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5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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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읽기'의 마지막 주자 『밤은 부드러워라』는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발표한 네 권의 장편소설 중 마지막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예전에 몇 페이지 읽다 포기한 이력이 있는데 세월이 흐르고 역자가 달라졌어도 헐리우드 신성 로즈메리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지리한 서술로 가득한 초반부는 '의식 흐름 기법'의 기시감을 불러오며 여전히 인내심을 시험한다. 하지만 초반부를 견디면, 정확히 78p 부터 페이지터너 구간이 시작된다. 인내심이 지금보다 보잘 것 없던 과거엔 발을 딛지 못했던 신대륙이다.


78p는 여름을 즐기려고 리비에라 해변에 모여든 무리들 중 한 명인 매키스코 부인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무리에게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결국 사달을 일으키는 해프닝으로 시작하는데, 매키스코 부인은 아마도 무리의 중심을 자처하며 뭇사람들의 애정과 질시를 받는 다이버 부부의 비밀을 목격한 듯 보인다. 진입장벽이던 로즈메리의 지루한 의식흐름이 끝나고 바야흐로 플롯의 세계로 진입한 것인데 이때부터 독서가 한층 가볍고 흥미로워진다. 달리 '사건'이 소설의 3대 요소이겠는가.


하지만 『밤은 부드러워라』를 읽는 동안 집중을 방해한 진짜 복병은 초반부 로즈메리의 지루한 의식흐름이 아니라 1부와 2부를 읽는 틈틈이 딕 다이버의 엔딩이 궁금해서 찾아본 도서 리뷰와 책 후면 역자 해설이었다. 리뷰 다수와 역자 해설이 입을 모아 딕 다이버의 추락과 딕 없이도 건재한 니콜을 증언했고 이는 이미 익숙한 '개츠비 엔딩'이다. 나로선 가장 선호하지 않는 엔딩이고 따라서 소설을 읽는 시간은 취미가 아니라 노동이 되어 버린다.


피츠제럴드 소설을 연이어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피츠제럴드 잘알'을 자처하게 되는데 장르판에선 김치찌개, 업계에선 자가복제라고 하는 피츠제럴드식 문법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포함 여러 단편을 읽는 동안 나는 재능있고 건실하며 건강한 의지와 잘생긴 외형과 미래를 향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에너지로 무장하고 막 인생의 항로 출발점에 선 청년이 '하필' 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스스로 나락의 길을 가는 기승전결을 이미 충분히 넘치게 봤다. 그러니 나는 그러한 서사의 정점에 선 인물인 딕 다이버가 제이 개츠비와 다른 선택을 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물론 제이 개츠비와 달리 딕 다이버가 직접 화자인 요소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한층 강화할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완독에 이르는 동안 '괴로운 걸 참고 소설을 계속 읽는 건 일종의 자해 아닌가, 도대체 나는 왜 매번 픽션과 거리두기에 실패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와 M에게 수도 없이 던졌는데, 장담하건대 피츠제럴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 M은 아마도 피츠제럴드와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대해 대한민국 평균 독자보다 더 많이 알 거다. 내가 수 개월을 압박면접 보듯이 지치지도 않고 틈만 나면 떠들었는데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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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다이버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정신의학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미래가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스물여섯 살 청년이다. 딕은 우연한 인연으로 스위스 정신병원에서 어리고 예쁘고 부유하지만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니콜을 만나고 니콜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지만 직업적인 윤리와 동정이 전부였던 딕의 이성은 니콜의 구애를 거절한다. 그러나 니콜의 거듭된 구애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고 거기에 직업적인 사명감 혹은 책임감이 더해지며 딕은 건실하게 쌓던 미래의 전망과 그것으로부터 도래할 직업적인 성취를 포기하고 니콜과 결혼을 감행한다. 이때 딕의 선택이 가지는 무게는 프란츠의 충고로 가늠할 수 있다.


"잠깐." 돔러가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멈추려 하지 않았다. "뭐! 그래서 주치의나 간호사 노릇을 하면서 인생의 반을 바치겠다고… 절대 안 돼! 이런 사례가 어떤 건지 나는 잘 알아. 처음 한 번 발병으로 끝이 나는 건 스무 번에 한 번이야ㅡ다시 그 여자를 보지 않는 게 좋아!"

"어떻게 생각하시오?" 돔러가 딕에게 물었다.

"물론 프란츠 말이 맞습니다." (p.237)

 

『밤은 부드러워라』는 3부로 구성되었는데 딕과 니콜이 결혼에 이르는 내용은 2부에서 과거의 파편으로 등장하고, 1부는 리비에라 해변에 여름 휴가를 간 로즈메리가 역시 휴가를 보내려고 모여든 사람들과 그들 중심에 있는 매력적인 다이버 부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 3부는 딕과 니콜의 결혼이 파국에 이루는 과정을 다룬다.


앞서 쓴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나이에 어울리는 치기와 미숙함마저 사랑스러웠던 딕 다이버의 운명이 다른 개츠비들과 다르기를 바랐으나 독서 틈틈이 찾아본 리뷰는 죄다 알콜중독자가 된 딕이 부유한 상속녀 니콜에게 버림받고 나락에 빠지는 엔딩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역자는 해설에서 닉의 결말을 두고 추락과 나락이라는 단어를 연이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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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역자 해설에 내가 속았구나 예감한 건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딕과 베이비(니콜의 언니)의 대화 장면에서였다.


"내가 니콜한테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요." 딕이 말했다. "그렇다 해도 니콜은 아마 나 같은 유형의 사람, 의지할 수 있는ㅡ무한정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했을 겁니다."

"그애가 다른 사람과 살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베이비가 갑자기 마음속 생각을 입 밖에 냈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는 있죠." (p.356)


중요한 건 이 대화가 등장한 시점인데 딕이 '니콜에겐 굳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알콜중독인 친우 에이브가 주류도매점에서 맞아 죽고 연이어 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등장한다. 딕은 에이브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몹시 비통해하는데 묵고 있던 숙소 밖으로 어느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걸 보는 딕의 모습에서 딕이 느끼는 비애감이 잘 드러난다.


그 얼굴들은 의례적인 슬픔을 보여주었지만, 딕은 에이브의 죽음, 그리고 십 년 전 자신의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잠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p.332)


또한 비참했던 에이브와 달리 평생 가난했으나 마지막까지 선한 의지로 살았던 아버지의 평화로웠던 죽음 역시도 딕이 잊고 있었던 또는 외면하고 있었던 무언가를 흔들어 깨운다.


두 사람의 죽음이 딕의 인생에서 극적인 변곡점이 된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후 딕은 미국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파리에 들러 더 젊고 더 충동적일 때도 유혹의 선은 넘지 않았던 로즈메리와 밤을 보내고(리비에라에서 헤어지고 무려 3년이 지난 시점이다),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공공연하게 알콜의존증을 과시한다. 자제력과 품위를 잃고 망가지는 딕의 모습에 가장 실망한 사람은 물론 니콜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니콜은 위화감을 느끼는데 이 과정의 서스펜스가 제법 묵직하다. 


그녀의 달콤한 위협이 균형을 흔들며 그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당신은 전에도 나를 도와줬어요ㅡ이번에도 도와줄 수 있어요."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와줄 수 있을 뿐이야."

"누군가는 나를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도와줄 수 있지. 아이들을 찾아보자고." (p.317)


그러나 그녀는 다음날 아침 딕과 함께 해변에 가면서 딕이 필사적으로 어떤 해법을 궁리하고 있다는 새로운 불안에 사로잡혔다. 골딩의 요트에서 저녁을 보낸 이후로 그녀는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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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은 어느 때는 구제할 길 없는 알콜중독자였다가 어느 때는 모두가 기억하는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따뜻한 중재자였다가, 양극단을 오가는데 기억할 것은 정신의학자 딕은 알콜중독자 친우를 가장 가까이서 10년을 지켜본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어느 새벽에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딕은 한밤에 소동을 일으켜 곤란에 빠진 메리 노스 일행을 돕는다. 만취한 딕의 무례한 언사로 둘의 관계가 냉랭해진 시기에 일어난 해프닝인데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딕은 놀라울 정도로 정상적이다.


"우리를 도와주던 날 밤에 선생님은 예전과 같았어요."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에 캐럴라인 때문에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왜 늘 그렇게 친절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럴 수 있으면서." (pp.507-508)


소설을 읽기 전 소문으로 '불륜과 알콜중독으로 끝장난 딕 다이버의 상류층 경험기'인 줄로만 알았던 『밤은 부드러워라』에 나더러 태그를 붙이라면 불륜, 재즈시대의 몰락, 아메리칸 드림의 신기루 따위가 아닌 #정통고딕을 붙일 것이다. 아마 피츠제럴드도 이 태그를 반기지 않을까. 참고로 단편 「얼음 궁전」에서 고딕 소설에도 재능이 있는 피츠제럴드를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하얀 물살이 잡아챘다가 다시 찬란한 하늘로 던지는 빛에 드러난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곤혹스러움을 드러내는 주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초연해 보였다. 그의 눈은 곧 움직일 체스의 말로 향하듯 서서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똑같이 느린 동작으로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가까이 끌었다. 

"당신은 나를 망쳤어, 그렇지?" 그가 온화하게 물었다. "그럼 우리 둘 다 망한 거야. 그러니ㅡ"

그녀는 공포로 몸이 차가웠다.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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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라』 완독 후 소설 비평에 대해 생각해봤다. '읽지 않은 소설을 말하는 것'을 오독에 포함시키는 것에 관해서도. '게으른 독서'에 관해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가복제가 강한 작가라는 이유로 '개츠비군 소설'에 일률적으로 '개츠비 비평'을 붙여넣기 하는 것은 게으르고 책임 없는 비평이다.


많은 리뷰와 해설과 달리 딕 다이버는 추락하지 않는다.

여타 개츠비들과 달리 딕 다이버는 늦지 않게 자신의 운명의 항로를 튼다. 딕은 성공적으로 니콜을 다른 남자에게 인계하고 니콜의 남편과 주치의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 종장에서 니콜이 점점 더 작은 소도시로 옮겨가는 딕의 근황을 알리는데 이를 두고 딕의 나락/추락이라는 해석은 실체 없는 유령이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로즈메리를 만나러 파리로 가는 여정에서 소도시를 경유할 때 작은 소도시에 대한 딕의 애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자기보다 더 어리고 예쁜 여자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본인 처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딕은 니콜에게 더이상 의지하고 존경하는 대상이 아니다. 니콜이 딕을 그렇게 정의하는 순간 딕은 니콜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이혼이 결정되고 각자의 길을 가기 직전 그들은 모두 리비에라 해안에 있다. 수미상관으로 배치한 이 장면에서 니콜의 시선이 마지막까지 딕을 쫒지만 딕은 한때 애정을 쏟았던 리비에라 해안에 성호를 긋고 사라진다.


전체 맥락을 볼 때 딕의 소도시행은 니콜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초라한 추락이 아니라 메타적 관점으로 딕이 니콜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성공적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토록 애정을 쏟던 아이들과도 연락을 끊고서 말이다.


제이는 실패했지만 딕은 성공한 것이다.


 딕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굽혀 난간에 머리를 기댔다. 이 환자의 진료는 끝났다. 닥터 다이버는 자유를 얻었다. (p.491)


궁금하다. 알콜중독자 딕 다이버가 니콜에게 버림받고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해석은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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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리다 : 피츠제럴드 단편선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보영 옮김 / 이소노미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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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왜요? 제가 즐거워 보이지 않나요?"

"바로 1분 전에 당신이 창밖을 바라보는 걸 봤어요. 몸을 떨던데."

"그냥 저의 상상이었어요." 샐리 캐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 모든 걸 밖에서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 있나 봐요. 가끔씩 밖을 보는데 눈발이 날리는 걸 보면 마치 죽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p.132,「얼음궁전」


 


이하, 목차별 간단 리뷰



「무너져 내리다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를 발표한 후 작가로서 명성이 추락하고 몇 달 뒤 뉴욕포스트의 인터뷰로 세간의 조롱을 받았다(p.103, 최민석 『피츠제럴드』)는 일화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피츠제럴드가 오늘만 사는 욜로족처럼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고는 하나 본인이 정직하게 번 돈을 본인이 쓰고 싶은 대로 썼는데 그게 조롱받고 욕 먹을 일인가 싶은 거다. 사회 현안에 입 꾹 닫고 본인 사생활만 챙겼다고 한들 실망하고 무시하면 말 일이지 '너는 왜'라고 비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결과와 책임은 온전히 본인 몫인데.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젊은 시절 방탕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렀다.

업계는 물론이고 피츠제럴드 까기에 빠질 수 없는 헤밍웨이도 여성스럽다고 비난했다는 「무너져 내리다'(The crack up)」의 경우 하루키처럼 나 역시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이 에세이를 둘러싼 후일담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17년 중 1년은 일부러 빈둥거리고 쉬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일이라면 그저 내일의 멋진 기대감을 갖는 것뿐인 나날들이 이어졌지요. 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49세까지는 괜찮을 거야. 그건 확실해. 나처럼 사는 사람이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뭐."라고 말입니다.

ㅡ그런데 마흔아홉을 십 년 앞두고 갑자기 내가 이미 무너져 내렸음을 깨달았습니다.


-p.24


13년 뒤엔 뉴욕으로 돌아와 새로운 경험을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미래를 상상하던 1932년의 피츠제럴드는('나의 잃어버린 도시'), 성공한 작가로 또다시 도약하고자 의지를 불태웠던 1935년의 피츠제럴드는, 1940년 LA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미완의 원고를 남기고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피츠제럴드는 마흔네 살이었다.


참고로 나는 '무너져 내리다(Crack up)'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느 작가의 오후』 수록 버전 '망가지다'도 읽었는데 판본이 다른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의 번역이 다르다. 

 



「머리와 어깨」 


타고난 천재성이 가리키는 인생의 항로에서 벗어나 사랑을 선택한 열여덟 천재가 뒤늦게 자신이 버리고 포기한 삶의 가치와 크기를 깨닫고 충격받는 장면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는 동안 두 갈래 길을 만나고, 고민하고, 그 중 하나의 길을 걷는다. 가다가 틀렸다고 생각되면 되돌아오면 되겠지 생각하지만 운명은 인간에게 기회비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원래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못 담그는 게 인생의 냉혹한 진리다. 


 


「얼음궁전」


소설을 읽다 문득, 피츠제럴드가 잘 제련된 문장을 쓴다고 생각했던 단편이다. 내용은 가치관과 환경이 다른 남녀가 그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사랑이야기인데 약혼자를 만나러 겨울에 들어선 북부 도시에 간 남부 태생인 샐리 캐롤이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생생하다. 눈 폭풍, 고드름을 매단 차가운 흉벽, 그리고 '얼음 궁전'. 샐리 캐롤이 약혼자를 놓치고 낙오된 채 미로처럼 엉킨 동굴 속에서 헤매는 장면은 18세기 고딕소설의 기시감을 불러오는데 피츠제럴드는 스릴러도 잘 쓰는구나 했다. 아울러 백 수십 편이 넘는 단편을 쓴 작가의 저력을 너무 얕봤다는 반성도 했고.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쓴 단편이 160여 편에 이른다고 하니 섣부른 얘기일수도 있다만 내가 읽은 범위로 한정할 때 가장 유쾌하고 위트 넘치는 소설이었다. 성향이 정 반대인 버니스와 마저리는 사촌간인데 버니스가 한 달 일정으로 마저리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 머무는 동안 일어난 소동을 다룬다. 말하자면 마을의 인플루언서인 마저리는 작은 계기로 고루하고 지루한 버니스의 착장과 애티튜드에 참견하고 사촌의 충고를 받아들인 버니스는 파티의 월플라워에서 한순간에 인기인이 된다. 심지어 오랫동안 마저리에게 구애를 보내던 이웃 남자마저 버니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것처럼 보이는)데 이쯤되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것이다. 여자라면.


나로 말하면 '마저리 요나쁜뇬' 도끼눈을 뾰족하게 세우다 '그래 버니스! 그거지!' 깔깔 웃으며 버니스를 응원했다. 역시 '미덕의 불운'보다 '악덕의 번영'인가. 


나는 재미있거나 괴상한 소설을 읽으면 거의 대부분 M에게 공유하는데 이 단편도 마찬가지. 그리고 덧붙였다. "남자들은 이해 못하는 여자들만의 정치가 있어." 그런데 피츠제럴드가 여성 심리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 그냥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쓴다. '버니스 단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피츠제럴드의 소설 전반이 그렇다.


 


「겨울 꿈」 


미인을 보면서 스물네 시간 아름답다고 감탄하지 않는 것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매번 잘 쓰는구나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 잘 쓰네' 할 때가 있는데 '겨울 꿈'이 그랬다. 개츠비 군집 류인데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식 사랑 이야기'를 읽는 건 한겨울 정오에 아주 잠깐 눈부신 햇살이 지상을 비출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흔한 돌조각에 그 빛이 닿아 반짝 빛나는 순간을 목도하는 기분이 든다.


피츠제럴드가 써내려가는 소설 속 여성은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도록 섬세하고 예민하고 예쁘다. 뿐만아니라 당당하고 자립적이고 도전적이다. 다만 한 가지, 변덕스럽다. 그리고 이 변덕이 그녀들을 사랑하는 남자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이별로 이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남자에겐 재앙의 도래인 것이다.


M.프루스트는 인간에게 중요한 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라는 말을 했지만 적어도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남성에게 중요한 건 '대상'인 것 같다. 오직 데이지여야만 하고, 잔퀼이어야만 하고, 마샤여야만 하고, 주디 심스여야만 한다. 결국 개츠비 식 로맨스는 사랑의 대상이 원인이고 목적이고 결과여서 일어나는 비극의 전과정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찾은 바빌론」 


자전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찰리와 오노리어가 피츠제럴드와 딸 스코티인가 싶기도 하다. 비록 인물은 허구일지 모르겠으나 미국 호황기와 붕괴를 함께 했던 인간 군상이나 동시대 파리 스케치 등은 확실히 경험에서 빌어다 쓴 것으로 보인다. 

줄거리는 1920년 대 미국 호황기가 불려준 재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아내를 잃고 알콜중독으로 쓰러졌던 찰리가 과거를 청산하고 처형 부부에게서 사랑하는 딸 오노리어의 양육권을 되찾고자 하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피츠제럴드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만끽할 수 있는 단편으로 꼽는다. 주 플롯만 보면 「바람 속의 가족」(『어느 작가의 오후』)과 일면 겹치는데, 과거의 과오를 딛고 손상된 현재를 회복하고자 하는 찰리와 그런 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과거 잔재들의 악의가 벌이는 줄다리기가 의외로 치열해서 그 과정의 긴장감이 상당하다. 단편임에도 읽는 도중에 엔딩을 확인했을 정도.




「잃어버린 10년」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가 재미있어서 두 번 읽었다면 '잃어버린 10년'은 순식간에 지나간 풍경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으로 두 번 읽었다. 거의 엽편에 가까운, 매우 짧은 길이의 단편인데 두 번 읽어도 지나간 풍경에 뭐가 있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저 극 중 화자의 대사로 '그렇구나' 미루어 짐작할 뿐. 어쩌면 단지 '풍경' 그게 전부였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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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스 단발로 자르다」「겨울 꿈」을 읽고 이 책을 주변에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책 후면- 이 책의 기획과 편집을 한 두 사람의 대화형 후기를 읽고 한차례 꺾이는데 특히 편집자 마담쿠는, 이 사람은 뭘까 싶었다. 그래도 피츠제럴드와 소설은 죄가 없으니까 추천함.


안 읽은 소설을 중심으로 피츠제럴드 도장깨기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밤은 부드러워라』 한 권을 남겨두고 있는데 피츠제럴드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특한 작가, 문제적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장편을 비롯해 단편 몇 권을 읽을 때는 '개츠비 군집'에 치여 남주 직업과 여주 이름만 다른 일일드라마를 보는 기분에 회의도 들었는데 이는 피츠제럴드가 무려 160여 편의 단편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간과한 섣부른 생각이었고, 개츠비 군집을 헤치고 만나는 단편은 피츠제럴드가 다양한 얘기를 썼음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츠제럴드의 전형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다른 단편을 읽고 싶은 욕심이 든다

 

개인 취향으로 앞서 읽었던 『'어느 작가의 오후』보다 『무너져 내리다』의 목록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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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책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앤솔러지
기 드 모파상 외 지음, 최정수 외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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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관찰자와 몽상가라는 이중의 삶'(pp.422-433)에서 빌려왔다.


사랑의 책죽음의 책은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에서 '사랑', '죽음'를 주제로 선별한 앤솔로지인데 목차 중 몇 편을 찍먹해보자.



모파상 달빛

 

투명한 아침 안개 속에서 긴 계곡, , , 마을들이 보이자 나는 황홀한 마음에 손뼉을 치면서 그이에게 말했지. "여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나 좀 안아 줄래요?" 그러자 그이가 어깨를 조금 으쓱하더니,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띠며 나에게 대답하더구나. "경치가 마음에 드는 것이 포옹을 할 이유가 되오?"

 

-p.12, 달빛


첫 번째 목차인 모파상의 소설을 읽던 중 방심하고 있다가 웃음이 픽 샜던 장면이다. 나는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그중 /E, T/F는 근거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하자면 이 부부의 대화는 전형적인 FT의 대화다. 나중에 해당 장면을 M에게 들려주었다.

 

"모파상의 소설인데, 부부가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 전원 풍경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풍경이 너무 예뻐요 나를 안아줄래요? 했더니 남편이 풍경이 예쁜 거랑 안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 했단 말이지 그러자 매정한 남편에게 상심한 아내에게 애인이 생겨! 너처럼 극극극F들은 명심해야 할 교훈이지 깔깔"

 

해당 장면 이후 불륜을 털어놓으며 괴로워하는 언니에게 동생이 '달빛 때문'이라고 위로한다. 놀라운 건 바로 이 지점인데 직전까지 짧은 콩트 같던 소설은 고작 '달빛' 한 단어로 서정 가득한 소설이 된다. 모파상의 '달빛'은 나쓰메 소세키의 달이 되었다가, 체호프의 달이 되었다가 끝내는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이 된다.

 

명성은 공짜가 아니구나 싶었던 모파상의 한 방이었다.

 

달빛과 /F의 대화 어쩌고 떠들다 보니 드뷔시의 파리(캐서린 카우츠키)에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던 커플이 떠오른다.

 

"말해봐요, 내 사랑. 저 달이 사랑의 꿈을 꾸게 하나요?"

"글쎄요. 달을 보니 아침에 먹은 멜론이 떠오르네요."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원제는 'The Sensible Thing'이다.

 

이 단편은 위대한 개츠비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데 발표 연대를 확인하니 역시  현명한 선택위대한 개츠비보다 1년 앞선다. 1년 동안 피츠제럴드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첫사랑에게 외면당하고 절치부심 성공의 레일 위에 올라 첫사랑 앞에 금의환향한 것까지는 두 소설이 동일한 흐름이지만 첫사랑과 재회 후 조지와 제이는 다른 선택을 한다.

 

단순 정리하자면 제이 개츠비는 문학적인 선택을 했고, 조지 오켈리는 장르적인 선택을 한다. 다만 현명한 선택은 원문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번역으로 읽은 소설은 오픈엔딩인데 관점을 살짝 비틀어보자면 현명한 선택에서 열어두었던 엔딩을 위대한 개츠비에서 닫은 것 같은 혐의가 있다. 그러니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예정이라면 가급적이면 두 소설을 차례로 연속해서 읽기를 권함.

 

조지와 제이 중 누구의 선택이 더 옳았는가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때의 선택이 그들을 어떤 결말로 데리고 가든 이미 그들의 삶에 깃든 우울은 그들과 평생 함께 할 텐데.



땡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건널목을 지나면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기차는 드넓은 교외의 풍경을 뚫고 석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쩌면 그녀도 석양을 바라보며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옛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이 찾아올 것이고, 그는 그녀와 함께 잠 속으로 빠져들며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의 해 질 녘 어둠은 영원히 태양을 가릴 것이고, 나무를 가릴 것이고, 꽃과 그의 젊은 날의 웃음을 가릴 것이다.

 

p.208, 현명한 선택


철로가 꺾이면서 기차는 이제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양은 점점 낮게 가라앉으며 그녀가 숨 쉬었던,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라도 잡으려는 듯, 그녀가 있어 아름다웠던 그 도시의 한 조각이라도 간직해 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흐려진 그의 두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도시는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싱그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p.215-216,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민음사


현명한 선택위대한 개츠비의 산모였구나 했던 장면이다. 연인으로부터 내몰리듯이 올라탄 열차의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조지에게서 석양이 퍼지는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던 쓸쓸하고 우울한 개츠비의 영혼을 엿본 것 같은, 서러운 비애가 느껴졌던 장면.

 

'위대한 개츠비'는 출간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초판은 오랫동안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차 대전 중 군인들에게 보급되고 소설을 읽은 군인들이 제대하면서 뒤늦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금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한 연애담을 읽고 제대한 군인들은 좀더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본주의적인 연애를 했을까.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사랑이야기'라고 하면 으레 장르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단편은 오 헨리, 피츠제럴드, H.G.웰스, 알퐁스 도데, 윌리엄 포크너, 그레이엄 그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다시 장르적 공식에 좀더 충실한 단편을 꼽자면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이고. (모두 개인 기준)

 

오 헨리의 소설은 오 헨리에게 익숙한 혹은 길들여진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커플의 예쁜 이야기.

목장의 보피프 부인은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이다. 단적으로, 할리퀸소설 한 편 읽은 기분.

 


운명의 길을 따라간 지네 한 마리가 상황을 밝혀 주었다.

 

p.183, 목장의 보피프 부인

 

앞뒤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오 헨리가 쓸만한 문장이다.

 



그리고 레이 브래드버리

 

4월의 마녀는 브래드버리의 연작소설 시월의 저택바람 속의 마녀와 동일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직후엔 혹시 세시와 톰의 프리퀄 혹은 시퀄인가 했는데 그냥 같은 소설이다.

 

시월의 저택리뷰에 세시와 톰의 엔딩을 보겠다는 오기로 예쁜 사오정 같은 이 소설을 완독했다고 썼는데 세시와 톰의 에피소드는 똑 떼어 '사랑의 책' 목차에 넣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사랑이야기'.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들... 바람이 풀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초원 어딘가에서 예쁘게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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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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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1악장처럼 '운명이 문을 두드리듯' 옛 동료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아침의 방문객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별 일 없이 그냥저냥 평탄하게 흘러갔을 젊은 군장교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회삿돈을 횡령한 옛 동료 장교를 돕기 위해 도박판에 꼈다가 순식간에 감당 못할 액수의 빚을 진 빌헬름 카스다 소위(빌리)가 막다른 순간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다루는 이 소설은 줄거리만 보면 장르 언어로 '피폐물'인데, 선의에서 비롯된 작은 일탈이 어느 시점부터 운명의 발길질이 되어 빌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난장판을 불러온다.

 

<한밤의 도박>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악의적인 그들은 모두 빌리의 악운에 일정량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하물며 빌리의 비극에 방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도 이 대목이었다. 빌리의 악운에 첫 단추를 끼운 보그너도, 악운에 결정적 쇄기를 박은 슈나벨 영사조차도 빌리의 비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붕괴되었는데도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니 이래서 지옥은 층층이 몇 겹인 듯. 빌리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선택의 순간 지난 과거와 현재의 과오에 책임을 수용하는 빌리는 소설이 진행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놀랍지만 대부분의 선의와 악의는 이란성 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의미.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악의로 느껴질만한 상처를 남겼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날, 빌리는 바로 이 '예의'에 무심했고 그날의 무신경 혹은 무책임은 어김없이 현재의 빌리에게 영수증을 내민다. 그러나 이 모든 지표에도 나는 진심으로 이 젊은 청년에게 청년이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과정이 어떻든 동료의 곤란한 사정을 딱하게 여겨 돕기를 자청하고 동료의 곤궁한 현실에 연민을 느낄 줄 아는 빌리는 본성이 갖고 있는 선량한 조각이 더 컸던 청년이기 때문이다.

 


긴 장마에 카카오99% 반 조각을 삼킨 기분을 남기는 <한밤의 도박>151페이지 분량의 중편이지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하면 감정적 파고의 낙차가 완만한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방심했을 때 짧고 강하게 폭죽을 터트리는데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는 불꽃의 여운이 꽤 강렬하다. 그 불꽃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백하다.

 

<한밤의 도박>은 도박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어긋난 사랑이 젊은 장교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이야기다. 우연이 우연으로 이어지고 중첩된 우연이 필연이 되어 빌리의 나락에 디딤돌을 놓은 것인데, 그래서 제목 <한밤의 도박>에서 '도박'은 이중적인 의미로 보인다. 빌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년 전 그날 밤 자신도 모르게 한 번의 도박이 더 있었던 것이다. 결국 빌리에겐 두 번의 밤, 두 번의 도박이 있었고 잊혀졌던 그날 밤 도박의 빚이 뒤늦게 도래한 것이다.

 

역자후기의 개념을 빌리자면, 직전까지 에로스(삶의 본능)을 불태웠던 빌리가 결국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을 담담하고도 의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결국 사랑 때문이다. 그게 본인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그렇다. 결국 사랑이 문제다.

 

빌리의 선택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만족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는 지금보다는 훨씬 도덕적이고 선량했던 시절이니까.

 

장서가에게 소설을 읽는 의미를 던져주는 작가를 만나는 건 몇 끼 굶어도 즐거운 행운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도 그런 작가다. 내겐 최고의 도파민이 게임도, 영화도, 서브컬처도 아닌 순문학인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빌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 훌륭하군! 그렇다. 어쨌거나 보그너 문제는 책임지고 수습하고 싶었다. 빌리는 보그너가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기를 바랐다. 보그너에겐 기적이 일어났으니까! 보그너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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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

그때도 노래가 불릴까?

그때도 노래는 불릴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대한 노래가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


 

브레히트의 배경을 알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진다.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인가.

 

브레히트는 시론에서 서정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다.



얼마 전 시인 킨예가 이러한 시기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써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써도 된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썼는지 물어보았지요. 그는 못 했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드는 것을 내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따금 몇 줄을 끄적거리면서도 나는 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를 모든 사람을 위해, 즉 비 오는 날 비를 피할 잠자리를 찾아다녀도 집도 절도 없어 빗방울이 그의 옷깃과 목 사이로 그대로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체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나는 그만 움츠러들었어요.”

예술이 오늘의 상황만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언제나 빗방울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가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짐짓 이렇게 떠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만약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면 그런 시가 쓰일 수 있겠지요.”

 

-pp.14-15

 

 

*킨예_ 브레히트를 지칭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도 같은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칠장이_ 화가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지칭



히틀러의 나치를 피해 브레히트는 가족을 데리고 독일을 떠나 유럽과 미국을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친구와 동지를 잃은 브레히트는 평생을 살아남은 자신을 의식하며 살았으며 <살아 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자조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자신이 시를 쓰는 동력은 분노라던 브레히트의 강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실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브레히트로 하여금 서정시를 쓰게 했을까.

고작 빗방울로도 이토록 마음을 수런거리게 하는 브레히트의 분노라니...

 

다시,

실존주의 작가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일까.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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