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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책을 펼치고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휴대폰을 켰다. 그리고 기계공학 쪽으로 심하게 지식이 부족한 나는 M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집 말이야, 책 때문에 바닥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을까?" 무너질- 까지 얘기했을 때 냉큼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목차를 지나 '추천의 글'을 읽는데 구구절절 '그래그래, 맞아맞아' 죄다 북마크하고 싶은 문장들이 줄줄 쏟아진다. 뿐인가, 도대체 이 별 내용도 없는 글이 왜 이리 재미있는 거냐고.

의문은 추천사 마지막, '장정일'을 보고서야 풀렸다. 아, 장정일이었구나. 나는 그의 소설은 친구네 걸 빌려서 읽고 그의 독서일기 시리즈는 1부터 하나도 빼지 않고 사서 내 책장 가장 좋은 위치에 꽂아두었다. 새삼 깨닫는다. 나는 역시 독서가 장정일이 정말정말 좋다. 각설하고, 이 책 <장서의 괴로움>은 분명 '에세이'이지만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장서가에 해당하는 내겐 명백하게 '실용서'로 기능한다. 이는 아마 소문난 장서가 장정일도 다르지 않을 터다. 즉슨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누군가 대신하는 것 같은 생생한 기시감을 느끼며 읽었다.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불안하고 공허한 일인가. 책이 한 권도 없는 환경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으리라. -p.107

 

나처럼 집 밖으로 나갈 때 무조건 책부터 챙기는 사람에겐 책이 한 권도 없는 환경에 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딱 한 번 그런 환경에 처한 적이 있는데 몇 년 전에 밴쿠버에 갔을 때다. 어쩌다 책을 못 챙겼는데 비행기에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안절부절 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나를 구원한 건 도착지 호텔 객실 내에 비치되어 있는 Holly Bible이었다. 읽을 수 있다는데 성경이 대순가. 이때의 경험으로 <파이이야기>에서 파이가 구조된 후 호텔에서 성경 즉 '읽을거리'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감사하며 이후 기부하게 됐다는 (성경을 전세계 호텔 객실에 비치하는 기부였나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내용에 나는 체험적으로 공감했다.

 

<장서의 괴로움>은 저자가 일본인이다 보니 전반적인 내용이 일본내 장서가들의 독서환경과 관련된 에피소드로 채워져있다. 물론 이런 부분이 독서에 전혀 방해되지 않을 뿐더러 매 에피소드마다 공감하고 재미있게 읽었을 수 있었던 건 '장서가'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언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므로.

 

일본의 장서가들의 독서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목조주택인데, 일본의 보편적인 건축 양식인 목조주택은 장서가에겐 여러모로 위협적인 환경이다.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면 책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바닥이 내려앉을 수 있는 위험과 지진으로 인해 언제든 책과 책장에 깔려죽을 수 있다는 위험의 가능성인데, 본문에도 등장하는 작고한 어느 평론가의 저서의 제목이 <책이 무너진다>인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저자가 사례로 든 '장서 수난'의 내용을 보면 태평양전쟁 중에 공습으로 집과 함께 장서가 타버린 일화도 예사였던 듯 하다. 불운이라면 불운일, 타버린 장서에 대한 책 주인의 안타까움은 남겨진 기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야나기다 구니오 선생의 《노변총서》가 깨끗이 타서 재만 남았다. 그런데 활자 부분이 하얗게 떠올라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갖고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손을 대기만 해도 바슬바슬 부서졌다. -p.113

 

책 전반을 통해 등장하는 일본의 헌책방 시스템은 부럽기도 하고 인상적인 부분이다. 헌책방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최근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헌책방이 제법 잘 유지될 뿐 아니라 가격이나 수요공급 전반에 걸쳐 제법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느낌이다.

 

이 외에도 내용 중에 등장하는 '장서의 습격'이라는 호칭이 재미있다. 말하자면 '화재', '지진', '이사'가 이 습격 요인에 해당하는데, '지진'은 별개로 친다고 해도 나머지 두 개는 아마 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 하다.
이중 '이사'에 관해서, 무한증식하는 책을 보면서 나는 최근 들어 좀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데 3천 권까지는 책장을 늘리는 고민을 했으나 4천 권에 육박하니 이사를 하는 걸로 고민이 바꼈다. 우스운 건 '장서의 괴로움'을 벗고자 하는 해법에서 책을 줄이겠다거나 그만 사겠다는 방법은 애초에 제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을 그만 사다니, 책을 팔다니 아직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언젠가 M에게 "내가 책이 많은 편인가?" 물었더니 "응" 한다. 어쩌면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4천 권에 육박하는 책을 보면서도 양적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장서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책을 정리해서 줄이라고 충고한다. 일본의 저명한 누구는 500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고도 하는데, 물론 의미 없는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의미 있는 1권을 100번 읽는 것이 훨씬 낫다. 알지만 세상에 의미 있는 책만 골라도 얼마나 많은데 '고작' 500권(숫자가 아니라 제한한다는 게 중요하다)으로 만족하라니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다.

 

"수집가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야. 99는 0과 같지. 100을 모으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거는 것이지." -p.162

 

책 말미에 가면 아니나 다를까 '전자서적' 얘기가 등장한다. 다만 장서가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책의 본질(내용)만큼이나 책의 물성을 아끼는 이들에게 전자책은 종이책의 보완재이지 대체재가 될 수 없다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일까. 결국 장서가에게 남은 선택이란 책 사는 걸 멈추던가, 책을 팔아서 책장을 비우는 수 밖에 없는 듯. 가장 이상적인 건 어디서 눈먼 돈이 뚝 떨어져서 다치바나처럼 고양이빌딩을 세우는 것이겠지만.

 

* 저자가 재미있게 쓴 걸까, 역자가 재미있게 옮길 걸까 궁금할 정도로 책은 재미있고 가독성도 좋다. 한가지 흠이라면 문맥상 '꽂다'의 오타인 '꼽다'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것.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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