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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어떤 도시에는 뭐가 있더라 하는 구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여행의 단계를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이라는 주제로 나눈 뒤, 각 이야기에 어울리는 안내자를 선정해 글을 썼습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호텔방이나 식당, 주유소, 기차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을 즐겨 그렸던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출발’이라는 장의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라는 이야기에 맞물립니다. 그래서 이 책에 부제를 단다면 ‘예술 작품 속 여행과 알랭 드 보통’정도가 되겠네요.
여행은 현실의 공간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인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매일 하는 고민이라고는 어디 구경을 갈까, 뭘 먹을까 하는 게 전부죠. 늦잠을 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말이죠. <여행의 기술>에 따르면 프랑스의 문인 보들레르는 떠나고 싶다는 강박 때문에 여행의 환상에 매달린 사람이었습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라고 스스로 말한 바 있죠. 사실 목적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욕망은 떠나는 거죠.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플로베르의 경우는 평생 이집트를 동경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의 중심을 이루는 측면을 이집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에게 이집트는 고국 프랑스와 다른 땅, 프랑스에서 자신이 거부했던 가치들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땅이었습니다. 플로베르는 사춘기 이후로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그리고 꼭 외국이 아니라 해도 자신만의 장소를 갖는다는 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면서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바쁜 일상 속에서 여행지의 추억을 되새기며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행을 가 있는 시간만큼이나 여행이 끝난 뒤의 시간 때문이라는 거죠.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는 1970년 알프스 트래킹을 갔습니다. 두 발로 걸어 생플롱 고개를 넘고 협곡으로 내려가 마기오르 호수에 다다르는 여정이었죠. 워즈워스는 수십년 뒤에도 이 기억을 되살리며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됩니다. 현실의 고단함과 반대되는 그 모습을 떠올리며 해방감을 맛보는 겁니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의 이런 경험을 ‘시간의 점’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처럼 인생에서 의미있고 쓸모 있는 한 순간으로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때인거죠.
알랭 드 보통은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인 존 러스킨의 예를 통해 여행을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여행지에 대해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러스킨은 데생이야말로 글쓰는 기술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솜씨가 좋지 않아도 데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데생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여행지에서도 빨리빨리 사진만 찍고 가시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가끔은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 멈추어서서 나만의 시선으로 느긋하게 풍경을 그리는 게 기쁨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림을 그림으로서 그 여행지는 나만의 장소로 새로 태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