스 사형수의 얘기였다면 작가가 주장하는(사형폐지) 주제가 설득력을 더 가졌을 텐데” 라고 투덜거리자 친구, “그럼 재미가 없잖아” 라고 했다.

(중략) 고모 내가 젤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그건 진부한 거야…… 그 자식이 조금 더 진부하지 않게 여잘 버렸다면, 진부하지 않은 의도로 나랑 결혼하려고 했다면 내가 그래도 눈 딱 감고 봐주려고 했는데…… 정말이라구. 난 그 자식이 진부하게 구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그게 다야! 고모는 내 말을 믿어야 돼. 이 이야긴 첨 하는 거니까. 엄마도 오빠들도 식구들…… 이 이야긴 아무도 몰라. 그 사람들은 그저 내 변덕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도 그게 편해. 그래야 조금이라도 서로 덜 마주 보잖아. - p. 26 

진부함과 신파는, 아마 사촌쯤 되지 않을까?

정리하면, 

여기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유년 시절을 지나온, 아직 앳되고 예쁘장한 청년이 있다. 청년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형수다. 이 청년을 용서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형을 집행해야 할까?

청년은 죄를 짓지 않았다. 누명을 썼다. 도대체 이 청년의 뭘 용서한다는 걸까.
'사형 제도'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에게 왜 '윤수'여야 했는가, 묻지 않을 수가 싶다. 소설의 주인공이 '미모의 여교수와 억울한 청년 사형수'가 아니라 '칠순의 늙은 수녀님과 중년의 간악한 살인마'였다면 작가가 주제를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주제가 부각되는 사회소설이 아니라  슬픈 연애 소설을 한 편 읽은 것 같은 찌꺼기가 남는다. 작가의 어설픈 부르조아 근성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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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상, 중, 하 세 권으로 이루어진, 조용한 베스트셀러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오랜만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읽은 소설이다.

- (上편) 비밀노트
읽기 시작한 직후부터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말 그대로 당혹스럽다. 세상의 금기가 천연덕스럽게, 태연하게 펼쳐진다. 윤리는 무너지고 도덕은 부재한다. 아고타의 문체는 독특하다. 건조하고 시니컬하다. 이러한 문체가 소설에서 받는 충격을 완화시켜 준다.「비밀노트」를 읽으면서 내내 영화 「금지된 장난」의 흑백 영상이 머리 한 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 (中편) 타인의 증거
시리즈 중 단연 이 중편을 가장 사랑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읽은 여타의 소설들 중 특히 아끼는 목록에 포함시킬 것이 틀림없다. 4분의 3쯤. 아마 그 쯤에서였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울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중편을 읽는 동안은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 하(下)편을 읽는 도중에 내가 울고 싶었던 이유가 소설이 너무 아름다워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문체는 여전히 건조하고 딱딱한 흑백톤이지만 나는 어느새 국경 근처 작은 시골 마을에 깊숙이 감정이 몰입되어 버렸고 루카스와 마티아스를 사랑하고 만 것이다.

- (下편) 50년 간의 고독
중편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탓이었을까. 상편의 긴장과 중편의 즐거움은 하편에 와서 김이 빠져 버렸다. 텅 빈 하늘로 끝도 없이 날아오르다 뚝- 끊어진 연을 보는 기분... 나는 그랬다.
'우리'였다가(상편) '루카스 혹은 클라우스'였다가(중편), 이제 확실히 분리된 '나'가 등장하는 하편은, 없었으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하고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루카스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클라우스처럼.
하편이 시리즈를 완결 짓는 중요한 부분인 건 틀림없다. 하편에서는 상편에 나타난 두 아이들의 잔혹한 일상의 밑그림이 펼쳐진다. 하편에 이르러 이 시리즈가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모두 다 채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때로 비워놓고 남겨놓는 것도 괜찮은데... 하지만 이 것도 중편을 너무도 사랑하게 돼버린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의...』에서 작가의 모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에 당장은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느 날, 어느 때 그녀의 다른 소설을 들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다.
끝으로 이 소설을 발굴하고 번역을 낸 출판사의 안목에는 감사하지만 10여 년 동안 절판되었다가 재출판을 결정했을 때, 이왕이면 좀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곳곳에서 눈에 띄는 오타와, 세련되지 못한 편집이 읽는 내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출판업계의 번역 양태를 보면 이것도 배부른 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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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B.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또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 고뇌하고 힘들어하며 헛된 시도를 반복한다. 그 상처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무언가 의미 없는 보상을 원한다. 치유되지 못한 외로움을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채......


1. A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구체적으로 작가가 보고 있는 호퍼의 그림을) 모르는 독자가 문제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도대체 그 그림이 황량한지 황당한지 알게 뭔가.
B 역시 혼자 심각하고 혼자 비장한, 혼자만의 잔치인 자기 고백이라 3자가 딱히 끼어들 틈이 없다.

2. A는 알랭 드 보통의『동물원에 가기』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문단이고,
B는 배우 최민수 아저씨가 바이크 불법 개조 사건 직후 모 언론사에 보낸 전문中 시작 부분이다.

3. 보통은 20여 개의 언어로 출판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 부씩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최민수 아저씨는 앙드레 김 못지않은 화려한 어록으로 세간에 웃음을 주고 있는 이 시대의 터프가이다.

4. 보통(Botton)은 내게 명백한 최고의 수면제다.『행복의 건축』은 신작 출판기념으로 그의 책 세 권을 덤으로 주는 행사 때 고민에 고민 끝에(나는 이미『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질린 경험이 있다) 예약하고 받은 책이다. 지금도 건축 공부를 해볼까 고민할 만큼 건축에 관심이 많은 내게 건축 에세이는 뿌리치기엔 너무나 유혹적이었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행복의 건축』을 읽다가 불과 서너 페이지쯤 넘겼을 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낮잠을 자는 사태가 벌어졌다.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작가 소개) 30대 후반의 이 아저씨는 어찌하여 매번 나를 이렇게 잠을 재우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저녁에 보통의 네 권의 책 중 가장 얇은, 그 제목도 참 가벼운『동물원에 가기』를 집어 들었던 것은 책의 무게보다 내 이해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라고 반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두께는 얇지만 그 내용은 어찌 그렇게 천근만근인지. 겨우 첫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사정없이 감겨드는 눈을 부릅뜨고  읽고, 소리내어도 읽어 봤지만 결국 "그래요, 제가 졌어요." 항복의 흰 깃발을 들었다.

5. 보통의 문장과 최민수의 문장은 도대체 뭐가 다른가. 내 보기엔 현학적인 우물의 깊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제대로「같기도」인데. 그런데도 한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세간의 웃음 거리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불공평하다.
소쉬르는 언어를 (1)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그 사회에서 공인된 상태로의 언어인 랑그(langue)와 (2)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의 구체적인 언어를 의미하는 파롤(parole)로 이원화했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를 머릿속에 있는 개념과, 소리가 되어 입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로 구분한 것인데 위의 두 경우를 보면 어떤 언어를 쓰는가가 아니라 언어를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한 것 같으니 그런 구분이야 아무렴 어떤가 싶다. 

예전에 우리들 사이에 유행했던 우스개 소리에 이런 게 있었다. 공부 잘 하는 놈이 당구장에서 놀고 있으면 "공부도 잘하는 놈이 노는 것도 잘 논다"하고, 공부 못 하는 놈이 당구장에서 놀고 있으면 "공부도 못하는 놈이 놀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아, 현실은 이렇게 비정한 것이다. 

6. 언제던가 보통의 저서가 스테디셀러로 진입했다는 자료를 봤다. (물론 자료에서 '오쿠다 히데오'를 발견했을 때보다는 덜 경악했지만)
도대체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산만한 보통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원래 맨 얼굴에 자신 없는 사람의 화장이 두꺼워지기 마련이지, 였다. 내가 읽은 보통은 그랬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덧붙이고 덧붙이고... 지나치게 말이 많다. 그나마도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학적이고 중언부언이다. 원래 지식이란 누구나 알기 쉽고 간단한 것이어야 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태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꿈 해석'이 궁금하면 직접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예를 보자.
저자 A는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고 연구한 사람이다. A는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이론에 관한 책을 썼다. 독자B는 A의 저서를 읽는다. 그럼 B는 프로이트를 읽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B는 A의 프로이트를 읽은 것이다. B가 누군가에게 프로이트 얘기를 한다면 그건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트의 사촌쯤 되는 인물일 터다.
'철학의 문학적 대중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오히려 철학이라는 강박을 거세하고 소설로만 읽는다면 충분히 소설적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보통의 소설을 읽고 철학은 이런 거야, 라고 말 할 사람도 없겠지만 연애 심리를 철학적 관점(혹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놓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보통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보다 E.프롬의『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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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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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단편집『친절한 복희씨』는 여전히 바래지 않은 작가의 노련하고 농익은 글솜씨가 재미있는 한편 앞선 단편집『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비하면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실망한 이유는 몇 개의 단편에서 내가 지금 작가의 산문집을 읽고 있는지 아님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헷갈렸기 때문인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과 작가의 사생활을 읽는 것은 분명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는 소설집은 9년 만에 출간하는 것이지만 그 사이 산문집은 꾸준하게 발표해 왔다.
작가가 특정 구성에서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 '아, 이것은 작가의 고정관념이겠거니' 하게 마련인데 예를 들면 박완서의 경우 '며느리'를 보는 시선이 그러하다.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며느리(혹은 조카며느리)'는 거의가 영악하다.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영리하고 약은'데 특이한 점은 시어머니(혹은 시고모/시이모)와 며느리 사이가 요즘의 세태에 어울리게 '쿨'하다는 것이다. 특히 시어머니의 대처가 그러하다. 영악한 며느리는 아들과 손주들에게 든든한 울타리 노릇을 할 것이라는 이유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서운한 것이 있어도 일장일단(一長一短)의 현실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설집의 목차 중「거저나 마찬가지」를 읽을 때는 요즘 젊은 작가군(정이현, 김애란 등)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드는데, 하지만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역시 백전노장의 작가는 겉멋에 잔뜩 든 고민풀이 혹은 개똥철학의 낙서장에 머무는 젊은 작가들과 또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아마 이것이 근 40년 가까이 창작활동의 일선에서 버티고 있는 노작가의 힘이려니 싶다.
다소 실망스럽다고는 했으나 그 실망은 작가의 글솜씨가 퇴락했다거나 소설이 재미없다는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
국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록새록 더해가는 궁금증은 왜 (대충)50여년 전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글을 더 잘 쓸까, 하는 거다. 교육적, 문화적, 사상적 수혜자는 해방 전후의 작가들보다 새마을 운동 이후의 세대 아닌가. 만약 누군가 그 이유를 배부른 예술과 배고픈 예술의 차이라고 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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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심리학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6가지 불변의 법칙 설득의 심리학 시리즈
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이현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처세술에 관한 책은『탈무드』한 권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처세술 관련 책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링 자리를 늘 독차지하는 것이 늘 신기하다. 유행이 되어 버린 '*** 심리학' 제목을 달고 나오는 자기 계발서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까 심리학이 궁금하면 심리학자의 저서를 직접 읽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내가 벌써 오래전부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이 책을 내내 외면하다가 뒤늦게, 결국 구입까지 하게 된 것은 역시나 '파격 할인'의 영향이다. 치알디니는 자신의 책이 이러한 판매전략을 통해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아마 알겠지...

온라인 서점마다 서평 수가 가뿐하게 세 자리를 넘고, 몇 년 째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고, 아류작인가 싶게 비슷한 제목의 숱한 심리학 관련 책을 양산하고 있는, 안 읽었지만 이젠 얼핏 읽은 듯 기시감이 들 정도로 낯익은 책이 정가의 반에, 요즘 오를대로 오른 웬만한 과자 가격과 맞먹는 가격에 나오면 취향과 상관없이 구매 버튼을 누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목차 중 낯이 익은 에피소드 두 개는『스키너의 심리학 상자』『지식e』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심리기법이 가장 많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현장은 '마켓'이다.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 모두 조금이라도 이익을 더 남기고자, 손해를 덜 보고자 흥정을 벌이는데 이때 의식/무의식적으로 다양한 심리기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다음은 '일관성의 근거를 만드는 미끼 기법'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부적 변화를 동반한 개입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자기 스스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일단 사람이 내부적으로 변하게 되면 힘들여서 그 변화를 지속시키거나 강화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 내부에서 생성되는 심리적인 일관성의 압력이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 p.160 

이 내용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자기합리화'다.
참고로 자기합리화는 대부분의 충동 구매의 가장 강력한 적인데 일단 판매자는 가격, 상품평, 한정 수량 등을 이용해 미끼를 던져 놓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주 약간이라도 그 미끼에 걸려든 구매자는 그 물건을 사야만 하는, 안 사면 안 되는 '자기합리화'와 줄다리기를 벌이게 된다. 물론 이 싸움에서 백기를 드는 쪽은 거의 언제나 구매자다.

이 외에도 책 속에 등장하는 심리기법 중 주로 홈쇼핑몰 방송에서 자주 보이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도 이 물건 좋다고 인정해요(사회적 증거의 법칙)',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와요(희소성 강조)'가 눈에 띈다.

최근 물건을 사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있었는데 내가 자책한 가장 큰 이유는 정보 수집에 소홀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책에는 이것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내용에 의하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자신이 수집한 정보에 따라 반응하는데 컴퓨터 보급으로 네트워크를 개인이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면서 오히려 과다한 정보가 개인의 정보 활용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즉, 정보가 너무 과다하여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특정 내용에 의지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인데 내가 최근에 저지른 실수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정보처리 능력에도 한계성은 존재한다. 시간, 에너지, 자원 등의 효율성에 대한 고려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여 최상의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방식보다는 단 하나의 중요한 정보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원시적인, 그리고 자동화된 반응 행태를 선택하기도 한다. (중략) - p.377 

어쩌겠는가. 게으른 내 탓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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