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의 고골은 종교에 심취한 사람으로서 결혼하지 않았고 마흔세 살 무렵 미발표 원고를 소각한 뒤 의도적으로 아사했다. 그러나 란돌피가 그린 (카프카나 보르헤스가 창조해 냈을 법한) 고골은 고무풍선과 결혼한 사람이다. 그것은 멋지게 부풀릴 수 있는 인형으로서 남편의 기분에 따라 다른 형태와 크기를 취한다. 이런저런 형태의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고골은 그녀와의 성관계를 즐기며, 그녀에게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Caracas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 이유는 그 미치광이작가밖에 모른다.
몇 년간은 모든 일이 잘 진행되다가 고골이 매독에 걸리게 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매우 부당하게도 카라카스를 비난한다. 말이 없는 아내에 대한 그의 양가적인 태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도를 더해 간다. 그는 카라카스가 자위를 한다고, 심지어는 바람을 피운다고 비난하며, 그녀는 억울해하며 종교에 과도하게 의지하게 된다. 마침내 화가 치밀어 오른 고골이 카라카스에게(다분히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공기를 주입함으로써 그녀는 폭발하여 대기 중에 흩어지고 만다. 부인의 유해를 수습한 뒤 이 위대한 작가는 그것을 벽난로에서 태우는데, 그의 미발표 작품들도 그 유해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 난롯불에 고골은 카라카스의 아들인 고무인형도 던져 넣는다. 이 마지막 파국을 들려준 뒤 그 전기 작가는 고골이 아내를 구타했다는 비난에 대해 그를 변호하고는, 그의 고매한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
.

-p.78, 제1부「단편소설」중 '8. 토마소 란돌피' 

 

 블룸은 단편소설의 두 전통을 체호프 파와 보르헤스 파로 나누는데 두 계파를 읽는 방식을 체호프에게선 진실을, 보르헤스 또는 카프카에게선 전도된 진실을 찾는 것으로 정의한다.

 블룸의 이런 기준을 적용한다면 발췌한 란돌피의「고골의 아내」는 고무풍선 아내라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보나 실존인물 고골을 등장시켜 실제 같은 허구를 들려주는 이야기 방식으로 보나 보르헤스 파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지만, 고골 탓인지 고골의 정신을 잇는 나보코프 탓인지 여하간 블룸은 란돌피를 체호프 파로 분류하고 싶은 듯하다. 

 

 비평의 역할은 다양하겠으나 아무래도 대상 작품을 읽기 전이라면 독자와 작가를 이어주는 관문의 역할을, 이미 읽은 후라면 개인적독서가 사회적독서로 확장되는 기회가 된다. 그런 점에서 란돌피의「고골의 아내」는 모순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발췌문이 이렇게 재미있을 때는 대개 언급된 작가와 작품을 찾아보고 원문이 읽고 싶어지는데 '토마소 란돌리' 혹은 '고골의 아내'는 블룸의 비평을 읽은 것으로 충분한 포만감을 느꼈기 때문. 오히려 란돌피 보다 고골에게 더 흥미가 가는데, 언젠가 읽었던 단편소설집으로 막연히 고딕소설 작가려니 했던 고골을 좀 더 폭넓게 읽었어야 하지 않았나 계기가 됐다.

 

『독서 기술』에 등장하는 작가 중 란돌피 외에 언급하고 싶은 또다른 작가는 바로 체호프다. 블룸이 읽은 체호프의 단편「키스」가 어찌나 매혹적인지 '당장 읽어봐야겠다!'는 충동이 갈증처럼 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가 갸우뚱-. 집에 체호프 단편이 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읽었던 것 같은데-. 책장을 훑었더니 역시나 민음사판『체호프 단편선』이 있다.

책장에서 책을 확인하고 나니 우습게도 이 책을 읽은 기억이 '확실하게' 난다. 아울러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읽었던 감상도 희미하게 떠오르고. 직전까지 내가 체호프를 읽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누군가 그토록 깊게 매료되었던 작가가 내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위화감 때문이었나 싶다.

 

 사실 체호프의 소설이나 희곡을 읽는 기분을 정의하면 더도 덜도 아닌 딱 '완두콩 한 알을 숨긴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일어난' 느낌이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을유문화사 판『체호프 희곡선』을 읽을 때였다.

목록은 대표작인「갈매기」「바냐삼촌」「세 자매」「벚나무 동산」네 편인데 하도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집중도 안 돼서 첫 번째 목록「갈매기」만 읽고 반납해버릴테다! 결심 아닌 결심을 곱씹고 또 곱씹었더랬다. 그리하여「갈매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간신히 넘기고 미련없이 도서관에 반납했으나 며칠 뒤 책을 다시 대출했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고전의 힘'.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완결성을 갖춘 이야기에 담긴 작가의 내공은 이렇듯 은근하고 묵직하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가 무섭게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자의 희곡 전집을 주문한 걸 보면 아무래도 체호프라는 매트리스에는 콩 한 알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도 남을 어떤 특별함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듯 내게 늘 콩 한 알의 불편함을 안겨 주는 체호프인데, 블룸이 읽은 체호프는 어쩜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있는가. 혹시 그가 읽은「키스」는 다른가. 이쯤되니 이 단편을 무조건 읽어봐야겠다는 오기가 드는데 불행히도 민음사 판에는 체호프의 초기작인「키스」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이 단편이 수록된 번역본이 있긴 하나 단편 하나 때문에 책을 사는 것이 망설여진다. 
연유는 모르지만, 작가가 아닌 작품 별로 저작권이 등록되기라도 했는지, 국내에 번역된 체호프 단편소설은 출판사마다 목록이 살짝 엇갈리는데 즉 체호프의 전집을 읽으려면 다른 출판사의 체호프를 각각 모아야 된다는 얘기. 여튼, 그런 이유로 가능한 겹치는 목록을 피해 이미 다른 출판사의 체호프를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단편 하나 때문에 또 한 권의 체호프를 목록에 보태야하나 아무래도 망설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민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집에 있는 창비 세계문학단편선 중 러시아 편『무도회가 끝난 뒤』에 마침 문제의 단편이 수록되었던 것. 제목은 '키스'가 아닌「입맞춤」인데 사소한 호기심을 풀고자 검색해보니 러시아어 원제는 국내의 '입맞춤'이 아니라 블룸의 '키스'가 맞다. (둘의 차이가 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리고 마침내 체호프의「입맞춤(혹은 키스)」를 읽고 난 감상은 역시나 그의 다른 단편을 읽었던 예전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를 사로잡은 건 체호프의 단편에 매혹된 블룸인지도 모르겠다. 방점을 '체호프'가 아니라 '해럴드 블룸'에 찍어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블룸을 매혹시킨 체호프를 발췌하면 이러하다.
 

체호프의 초기작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키스The Kiss」로서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쓴 작품이다. 리야보비치는 포병 여단에서 "가장 소심하고 재미없고 내성적인 장교"로서, 어느 날 저녁 은퇴한 장군의 시골 저택에서 열린 사교 모임에 동료 장교들과 함께 참석한다.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루해진 리야보비치는 어느 어두운 방에 들어서고 모험을 경험하게 된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한 여인이 그에게 키스를 한 뒤 물러선다. 그는 서둘러 빠져나오고, 그 후 그 우연한 만남에 사로잡힌다. 그 만남은 처음에는 환희를 안겨 주었지만 곧 고통으로 바뀐다. 이 가련한 남자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신원을 전혀 알 수 없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전혀 없는 여인과.
그의 포병대가 그 장군의 저택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리야보비치는 공중 목욕탕 근처의 작은 다리를 걷다가 빨래걸이에 걸려 있는 젖은 시트에 손을 뻗어 만진다. 차갑고 거친 감각이 그에게 엄습해 오고, 그는 강물을 내려다 보는데 거기에는 붉은 달이 비추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리야보비치는 인생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농담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다른 모든 장교들은 장군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리야보비치는 홀로 잠자리에 든다.
키스 장면 이외에는 차갑고 축축한 시트를 만지는ㅡ말하자면, 키스와 반대되는ㅡ장면이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 장면은 리야보비치를 파괴하지만, 키스도 마찬가지다. 희망과 기쁨은 아무리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절망보다는 강하며, 궁극적으로는 더욱 치명적이다. 나는「키스」를 읽으며 내가 예전에 체호프에 대해 쓴 글에서 지적한 점을 되뇌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절망케 하리라." 이것이 체호프의 복음이다. 다만 이 우울한 천재는 유쾌하게 살 것을 고집했다. 리야보비치는 자신의 운명이 정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지 앟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일은 이 이야기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 p.42, 제1부「단편소설」중 '2. 안톤 체호프'  

 

* 발췌를 옮기면서 묘사-서술 부분이 블룸의 것과 내가 읽은 것이 미묘하게 다른 것을 발견했다. 단적으로 블룸이 읽은 '공중 목욕탕 근처의 작은 다리 위 빨래걸이에 걸린 시트'가 내가 읽은 창비 판은 '장군 댁 수영장과 다리 난간에 걸쳐진 시트'로 등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체호프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야 된다는 점. 감성을 열고 읽을 때에 비로소 체호프의 문장 행간에 배어 있는 작품의 쓸쓸함, 개인의 외로움, 삶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읽을 때보다 두 번 읽을 때, 두 번 읽을 때보다 세 번 읽을 때...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낯선 감정에 눈을 뜨게 된다.

블룸의 비평 혹은 독서후기는 단순히 독서의 부산물이라고만 보기에는 지나치게 재미있고 그 자체로 독립된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책 혹은 작가를 향한 흥이라든지 진지함이라든지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 그에 더불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나도 같이 저자의 그런 감정에 전염되곤 한다. 그러므로 블룸은 작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두 번째 저자이며 나아가 자신의 독자를 만드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그 증거로 나는 이 한 권을 읽는 동안 체호프와 디킨스를 새로 구매했고,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을 계획을 세웠으며, 책장에서 밀턴의『실낙원』을 확인하며 새삼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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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케인의『거장처럼 써라』에 대한 이동진 기자의 추천사를 옮기면,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실용적 조언과 영문학사 거장들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책' 이라고 한다.
『거장처럼 써라』 의 집필 의도는 한마디로 '거장의 글쓰기로부터 작법을 배운다'라는 건데, 사실 글(시, 소설, 논문 등 텍스트로 된 것이라면 뭐든) 쓰는 방법에 관한 책만큼 쓸모없는 책도 없다. 좋은 작가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3多, 즉,  다독/ 다상량/ 다작 이상 없기 때문. 한마디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글 잘 쓰는 방법' 혹은 '작가가 되는 방법'을 읽는 건 '돈 잘 버는 방법', '결혼 잘 하는 방법'을 읽는 것 만큼이나 쓸 데 없는 낭비다.
어쨌든 늘 미묘하게 취향이 빗나간다 싶던 이동진 기자의 추천사 '영양가 높은'에 혹해서 읽은 『거장처럼 써라』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유익했다. 여기서 유익하다는 건, 작가의 작법 스타일을 안다는 건 다시 말하면 작가의 소설을 이해한다는 의미도 되는데 이 책이 이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기 때문. 예를 들면 멜빌의 시적인 문장이 두운을 맞추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던가 멜빌이 자신의 작품에서 기교와 상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한 친철한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서도 결국 유흥이라고 볼 때, 재미와 유익 중 선택을 해야한다면 당연히 재미다. 그런 점에서 다행하게도 이 책은 일단, 무엇보다, 재미있다.
이 책에는 발자크를 시작으로 21인의 작가가 등장하는데 이 중 내가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작가는 네 명이고, 그 중 한 명이 크누트 함순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기 전까지 이름도 낯설었던 함순이 내게 예상 못 한 큰 재미를 준다.
작가도 모르고 작품도 모르는데 이 챕터는 뛰어 넘을까- 약간 심드렁한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직후에 그만 육성으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결국 책을 읽다 말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아낙: 크누트 함순이라는 노르웨이 작가는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를 지지했대
친구: 왜?
아낙: 영국이 싫어서!

 

아낙: 독일군이 조국을 점령했을 때도 함순은 히틀러를 지지했대. 왜인지 물어봐줘
친구: 왜?
아낙: 영국이 싫어서!

그러니까 작가로 비교적 빨리 성공해 앞날이 창창했던 함순의 미래에 암운을 가지고 온 건 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시기에 함순은 독일의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심지어 그 히틀러가 조국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도 함순은 히틀러를 지지한다. 왜? 영국이 너무나 싫었으니까. 친독주의자가 아니었던 함순은 그저 영국이 너무 싫었던 반영주의자였기 때문에 히틀러와 히틀러의 독일군을 지지한다. 노벨상을 수상했던 이 작가가 내게 그토록 낯설었던 건 아무래도 저런 배경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나마 전후 나치 지지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하니,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함순으로선 불행 중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함순의 재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격언이 떠오른다. 글 잘 쓰는 양반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만 어쩌겠는가. 작가도 인간인 것을.

 

한편 이 책은 다음의 발췌문처럼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부분도 있다.

 

애초에 카프카가『변신』을 쓴 의도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개중에는 카프카의 의도를 눈치챈 이들도 있다. 『포트노이 씨의 불만』(1960)의 저자이자 퓰리처 상 수상작가인 필립 로스도『변신』을 배꼽 빠지게 웃으며 읽었다고 한다. "나는 …… 책상머리에 앉아서 떠벌리는 프란츠 카프카라는 코미디언과 그가 쓴『변신』이라는 제목의 웃기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낄낄거렸던 대목에서는 카프카 자신도 글을 쓰다가 혼자 미소를 지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배꼽을 잡았다. 왜 아니겠는가. 이토록 지독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징그럽지만 정말 웃긴 소설이다." - pp.166-167 『거장처럼 써라』

 

이 문단을 읽고 내가 받은 충격은 중 1때 『변신』을 처음 읽고 받은 충격과 거의 맞먹는다.
아니, 그 암울하고 음울하고 음습하고 피폐하고 읽는 내내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과 씨름하게 만드는 카프카의 소설이 배꼽 빠지게 우습다고? 게다가 작가 역시 웃음을 주기 위한 의도로 썼다고?

카프카는 소설로 내게 충격을 주더니 이렇게 또 한 번 내 뒤통수를 친다. '문학이란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어야 한다'던 카프카의 말은 착실하게 자기실천적 금언이었던 셈.
어쨌든『변신』이 그런 의도로 쓰여졌다는 걸 알고 나니 카프카의 벽이 한층 낮아진 것을 느낀다. 어두운 공간을 메웠던 불길한 상상의 이미지들이 불을 켜는 순간 밝은 빛속으로 일제히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아마 이후로는 (나로선 여전히 괴상하게 보이는) 그의 유머를 즐기는 데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다 편하게 마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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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6-1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패스했던 책인데 담습니다.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실용적 조언,이라는 말을 내세운 책이 하도 많지만
이 책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카프카는 그랬군요, 역시. 문학이란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
 
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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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B가 이 책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당장 사서 읽어봐야겠어, 했더니 고맙게도 B가 책을 보냈다. 하지만 막상 책이 책장에 꽂히니 당장 읽겠다! 했던 마음은 어느새 흐지부지 되고 몇 달이 지나고서야 꺼내 읽은 책.
읽다 보니 99년이던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인 줄 알고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앞 몇 페이지를 읽다 시간이 없어 반납했던 소설『표절』의 재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읽었더라면 아마 또다른 감상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작가는 서스펜스라고 하고, 평자는 미스테리라고 한다는『편집된 죽음』은 한마디로 설명하면 복수극이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편집자가 된 에드워드와 작가가 되길 원했고 작가로 성공한 니콜라의 구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살리에르 증후군이 주요 모티브.
모든 것을 다 가진 니콜라를 향한 에드워드의 열등감, 열패감이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니콜라의 그림자로 살게 하지만, 우연히 어린 날 비극으로 끝났던 사랑과 이별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과 마주치면서 에드워드는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로 결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일견 복수극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에드워드의 다층적인 성격으로 인해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한층 복잡하고 모호해진다.

특히 반전이랄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는 화자인 에드워드의 기억과 달리 니콜라는 실제로 문학천재 혹은 최소한 뛰어난 작가이지 않았을까, 의심이 살짝 고개를 쳐든다. 혹시 이 모든 과정은 평생에 걸친 친구를 향한 자신의 악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개인의 비뚤어진 질투는 아닐까, 라는.

결국은 자존감의 문제인 걸까.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기대는 건 거울 속의 자아를 훔쳐 보는 것과 같다.
니콜라는 실제로 뛰어난 작가였을 수도 있고, 혹은 에드워드의 생각처럼 에드워드의 뛰어난 편집이 만들어낸 허수아비 작가였을 수도 있지만, 니콜라가 에드워드의 질투의 대상인 이상 어느 쪽이든 결말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생을 니콜라의 등을 보며 서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언제든 에드워드로 하여금 거울 밖으로 뛰쳐나오도록 충동질 했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야스미나는 단지 에드워드에게 복수의 계기를 만들어줄 핑곗거리였던 건 아닐까 의심이 가는 대목.

재능있는 작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때 작가지망생이었던 범재에게 끼치는 영향력과 그로 인한 범재의 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싶은 구성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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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번 창비 봄호 단편소설 중「그들과 함께 걷다」(배지영)의 줄거리.

한 남자가 작업 중에 하수구에 갇혔다가 만 이틀 만에 지상으로 나오니, 그 사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이 온통 좀비들 천지다. 다행히도 남자 외에도 여자 생존자가 있어 남자와 여자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짝을 맺고 같이 산다. 그리고 여자가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될 즈음, 생존자가 그들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생존자들이 집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며 위협하는 걸로 끝이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것이 남자에게(혹은 여자에게) 과연 행운이었을까?"

 

영화로도 개봉한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가 차지한 세상에 홀로 생존해 고군분투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결국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인 남자는 이전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마지막 과정 즉 '전설'이 된다.

영화도 썩 나쁘지 않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 것은 역시 소설이다.

다윈의 적자생존을 적용하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지구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것은 좀비이고, 인간은 적응에 실패했으므로 좀비가 지구의 다음 주인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 좀비들이 남자에게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고.

소설에 비해 영화는 공개된 엔딩과 비공개된 엔딩 모두 훨씬 낙관적이다. 남자 외에도 인간 생존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무려 '사회'를 재건하고 있으니까. 다만 영화적 상상이 만들어낸 엔딩 덕분에 제목의 의미는 순식간에 증발한다.

 

궁금하다. "살아남은 것이 남자에겐 행운이었을까?"

 

배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사라 주제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다.

출근길에 한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고 전염병처럼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눈이 멀게 되면서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폐쇄된 도시에 단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안과의사의 아내가 있다.

내용 전개에 의문을 제기한 건 M군이었다. 만약 눈이 멀지 않은 1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약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분명한 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아내에게 그 사실이 어떤 우월한 지위도 안겨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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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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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연휴 동안 읽었는데 예상 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책.

집 여기저기 책이 무더기로 흩어져 있는데, 그중 하필 이 책을 집어든 건 책을 주루룩 넘기다 우연히 멈춘「오셀로」편이 무척이나 재미있어서였다.「오셀로」는 셰익스피어 비극을 다시 읽으려고 민음사판을 사둔 터인데『철학카페...』를 읽는 도중에 책장에서 책을 꺼내 잠깐 읽었다.

 

기획서적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니 기피하는데, 이유는 '상품'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다. 기획서적은 특히 처세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류를 안 좋아하다 보니 그 비호감이 다른 분야로까지 넓혀진 것일 수도 있겠고...

여튼 제목만 보면 딱 기획서적처럼 보이는『철학까페에서 문학 읽기』는 구간 50%할인 도서로 다른 책을 사면서 장바구니에 넣은 건데 안 읽었으면 어쩔뻔 했나 싶다.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문학 속에 나타난 은유나 주제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데 그 내용이 어렵지 않고 흥미롭다. 다만 중언부언이 좀 있는데 이는 저자의 문제라기 보다는 애초 동일한 주제와 목적 의식을 가진 소설을 골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목차 중 '광장', '당신들의 천국', '멋진 신세계', '1984년'은 유토피아의 탈을 쓴 디스토피아를 고발하는 소설이라 서술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 동일한 철학적 해석을 네 번 읽게 되는 셈. 그런 면에서 작품을 좀 더 다양하게 골랐으면 어땠을까 아쉬움도 들지만, 여러 작품에서 동일한 철학적인 주제를 발견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책에 등장하는 작품은 모두 열세 편. 이중 안 읽은 건 네 편, 재독 예정이 두 편, 읽을 가능성이 없는 소설이 한 편이다.

읽을 가능성이 없는 한 편은 바로 M.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예전에 공부한답시고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던 모구립도서관에 새입고된 책 중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새 책을 좋아하는 나는 막 들어온 '잃어버린...' 네 권(1회 대출 제한)을 냉큼 대출해 집으로 왔는데 이때 소설 속 '의식흐름 기법'에 쓴맛을 보고 도중에 독서를 포기하는 최초의 경험을 했다.

 

(전략), 아무리 사소한 것까지도 생생하게 그려내는 그의 솜씨는 세상의 모든 독자들을 가차 없이 두 부류로 나누어놓지요. 처음 300쪽 이전에 책장을 덮는 사람3000쪽을 마치 중독된 것처럼 읽어내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 p.313,『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말하자면 나는 300쪽 이전에 책장을 덮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도 등장했던 마들렌 에피소드는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야기인데, 삼순이가 헤니를 보며 마들렌 얘기를 할 때 '저 작가(혹은 대본 작가)는 정말 저 소설을 읽었단 말인가? 헉!' 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한 사실은 내겐 악몽으로 남은 (아직까지는)유일한 소설이라는 것.

 

책에 관한 책은, 사실 실패 확률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작가가 소설이나 비평 등의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내공을 쌓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 또 해당 책의 목차 중 안 읽은 소설은 읽기 전 길잡이로, 읽은 소설은 과거의 독서를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된다.

 

읽는 도중에 저자의 다른 책을 검색해 보관함에 담았다.

왠지 모르게, 어느 부분인지 정확하게 짚기는 어렵지만, 저자의 종교적 보수성이랄까 느껴지는 지점이 있는데 책을 읽는데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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