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이번 창비 봄호 단편소설 중「그들과 함께 걷다」(배지영)의 줄거리.

한 남자가 작업 중에 하수구에 갇혔다가 만 이틀 만에 지상으로 나오니, 그 사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이 온통 좀비들 천지다. 다행히도 남자 외에도 여자 생존자가 있어 남자와 여자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짝을 맺고 같이 산다. 그리고 여자가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될 즈음, 생존자가 그들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생존자들이 집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며 위협하는 걸로 끝이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것이 남자에게(혹은 여자에게) 과연 행운이었을까?"

 

영화로도 개봉한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가 차지한 세상에 홀로 생존해 고군분투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결국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인 남자는 이전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마지막 과정 즉 '전설'이 된다.

영화도 썩 나쁘지 않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 것은 역시 소설이다.

다윈의 적자생존을 적용하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지구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것은 좀비이고, 인간은 적응에 실패했으므로 좀비가 지구의 다음 주인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 좀비들이 남자에게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고.

소설에 비해 영화는 공개된 엔딩과 비공개된 엔딩 모두 훨씬 낙관적이다. 남자 외에도 인간 생존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무려 '사회'를 재건하고 있으니까. 다만 영화적 상상이 만들어낸 엔딩 덕분에 제목의 의미는 순식간에 증발한다.

 

궁금하다. "살아남은 것이 남자에겐 행운이었을까?"

 

배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사라 주제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다.

출근길에 한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고 전염병처럼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눈이 멀게 되면서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폐쇄된 도시에 단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안과의사의 아내가 있다.

내용 전개에 의문을 제기한 건 M군이었다. 만약 눈이 멀지 않은 1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약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분명한 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아내에게 그 사실이 어떤 우월한 지위도 안겨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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