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케인의『거장처럼 써라』에 대한 이동진 기자의 추천사를 옮기면,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실용적 조언과 영문학사 거장들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책' 이라고 한다.
『거장처럼 써라』 의 집필 의도는 한마디로 '거장의 글쓰기로부터 작법을 배운다'라는 건데, 사실 글(시, 소설, 논문 등 텍스트로 된 것이라면 뭐든) 쓰는 방법에 관한 책만큼 쓸모없는 책도 없다. 좋은 작가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3多, 즉,  다독/ 다상량/ 다작 이상 없기 때문. 한마디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글 잘 쓰는 방법' 혹은 '작가가 되는 방법'을 읽는 건 '돈 잘 버는 방법', '결혼 잘 하는 방법'을 읽는 것 만큼이나 쓸 데 없는 낭비다.
어쨌든 늘 미묘하게 취향이 빗나간다 싶던 이동진 기자의 추천사 '영양가 높은'에 혹해서 읽은 『거장처럼 써라』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유익했다. 여기서 유익하다는 건, 작가의 작법 스타일을 안다는 건 다시 말하면 작가의 소설을 이해한다는 의미도 되는데 이 책이 이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기 때문. 예를 들면 멜빌의 시적인 문장이 두운을 맞추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던가 멜빌이 자신의 작품에서 기교와 상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한 친철한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서도 결국 유흥이라고 볼 때, 재미와 유익 중 선택을 해야한다면 당연히 재미다. 그런 점에서 다행하게도 이 책은 일단, 무엇보다, 재미있다.
이 책에는 발자크를 시작으로 21인의 작가가 등장하는데 이 중 내가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작가는 네 명이고, 그 중 한 명이 크누트 함순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기 전까지 이름도 낯설었던 함순이 내게 예상 못 한 큰 재미를 준다.
작가도 모르고 작품도 모르는데 이 챕터는 뛰어 넘을까- 약간 심드렁한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직후에 그만 육성으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결국 책을 읽다 말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아낙: 크누트 함순이라는 노르웨이 작가는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를 지지했대
친구: 왜?
아낙: 영국이 싫어서!

 

아낙: 독일군이 조국을 점령했을 때도 함순은 히틀러를 지지했대. 왜인지 물어봐줘
친구: 왜?
아낙: 영국이 싫어서!

그러니까 작가로 비교적 빨리 성공해 앞날이 창창했던 함순의 미래에 암운을 가지고 온 건 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시기에 함순은 독일의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심지어 그 히틀러가 조국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도 함순은 히틀러를 지지한다. 왜? 영국이 너무나 싫었으니까. 친독주의자가 아니었던 함순은 그저 영국이 너무 싫었던 반영주의자였기 때문에 히틀러와 히틀러의 독일군을 지지한다. 노벨상을 수상했던 이 작가가 내게 그토록 낯설었던 건 아무래도 저런 배경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나마 전후 나치 지지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하니,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함순으로선 불행 중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함순의 재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격언이 떠오른다. 글 잘 쓰는 양반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만 어쩌겠는가. 작가도 인간인 것을.

 

한편 이 책은 다음의 발췌문처럼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부분도 있다.

 

애초에 카프카가『변신』을 쓴 의도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개중에는 카프카의 의도를 눈치챈 이들도 있다. 『포트노이 씨의 불만』(1960)의 저자이자 퓰리처 상 수상작가인 필립 로스도『변신』을 배꼽 빠지게 웃으며 읽었다고 한다. "나는 …… 책상머리에 앉아서 떠벌리는 프란츠 카프카라는 코미디언과 그가 쓴『변신』이라는 제목의 웃기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낄낄거렸던 대목에서는 카프카 자신도 글을 쓰다가 혼자 미소를 지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배꼽을 잡았다. 왜 아니겠는가. 이토록 지독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징그럽지만 정말 웃긴 소설이다." - pp.166-167 『거장처럼 써라』

 

이 문단을 읽고 내가 받은 충격은 중 1때 『변신』을 처음 읽고 받은 충격과 거의 맞먹는다.
아니, 그 암울하고 음울하고 음습하고 피폐하고 읽는 내내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과 씨름하게 만드는 카프카의 소설이 배꼽 빠지게 우습다고? 게다가 작가 역시 웃음을 주기 위한 의도로 썼다고?

카프카는 소설로 내게 충격을 주더니 이렇게 또 한 번 내 뒤통수를 친다. '문학이란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어야 한다'던 카프카의 말은 착실하게 자기실천적 금언이었던 셈.
어쨌든『변신』이 그런 의도로 쓰여졌다는 걸 알고 나니 카프카의 벽이 한층 낮아진 것을 느낀다. 어두운 공간을 메웠던 불길한 상상의 이미지들이 불을 켜는 순간 밝은 빛속으로 일제히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아마 이후로는 (나로선 여전히 괴상하게 보이는) 그의 유머를 즐기는 데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다 편하게 마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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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6-1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패스했던 책인데 담습니다.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실용적 조언,이라는 말을 내세운 책이 하도 많지만
이 책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카프카는 그랬군요, 역시. 문학이란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
 
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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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B가 이 책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당장 사서 읽어봐야겠어, 했더니 고맙게도 B가 책을 보냈다. 하지만 막상 책이 책장에 꽂히니 당장 읽겠다! 했던 마음은 어느새 흐지부지 되고 몇 달이 지나고서야 꺼내 읽은 책.
읽다 보니 99년이던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인 줄 알고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앞 몇 페이지를 읽다 시간이 없어 반납했던 소설『표절』의 재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읽었더라면 아마 또다른 감상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작가는 서스펜스라고 하고, 평자는 미스테리라고 한다는『편집된 죽음』은 한마디로 설명하면 복수극이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편집자가 된 에드워드와 작가가 되길 원했고 작가로 성공한 니콜라의 구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살리에르 증후군이 주요 모티브.
모든 것을 다 가진 니콜라를 향한 에드워드의 열등감, 열패감이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니콜라의 그림자로 살게 하지만, 우연히 어린 날 비극으로 끝났던 사랑과 이별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과 마주치면서 에드워드는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로 결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일견 복수극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에드워드의 다층적인 성격으로 인해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한층 복잡하고 모호해진다.

특히 반전이랄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는 화자인 에드워드의 기억과 달리 니콜라는 실제로 문학천재 혹은 최소한 뛰어난 작가이지 않았을까, 의심이 살짝 고개를 쳐든다. 혹시 이 모든 과정은 평생에 걸친 친구를 향한 자신의 악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개인의 비뚤어진 질투는 아닐까, 라는.

결국은 자존감의 문제인 걸까.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기대는 건 거울 속의 자아를 훔쳐 보는 것과 같다.
니콜라는 실제로 뛰어난 작가였을 수도 있고, 혹은 에드워드의 생각처럼 에드워드의 뛰어난 편집이 만들어낸 허수아비 작가였을 수도 있지만, 니콜라가 에드워드의 질투의 대상인 이상 어느 쪽이든 결말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생을 니콜라의 등을 보며 서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언제든 에드워드로 하여금 거울 밖으로 뛰쳐나오도록 충동질 했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야스미나는 단지 에드워드에게 복수의 계기를 만들어줄 핑곗거리였던 건 아닐까 의심이 가는 대목.

재능있는 작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때 작가지망생이었던 범재에게 끼치는 영향력과 그로 인한 범재의 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싶은 구성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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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번 창비 봄호 단편소설 중「그들과 함께 걷다」(배지영)의 줄거리.

한 남자가 작업 중에 하수구에 갇혔다가 만 이틀 만에 지상으로 나오니, 그 사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이 온통 좀비들 천지다. 다행히도 남자 외에도 여자 생존자가 있어 남자와 여자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짝을 맺고 같이 산다. 그리고 여자가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될 즈음, 생존자가 그들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생존자들이 집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며 위협하는 걸로 끝이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것이 남자에게(혹은 여자에게) 과연 행운이었을까?"

 

영화로도 개봉한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가 차지한 세상에 홀로 생존해 고군분투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결국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인 남자는 이전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마지막 과정 즉 '전설'이 된다.

영화도 썩 나쁘지 않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 것은 역시 소설이다.

다윈의 적자생존을 적용하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지구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것은 좀비이고, 인간은 적응에 실패했으므로 좀비가 지구의 다음 주인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 좀비들이 남자에게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고.

소설에 비해 영화는 공개된 엔딩과 비공개된 엔딩 모두 훨씬 낙관적이다. 남자 외에도 인간 생존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무려 '사회'를 재건하고 있으니까. 다만 영화적 상상이 만들어낸 엔딩 덕분에 제목의 의미는 순식간에 증발한다.

 

궁금하다. "살아남은 것이 남자에겐 행운이었을까?"

 

배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사라 주제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다.

출근길에 한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고 전염병처럼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눈이 멀게 되면서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폐쇄된 도시에 단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안과의사의 아내가 있다.

내용 전개에 의문을 제기한 건 M군이었다. 만약 눈이 멀지 않은 1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약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분명한 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아내에게 그 사실이 어떤 우월한 지위도 안겨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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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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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연휴 동안 읽었는데 예상 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책.

집 여기저기 책이 무더기로 흩어져 있는데, 그중 하필 이 책을 집어든 건 책을 주루룩 넘기다 우연히 멈춘「오셀로」편이 무척이나 재미있어서였다.「오셀로」는 셰익스피어 비극을 다시 읽으려고 민음사판을 사둔 터인데『철학카페...』를 읽는 도중에 책장에서 책을 꺼내 잠깐 읽었다.

 

기획서적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니 기피하는데, 이유는 '상품'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다. 기획서적은 특히 처세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류를 안 좋아하다 보니 그 비호감이 다른 분야로까지 넓혀진 것일 수도 있겠고...

여튼 제목만 보면 딱 기획서적처럼 보이는『철학까페에서 문학 읽기』는 구간 50%할인 도서로 다른 책을 사면서 장바구니에 넣은 건데 안 읽었으면 어쩔뻔 했나 싶다.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문학 속에 나타난 은유나 주제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데 그 내용이 어렵지 않고 흥미롭다. 다만 중언부언이 좀 있는데 이는 저자의 문제라기 보다는 애초 동일한 주제와 목적 의식을 가진 소설을 골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목차 중 '광장', '당신들의 천국', '멋진 신세계', '1984년'은 유토피아의 탈을 쓴 디스토피아를 고발하는 소설이라 서술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 동일한 철학적 해석을 네 번 읽게 되는 셈. 그런 면에서 작품을 좀 더 다양하게 골랐으면 어땠을까 아쉬움도 들지만, 여러 작품에서 동일한 철학적인 주제를 발견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책에 등장하는 작품은 모두 열세 편. 이중 안 읽은 건 네 편, 재독 예정이 두 편, 읽을 가능성이 없는 소설이 한 편이다.

읽을 가능성이 없는 한 편은 바로 M.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예전에 공부한답시고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던 모구립도서관에 새입고된 책 중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새 책을 좋아하는 나는 막 들어온 '잃어버린...' 네 권(1회 대출 제한)을 냉큼 대출해 집으로 왔는데 이때 소설 속 '의식흐름 기법'에 쓴맛을 보고 도중에 독서를 포기하는 최초의 경험을 했다.

 

(전략), 아무리 사소한 것까지도 생생하게 그려내는 그의 솜씨는 세상의 모든 독자들을 가차 없이 두 부류로 나누어놓지요. 처음 300쪽 이전에 책장을 덮는 사람3000쪽을 마치 중독된 것처럼 읽어내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 p.313,『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말하자면 나는 300쪽 이전에 책장을 덮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도 등장했던 마들렌 에피소드는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야기인데, 삼순이가 헤니를 보며 마들렌 얘기를 할 때 '저 작가(혹은 대본 작가)는 정말 저 소설을 읽었단 말인가? 헉!' 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한 사실은 내겐 악몽으로 남은 (아직까지는)유일한 소설이라는 것.

 

책에 관한 책은, 사실 실패 확률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작가가 소설이나 비평 등의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내공을 쌓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 또 해당 책의 목차 중 안 읽은 소설은 읽기 전 길잡이로, 읽은 소설은 과거의 독서를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된다.

 

읽는 도중에 저자의 다른 책을 검색해 보관함에 담았다.

왠지 모르게, 어느 부분인지 정확하게 짚기는 어렵지만, 저자의 종교적 보수성이랄까 느껴지는 지점이 있는데 책을 읽는데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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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모던뽀이들 - 산책자 이상 씨와 그의 명랑한 벗들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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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 탄생 100주년(2010) 기념으로 기획되었다는 이 책은, 본문 마지막에 내용 출처 문헌을 밝히는데 할애한 페이지만도 14p에 달한다.
저자 후기를 참고하면 내가 집에서 편하게 뒹굴면서 읽은 한 권의 책은 즉 100권의 책, 1년이라는 시간이 집약된 결과물인 셈.
1930년 대의 이상과 그를 둘러싼 신지식인 모던보이들을 조명하는 이 책은 읽는 동안 특히 두 가지가 인상적인데 1930년 대의 경성과 이상을 비롯한 구인회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일대기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모던 도시 경성에 경쟁하듯 우후죽순 들어선 신식 백화점(하물며 승강기도 있다!) 이야기는 그 시절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내겐 무척이나 신선했다.
거기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부녀자, 여대생들이 욕구를 푸는 민간 소비 행태가 지금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는 근대를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민족의 암흑기로만 인식했던, 한 시절에 대한 내 무지를 일깨우는 일종의 컬쳐쇼크였다.
 

백화점 옥상 정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피카소·스트라빈스키·장 콕토의 작품에 열을 올리고, '파리에 가서 삼 년간 공부하고 오자'(김기림-이상) 계획을 세우기도 하며, 친구의 연인을 짝사랑해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하는 모던보이들은 '그 시절도 사람 사는 시절'이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에 '박제'가 있는데 어쩌면 나야말로 30년대 혹은 근대 경성을 박제해서 내 인식 안에 담아두었던 것 같다. 한 장의 흑백 사진, 소리가 거세된 흑백 영상으로만 박제하고 정작 그 시절이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오늘의 과거였음을 잊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나니 본문에 실린 흑백 사진들이 예전과 다른 감성으로 다가온다. 예전엔 기록 사진 정도로만 느꼈다면 지금은 애틋하고 짠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는 차이랄까.


구인회를 중심으로 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운데 그중 김기림이 조선일보 입사 때 본 공채시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상식 시험에 출제된 문제가 데몬스트레슌·조광조·불복종운동·모라토리엄·코즈모폴리턴·아관파천·스탈린 등이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지식산업의 종사자는 똑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데몬스트레슌은 아마도 demonstration인 듯.

 

한편 신지식인 모던보이들의 독서량도 흥미롭다.

한 예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천변풍경』의 박태원은 학생 때 제임스 조이스·고리키·투르게네프·톨스토이·빅토르 위고·모파상·하이네 등에 심취했다고 하는데 왠지 문청의 모범적인 정석 같달까. 얼마 전 조이스의『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면서 서술 구조가 박태원의 작풍과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역시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그 작가가 읽어온 독서 저변과 독서량이 보이는데 최근 몇 년간 현대문학을 하는 몇몇 작가군의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어이없음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거다. 빈약한 서사와 얄팍한 서술구조, 유행에 편승한 국적 불명의 장르 은유는 자신들이야 pop하다고 주장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나 역설적으로 그들 내부의 문학 환경이 얼마나 조악한지 드러낸다.

 

1930년대는 들여다 볼수록 참 재미있는 시대다.

민족수탈, 독립운동, 친일 등 온갖 암울한 요소들이 뒤섞여 판치던 한쪽에선 모던 껄, 모던 뽀이들의 자유연애, 정사(情死)가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본문에 바우만의 '액체 근대'라는 개념이 잠깐 등장하는데, 말하자면 1900-1930년대 경성이야말로 '액체 근대'에 부합하는 시절이었다고...
저자는 이에 덧붙여, 1895년에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내 목을 벨지언정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고 완강하게 저항하던 사회 분위기가 불과 30여년만에 나팔바지, 금팔목시계, 백구두, 봉두난발 등의 '洋'식을 선망하는 시대로 급변이 가능한 배경은 문화의 파급력이 고체가 아닌 액체의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본문 2부 1장) 이라고 해석한다.

 

고백하건데 '이상'은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문인이다.
이상의 사생활도, 이상의 작품도 내 정서로는 교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가 근대 이전에도 근대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문제적 작가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가 일간지에 연재하던 연작시「오감도」는 원래 30회까지 준비했으나 독자들의 반발로 15회로 마감했다고 한다.
한 작가의 문학세계가 보편적이지 않다 해서 기어이 그의 붓을 꺾으려 들었던 독자들의 몰이해가 안타까운 한편 지금도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그의 작품이고 보면 당시로서는 오죽했을까 이해도 가는 부분.
짧은 생마저도 그의 작품 세계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이상.
작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이고 건축기사였던 김해경 혹은 이 상은 천재일까 기재일까.
책을 읽고 나니 천재로 생각이 기운다. 무엇보다 한글과 일어 숫자와 도안이 섞인 육필 원고는 그가 장난으로, 허세로, 가볍게 문학을 한 것은 아니겠거니 하는 작가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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