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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핑거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통속소설이다. 핑거스미스는 좀도둑을 뜻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속어로, 주인공 수가 바로 핑거스미스다. (사진은 영국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핑거스미스>)
수는 고아다. 어머니는 남자를 죽인 죄로 교수형 당했다고 한다. 수는 석스비 부인이라는 여자의 손에 자랐다. 석스비 부인은 런던 뒷골목에서, 어린 아이들을 파는(하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남모르게 들일 양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넘긴다) 여자다. 열일곱이 된 수는 석스비 부인의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의 요청을 받게 된다. 젠틀먼은 본명이 아니고, 이 남자는 어느모로 보나 젠틀먼이 아니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여자를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 수를 그 여자의 몸종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 수는 정든 석스비 부인의 집을 떠나 브라이어 저택으로 간다. 그 곳에는 모드가 있었다. 책만 아는 삼촌과 함께 사는 모드 역시 고아다. 어렸을 때 정신병원에서 자라다가 삼촌의 손에 이끌려 열살 경에 브라이어로 왔다. 조카딸을 정신병원에서 키운 삼촌이라는 인물도 보통은 아니지만 모드의 엄마가 정신병으로 정신병원에서 죽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모드는 책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수는 젠틀먼의 구애를 모드가 받아들이도록 하게 만들기 위해 정성껏 돌보는데 오히려...
이 책이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모양인데 사실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싶긴 하다. 스릴러라는데는 동감한다만. (그 두 가지를 섞어 생각한다면... you win!) 책은 3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은 수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2장은 모드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3장은 다시 수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1장과 2장은 필연적으로 중복되긴 하지만, <모방범>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을만한 방식으로, 사실상 중복이 아니다. 2장은 1장의 부분을 포함하고 있지만 일부에 불과하며, 1장의 마지막 한페이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2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3장은 1장에서 끊긴 부분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이 부분이 2장에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므로 어쨌든 새로운 이야기 되시겠다. 결론은, 뭐 어느 한 곳 대강 읽을 부분이 없는 책이었다. 700페이지나 되는데 긴장감을 어찌나 잘 끌고 가는지 감탄했다.
일단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은 분들을 위해 몇마디 하자면, 이 책은 1/3만 읽으면 꽤 센 반전이 등장한다. 그 다음에도 몇 번이나 앞의 상황을 뒤엎는 상황이 생겨난다. 그리고 양가죽으로 만든 장갑처럼 부드럽게 무심코 지나쳤던 사실들이 하나 하나 톡톡 튀어나온다. 이가 아릴 정도로 반전의 묘미가 강렬해 골무를 준비해 날카로워진 이빨을 갈고 싶었다(이 책을 읽으면 이 말 뜻을 알 수 있다).
작가 세라 워터스는 레즈비언 역사 소설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음란물에 대한 지식도 상당한 모양인데, 음... 이 책에 등장하는 외설물 발췌는 그래서, 실존하는 그 시대 책들에서 인용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서는... 그런 글을 읽고 흥분이 되기는 커녕 너무 웃긴다. (흥분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1장과 2장의 화자가 다른 구성이 효과적인 이유는, 음모의 내막을 소상히 밝히는 데도 있지만 사랑의 문제를 보다 명백히 드러내는데도 있다. 개인적인 소망은, 남녀가 실제로 사랑에 빠질 때도 이렇게 심리상태를 명백히 글로 표현해 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정도?(쿨럭)

<핑거스미스>의 매혹은, 이 책의 몇몇 상징이나 암시가 갖는 의미에도 있다. 장갑을 한사코 끼고 있는(그리고 당당히 표지에도 모습을 드러내는-하지만 원서 표지가 더 장갑을 주각시켜서 원서 표지를 첨부했다) 모드가 어떤 분위기를 보이는지, 장갑을 벗는게 어떤 의미인지에 적응이 되어갈 무렵 갑자기 장갑을 왜 끼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뜨악하기 그지없다. "내 입술이 xx의 입술이라고 상상하고 키스하세요"라는 말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 반복되는 순간의 뜨악함은 또 어떤가. 그런 상상이 필요없는 순간과 그 상상 때문에 비참해지는 순간을 이 책은 얼마나 잘 잡아내고 있는지. 다이아몬드 퀸은 또 어떤가. 작은 손재주가 실패에 돌아가 생긴 우연이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아주 슬퍼진다. 얘기했잖나, 통속적이라고. 우리가 이미 집안 족보보다 잘 알고 있는 통속성이 이 책에는 줄줄 넘쳐흐른다. 그런데 참 잘 썼다.
잘 쓴 장편 특유의 장점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핑거스미스>에도 해당되는 칭찬이다. 악당 젠틀먼을 보고 처음에 약간 멋있을지도... 라고 생각했던 점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진심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존댓말 사용). 일단 젠틀먼의 악인으로서의 자질을 서서히 강력하게 끌어내는 데도 이 책은 효과적이었지만, 석스비 여인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오가게 만드는 이야기 진행 역시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모드의 삼촌은 또 어떤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재, 책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인간형이라는 데 약간의 존경심을 품을 뻔 했으나 이게 웬걸. (그 인간이 살아있으면 내가!)
마지막 대목에서 모드가 새로 택한 직업 때문에, 그 직업에 대한 말 때문에 푸핫 웃어버렸다. 조용한 체념이라는 정서가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빅토리아시대스러운 것이 아닐까?
ps. 역시 여자의 일생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꽤 있다. 어디 꼬인 인생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리고 여자 혼자 나다니다가 어떤 일을 당하는지에 대한 구절들을 읽다가 허걱 질려서 혼자 나가는 밤 산책은 일단 오늘은 보류(라기보다 다 읽고 나니 밤 11시였지만). 이름이 M으로 시작하는 귀족 여인이 딸을 낳고 절망하는 대목에서 왈칵 슬픔이 밀려왔다. 딸이 어때서! 가 아니라, 딸이 자기같은 인생을 살 것이라는 데 절망한 여자의 비탄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약간 나아졌지만 그렇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