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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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1악장처럼 '운명이 문을 두드리듯' 옛 동료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아침의 방문객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별 일 없이 그냥저냥 평탄하게 흘러갔을 젊은 군장교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회삿돈을 횡령한 옛 동료 장교를 돕기 위해 도박판에 꼈다가 순식간에 감당 못할 액수의 빚을 진 빌헬름 카스다 소위(빌리)가 막다른 순간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다루는 이 소설은 줄거리만 보면 장르 언어로 '피폐물'인데, 선의에서 비롯된 작은 일탈이 어느 시점부터 운명의 발길질이 되어 빌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난장판을 불러온다.

 

<한밤의 도박>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악의적인 그들은 모두 빌리의 악운에 일정량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하물며 빌리의 비극에 방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도 이 대목이었다. 빌리의 악운에 첫 단추를 끼운 보그너도, 악운에 결정적 쇄기를 박은 슈나벨 영사조차도 빌리의 비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붕괴되었는데도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니 이래서 지옥은 층층이 몇 겹인 듯. 빌리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선택의 순간 지난 과거와 현재의 과오에 책임을 수용하는 빌리는 소설이 진행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놀랍지만 대부분의 선의와 악의는 이란성 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의미.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악의로 느껴질만한 상처를 남겼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날, 빌리는 바로 이 '예의'에 무심했고 그날의 무신경 혹은 무책임은 어김없이 현재의 빌리에게 영수증을 내민다. 그러나 이 모든 지표에도 나는 진심으로 이 젊은 청년에게 청년이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과정이 어떻든 동료의 곤란한 사정을 딱하게 여겨 돕기를 자청하고 동료의 곤궁한 현실에 연민을 느낄 줄 아는 빌리는 본성이 갖고 있는 선량한 조각이 더 컸던 청년이기 때문이다.

 


긴 장마에 카카오99% 반 조각을 먹은 기분을 남기는 <한밤의 도박>151페이지 분량의 중편이지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하면 감정적 파고의 낙차가 완만한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방심했을 때 짧고 강하게 폭죽을 터트리는데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는 불꽃의 여운이 꽤 강렬하다. 그 불꽃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백하다.

 

<한밤의 도박>은 도박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어긋난 사랑이 젊은 장교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이야기다. 우연이 우연으로 이어지고 중첩된 우연이 필연이 되어 빌리의 나락에 디딤돌을 놓은 것인데, 그래서 제목 <한밤의 도박>에서 '도박'은 이중적인 의미로 보인다. 빌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년 전 그날 밤 자신도 모르게 한 번의 도박이 더 있었던 것이다. 결국 빌리에겐 두 번의 밤, 두 번의 도박이 있었고 잊혀졌던 그날 밤 도박의 빚이 뒤늦게 도래한 것이다.

 

역자후기의 개념을 빌리자면, 직전까지 에로스(삶의 본능)을 불태웠던 빌리가 결국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을 담담하고도 의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결국 사랑 때문이다. 그게 본인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그렇다. 결국 사랑이 문제다.

 

빌리의 선택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만족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는 지금보다는 훨씬 도덕적이고 선량했던 시절이니까.

 

장서가에게 소설을 읽는 의미를 던져주는 작가를 만나는 건 몇 끼 굶어도 즐거운 행운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도 그런 작가다. 내겐 최고의 도파민이 게임도, 영화도, 서브컬처도 아닌 순문학인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빌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 훌륭하군! 그렇다. 어쨌거나 보그너 문제는 책임지고 수습하고 싶었다. 빌리는 보그너가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기를 바랐다. 보그너에겐 기적이 일어났으니까! 보그너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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