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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 말의 가치를 일깨우는 철학 동화
위베르 니생 지음, 크리스틴 르 뵈프 그림, 유정애 옮김 / 현암사 / 2005년 9월
평점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개미』가 워낙 유명하기에 우리는 이제 ‘개미’하면 베르나르의 치밀하고 정교한 작품『개미』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 작품에 비하면 이 책은 너무나 얇고 내용도 간결하다. 그러나 내용의 깊이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 본다.
말의 힘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유독 말에 관한 속담이 많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거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같은 속담은 요즘도 흔히 쓰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은 똑같은 말이어도 어떻게 내뱉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이 달라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이란 오해의 원천이야”라고 쎙떽쥐베리 아저씨는 『어린 왕자』의 여우를 통해서 말의 부정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때론 말은 우리를 죽음에서도 건져 올릴 수 있는 힘을 준다. 교사가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해 주는 칭찬이나 격려의 말은 얼마나 큰 용기와 기쁨을 주는가? 그 외에도 “사랑해. 고마워. 잘했어. 감사해요. 죄송해요...” 같은 말은 퍽퍽한 일상에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한다.
반면에 수많은 욕이나 빈정거림, 야유, 거짓말, 비꼬거나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은 가슴에 칼날을 들이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한 말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한 말이 상처가 되어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말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우화다.
우리는 흔히, 개미는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초록 개미와 파란 개미도 있었단다. 그러나 지금 초록 개미와 파란 개미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요정 엘로이즈의 무분별한 호기심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싶고, 듣고 싶어하는 요정 엘로이즈는 말없이, 열심히, 죽도록 일만하는 초록 개미와 파란 개미의 삶이 궁금해져서 마술봉을 휘둘러 개미에게 인간의 말을 주었다.
처음엔 자신들의 입이 근질근질해지면서 말이 나오자 개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황홀하게 말에 취해서 수다의 세계에 빠져든다. 말은 생산에도 대단히 효율적이다. 더듬이로 앞 개미에게 전달하고, 전달했던 명령을 말 한마디로 모든 개미들에게 다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작업 시간은 현저히 단축되고 개미들은 여가 생활도 즐긴다. 그러나 이제 말은 다른 족속을 비방하고 싸우다 결국 양쪽 다 멸족하게 만드는 무기가 되었다.
초록개미에게 초록의 의미는 초롱초롱하고 총명하고 출중하고 충성스럽다는 얘기가 되지만, 파란개미에게 초록이란 초라하고 촌스럽고 촐싹대고 초치기 좋아하는 천박한 철면피라는 뜻이다. 반면, 파란개미에게 파란은 파릇파릇 귀엽고, 팔랑팔랑 친절하며, 팔딱팔딱 싱싱하고, 폭신폭신 부드러운, 기분 좋고 황홀한 온갖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초록개미가 바라 보는 파란개미란 파괴적이고, 파르르 성을 잘 내고, 팔푼이인데다 파렴치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초록개미들은 초록색은 아름다운 자연의 상징이기 때문에 초록색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고, 파란개미들은 파란색은 하늘의 상징이기에 우주를 지배한다고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냄새를 통해 알아보던 개미들이 갑자기 인간의 언어에서 나온 말로 색깔을 발견해 마구잡이로 쓰게 된 것이다. 그 말은 종족간의 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멸종을 가져왔다. 그래서 우린 지금 파란 개미와 초록 개미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란다.
말이란 의사소통의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 말은 인간사회를 문명의 세계로 진보시켜 놓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침묵은 금이다' 라는 격언은 함부로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켜 준다. 오히려 천 마디 말보다 한 마디 말이 더 가치 있을 때가 있고, 때로는 수만 마디 말보다 눈빛 하나가 더 많은 말을 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난 그동안 내가 한 말을 생각해 본다. 오늘 무심코 던진 내 말이 누구의 가슴에 박혀 빼내지 못할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내 말이 향기가 되어 그 사람의 삶을 환하게 해 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비수를 꽂는 말은 하지 않도록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야겠다. 아직도 난, 어떤 친구가 무심코 한 말을 수년이 지났어도 잊지 못하고, 그후부터 그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 말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말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