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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올 상반기에 읽은 소설 중 단연 베스트.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순수하게 '기술'적인 의미로 '아, 이 작가는 정말 글을 잘 쓰는구나' 감탄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시대 배경은 1950년대 초 미국 정가에서 시작해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매카시즘이다. 그리고 미국 월가에서 촉발된 대공황, 두 번의 세계대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되어 냉전구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을 이용해 헤게모니를 쥐려는 미국 정가의 욕망이 아이라 린골드라는 한 인물의 개인사와 맞물려 미국 사회를 까발린다.
『위대한 개츠비』가 전후(1920년-) 미국 경제성장기와 맞물린 한 인간의 애정사가 어떻게 비극으로 치닫는지 보여줬다면,『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전후(1950년-) 미국 정치사와 맞물린 한 인간의 성장기가 본인은 물론 주변인을 어떤 식으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가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치밀한 플롯과 서사의 얼개는 '이게 바로 문학'이라고 웅변하는 듯 하다.
특히 작가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장면은 한낱 단어들이 헤쳐모였을 뿐인 문장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강렬하게 들쑤시고 풀어헤친다. 그중에서도 작중화자(=나) 네이선이 이브와 아이라의 자택 파티에서 계층과 계급의 갈등이 대립 끝에 결국 폭발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장면은(pp.223-254) 페이지를 통째로 옮기고 싶을 정도로 즉물적이고 원색적이다.
대공황을 겪은 전후(戰後) 미국 사회에서 슬럼 지역에 사는 유대인 이민가족이란 계급적으로나 계층적으로나 주류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밑바닥층, 소외 계층을 의미한다.
아이라는 바로 이 밑바닥에서 시작해 참전용사를 거쳐 인기 라디오 드라마 성우가 되고, 당대 인기 여배우인 아내 이브의 후광을 업고 직업적 명성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아이라는 링컨이 잘 어울리는 배우, 인기 성우, 이브의 남편이 됐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아이라를 구성하는 타이틀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공산당원'이다.
아마 10년 전이었다면 혹은 10년 후였다면 이 타이틀이 아이라에게 그만큼의 몰락을 가져다주진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아이라가 살던 시대는 '선동의 시대'였다. 이른바 조 매카시가 국회에서 종이 몇 장을 흔들며 '이 안에 미국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 리스트가 있다'고 의회와 시민을 선동하고, 철강산업 현장과 광산 등지에선 스탈린 사상에 경도된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와 하층민을 선동하는 시대였던 것.
아이라의 형이자 모범적인 영어교사인 머리가 설명하듯 아이라와 이브의 문제는 여느 재혼가정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갈등일 뿐이지만 개인의 가정사에 정치적인 이해 관계가 개입되면 별 거 아닌 개인사도 순식간에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어떤' 음모와 결탁된 것으로 돌변한다. 진짜 불행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가족이 해체되고 미디어를 통해 전국에 통째 발가벗겨진 개인의 삶이 다시 회복 못할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바뀌고 위정자는 살아남는다. 어느 시대에나 한낱 개인의 불행을 발판 삼아 시대의 행운을 거머쥐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아이라는 여러가지로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물인데 아이라의 대척점에 있는 네이선을 통해 그의 결핍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종적, 교육적 약자인 아이라는 유일한 스승 존 오데이로부터 선동과 민중을 배우지만 아버지와 머리 선생님, 친구 아이라를 가진 네이선은 대학에서 만난 스승을 통해 예술의 대상은 대중이며 정치의 대상은 민중이라는, 차이와 선동을 배제한 순수문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지적 발견)에 눈을 뜬다. 이러한 네이선의 성장을 통해 역설적이지만 결국 아이라는 완벽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약점과 단점이 더 많은 인간이고, 아이라에게 결핍된 부분은 그의 탓이 아니며 아이라는 그저 시대의 불운을 피해 가지 못한 희생자였을 뿐임을 이해하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묘하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구분이 뚜렷하다. 아이라와 머리는 끊임없이 말하는 자이고, 네이선은 듣는 자이며 그에 어울리게 직업도 아이라와 머리는 각각 성우, 영어교사이고 네이선은 작가이다. 이는 시대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가의 역할을 되짚게 하는 부분이다.
어떤 대상을 얘기할 때 정작 본질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세태는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인 듯,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한 예로, 유성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스크린을 떠나 브로드웨이를 거쳐 라디오 드라마 인기 성우가 된 여배우에 대한 화제는 여배우의 연기나 필모그래피가 아닌 헤어스타일, 입었던 옷, 과거와 출생의 비밀에 집중된다. 그를 놓고 한창 수다를 떠는 아내와 아내의 동네친구들을 향해 남편이 끼어든다. "목소리 좋던데."
사인을 해달라는 어린 팬에게 인기 TV출연자는 '네 배경이 무엇이냐' 묻는 것도 맥락이 같다. 뿐만 아니라 아이라가 이브에게 읽으라고 건넸던 아서 밀러의 저작 <초점>의 주제 또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외면하는 세태를 비웃는데 이런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 소설 전반에 걸쳐 고루 등장한다.
삶은 길다. 긴 삶이다 보니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다. 다행히 삶은 공평해서 실수를 하면 실수를 바로 잡을 기회도 같이 온다. 그런데 인간이란 늘 현명한 건 아니어서 간혹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놓친다. 그리고 실수가 거듭 되고 만회할 기회를 거듭 놓칠 때 그 동안의 빚을 받으려는 듯 불행이 혹은 불운이 불쑥 찾아온다.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이다. 아이라 역시 자신의 삶을 바로 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이라는 자넬 만났지. 녀석이 결코 되어본 적이 없고,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모든 걸 가진 소년을 만난 거야. 아이라가 자넬 끌어당긴 게 아니었네. 자네 부친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아닐세. 자네가 아이라를 끌어당긴 거야. 그날 아이라가 뉴어크에 건너왔을 때 낙태는 여전히 쓰라린 상처였어. 그래서 아이라에게 자네가 못 견디기게 매혹적인 존재로 비친 거지. 아이라는 매정한 가족에, 눈도 나쁘고, 교육도 못 받은 뉴어크의 소년이었는데, 자넨 모든 것을 가진 잘 자란 소년이었고, 아이라의 할 왕자였던 거지. 자네가 바로 조니 오데이 린골드였던 거야. 자네는 그런 존재였어. 자네가 알든 모르든 그게 자네의 일이었네. 아이라의 본성, 그 커다란 몸에 들어찬 엄청난 힘, 그 모든 살인적 분노에서 그애 자신을 지키도록 돕는 것. 그건 평생 내 일이기도 했어. 많은 사람들의 일이기도 했고. 아이라는 절대 드문 경우가 아닐세.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나? 이게 자네가 물은 '그것'일세. 그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어. 도처에 널려 있지." -pp.495-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