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날은 없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1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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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옥수님의 청소년 작품은 거의 다 읽었다. 「푸른 사다리」로 시작해 「키싱 마이 라이프」, 「어쩌자고 우린 열일곱」 등 작가의 문학 더듬이는 청소년의 삶 전반으로 세세하게 닿아 있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럽기보다는 예리하고 신랄하다. 그렇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임을 작가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도시 빈민의 삶에서 시작하여 미혼모, 탄광촌 광부 등 작가의 손길은 많은 작가들이 외면하거나 별로 다루지 않았던 소외계층의 삶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젠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신랄하고 예리하지만 거기엔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믿음이 또 이 책을 읽게 했다.

 

이 책의 부제가 for perfect family 이다.

완벽한 가족은 인류 모두의 로망일 것이다. 완벽한 가족이 없기에 우린 그런 로망을 품으며 꿈을 꾼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 내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가족. 그 불완전한 가족이 완전한 가족을 꿈꾸며 더듬더듬 걸어가는 모습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의 다양성만큼이나 가족의 모습도 다양할 것이다. 이 땅에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희생되고 억압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잘 포장하고 있을까? 형태나 모습은 다를지라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폭력성을 이 책은 가감없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아프다. 그러나 서서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를 보듬으며 결국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지만 또한 가해자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프면서도 따뜻해져 온다.

 

오래 전 추석연휴를 맞아 친구와 둘이서 울릉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둘 다 노처녀이기 때문에 명절날 집안으로 들이닥칠 친척들의 예고된 질문들을 피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명절이 어떤 사람들에겐 헤어져 있던 가족들과의 만남으로 즐거울 수 있겠지만, 정말 즐겁고 애틋한지, 그런 가정이 얼마나 될지 의문을 품게 만든 여행이었다.

 

포항에서 울릉도행 배를 타려고 했으나 뱃시간을 놓쳐 구룡포에서 하루 민박을 하였다. 조용하던 동네에 그래도 명절이라 그런지 시끌벅적하던 추석 전날. 우리는 파도소리가 밤새 철썩 철썩 들리는 바닷가에 민박을 정했다. 쓸쓸한 노처녀들의 명절을 파도소리로 위안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낭만은 잔인하게 깨져 버렸다. 민박집과 이웃하고 있는 옆집에서 밤새도록 형제들의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목소리로 보아 40대쯤 되어 보이는 형제들은 부모의 재산문제로 새벽녘까지 날선 목소리로 우리의 여행을 우울하게 했다. 가족의 한 단면을 그렇게 보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중학교 3학년인 남강민과 20대 직장여성인 최미나, 둘이 화자가 되어 번갈아 가면서 강아지 찡코가 중심이 되어 스토리를 전개한 나간다.

 

형으로부터 받은 모욕, 멸시, 폭력을 주인공 남강민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애완견 찡코에게 되갚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고, 찡코의 죽음은 더욱더 깊은 죄의식 속에 빠트려 버렸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서서히 아버지와 아들들의 정다운 대화는 사라지고 그 틈을 메우는 것은 폭력이다. 그들은 아내의, 또는 엄마의 부재를 견딜힘이 없었다. 사랑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그 결핍감과 상실감을 폭력으로 대신하고 있다. 패고, 맞고 소리치고 부수는 개 같은 날들... 아빠는 형을, 형은 동생을, 동생은 애완견을... 그렇게 폭력은 악순환을 거듭하며 증폭되어 갔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애완견을 죽임으로써 주인공 남강민의 불안한 정서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마성. 그것은 굳이 남강민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찡코를 죽이는 장면이나 같은 또래 근수를 향한 적의와 분노, 폭력 등은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아서 잘 포장된 채 살고 있지, 누구나 그런 상황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처절한 모욕과 멸시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는 강아지 한 마리 죽이는 것이나, 친구를 의자로 내리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질풍노도라고 표현하는 16살 소년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고 낭비될 수밖에 없는 16살 소년에게...

 

 반면 12살 소녀 최나미의 강아지 살해는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폭력적인 오빠로부터 강아지를 지키고 보호하려다 터져 나온 미숙한 실수였다.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기 전에 우리 사회의, 우리 학교의, 우리 가정 안에 있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아니 그 폭력성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우리 내면에서 찾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의 뒤에 감추어진 가족애. 남강민이 친구들한테 폭력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날, 최나미를 통해 묘사된 형 강수의 눈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동생을 때린 친구들에 대한 절절한 분노의 말 “죽었어. 두고 봐. 죽었어, 새끼들!” 그게 형의 모습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법과 비폭력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들의 폭력을 이해하고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안에 있는 내재되어 있는 악마성 뿐만 아니라, 가족애 또한 간과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상처는 치유되어야 한다. 환부는 도려내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이고 아픔이겠지만 고통이 없이는 새살은 돋아나지 않는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결국 곪아 터져서 또 다를 상처를 만들어 낼 뿐이다.

 

  랭보의 시를 빌려 표현한다면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상처를 품고 있는 그 영혼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것이 이 책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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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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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여 전, 모일간지의 ‘문화비전’란에 소설가 백가흠이 쓴 글을 읽었다. 제목은 ‘안나푸르나가 가르쳐 준 것’. 백가흠의 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기에 반가운 맘으로 읽다가 난 죽비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백가흠의 글보다도 마지막 부분에 박범신이 한 말이 나를 더 흔들었다. “나는 선생이 어느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기자가 진짜 촐라체에는 오를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박선생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에겐 소설이 촐라체야. 목숨 걸고 올라가는 거지. 설마 소설 쓰면서 목숨까지 걸까 싶겠지만 나는 걸어.’

이 글을 읽으면서 난 그냥 울고 싶어졌다. 그리곤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걸어. 나는 걸어. 나는 걸어... 나는 소설에 목숨을 걸어..........’
대가인 그 분께서, 수없이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낸 작가인 그 분께서 여전히 목숨을 걸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이었다. 일반인들은 설마 소설 쓰면서 목숨까지 걸까 생각하겠지만 자신은 목숨까지 건다는 그의 말 때문에 난 당장 가까운 동네 서점으로 달려가 이 책을 사왔다. 소설이 곧 촐라체인 ‘그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목숨 걸고 한 일이 있었던가? 자문해 본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재능도 없고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추진을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싶었다. 그리고 격려하고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다. 목숨까지 건다면 할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걸면서...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읽으면서 난 처음으로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작가는 목숨을 걸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촐라체(cholatse).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m 봉우리이다. 전 세계 젊은 클리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인 이 촐라체를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 상민과 영교가 오른다. 그리고 정선배라고 부르는 화자인 '나'가 베이스캠프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서술해 간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뺀 본문은 상민과 영교, 캠프지기(화자)가 1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그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셋은 모두 삶의 깊은 그늘을 지니고 있다. 그 음영은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벼랑끝으로 몰게 한다. 자의보다는 어쩔 수 없이 촐라체로 끌려온 것일 수도 있다. 촐라체를 넘을 때, 그들은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촐라체를 넘지 못할 땐 결국 세상에서도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촐라체는 단순히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이들에겐 실존의 문제였고 삶과 죽음, 생존의 문제였다.

박상민과 하영교,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를 부정하고 거부하면서도 한 핏줄이라는 인연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작가는 그 애증의 관계를 한 자락 한 자락씩 풀어내고 있다. 화자인 나는 중학교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반장인 박상민과 인연을 맺고 있다. 우연히 네팔에서 만난 그들은 거대한 카르마(karma-업, 숙명)에 의해 생사의 경계를 같이 넘나들게 된다.

박상민은 김형주 선배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등반했다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로프를 끊고 죽은 김선배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삶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김형주 선배이다. 상민은 그를 넘지 못하는 삶에서 죽음을 견디며 살았다. 그 죽음같은 삶을 이기기 위해 촐라체로 왔다. 영교는 아버지의 빚을 재촉하는 아버지 후배인 나팔귀 아저씨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듯 촐라체로 왔으며 화자인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때 한 여자가 아들이라며 데리고 온 후 자신의 꿈을 버리고 그 아들을 위해 살았지만 그 아들은 17세 때 절로 들어간다. ‘그리워서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모두 삶에서 패배한 사람들이다. 그 패배는 결국 촐라체로 오게끔 만들었다. 아니, 촐라체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촐라체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곳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곳, 그곳에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느 쪽으로 흡수될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 내야 한다. 그 시간을 견디어서 살아 나온 자만이 촐라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들에게서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았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열정을 보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혹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아직 세상을, 생명을 버릴 수 없었다. 죽음은 끈질기게 그들을 유혹했다. 모진 추위와 굶주림, 갈증, 단말마적인 신체적 고통... 발목이 부러져 건들건들 흔들리고 갈비뼈는 몇 대가 부러져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며 손과 발은 동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들은 끝내 촐라체를 이기고 돌아왔다. 비록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말미암아 손가락을 절단하고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새롭게 시작된 그들의 삶은 이젠 절름발이 삶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우군인 형제를 얻었고, 무엇보다 죽음을 이기고 돌아왔다.

이 책을 덮으며 나의 촐라체는 무엇일까? 나에게 묻는다. 한동안 염세주의,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나에게 이 책 『촐라체』는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미칠 것 같은 날을 보냈다. 오래된 지병이 재발되어 한동안 죽을 것처럼 앓으면서 난 삶이라는 늪에서 헤매었다. 올해 새롭게 계획하고 추진했던 일들은 지지부진했으며 그와 함께 의욕도 잃었다. 벼랑 끝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미친다는 것은 밑을 친다는 말과 같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밑이란 심연의 끝, 세상의 끝, 삶의 끝이 아니겠는가? 그 끝을 본 사람만이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아직 미치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직 세상의 끝은 아니었다. 난 촐라체 근처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밑을 보고 온 상민과 영교도 살아 돌아왔다. 그럼 난 아직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세상의 끝, 벼랑 끝을 보았다 할지라도...

작가는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천지간에 홀로 있다고 느낄 때, 세상이 사막처럼 생각될 때, 그리하여 살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실존의 빙벽 아래로 투신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바로 소설 <촐라체>의 주인공인 ‘상민’과 ‘영교’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p10~11)라고 썼다. 그렇다. 지금 난 상민과 영교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작가에게도...

삶의 크레바스(빙하 위의 균열. 빙하의 경사가 급할수록 발달하는데 깊이가 수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에 갇혀서 죽음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 순간 순간의 환락과 안일에 빠져 삶을 탕진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하고 기동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깨닫게 해 준다. 전인미답의 삶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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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이 가져온 선물, 지도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지음 / 한겨레아이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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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도는 인간의 시야를 확대시키고, 삶을 확장시켜 주었다. 한 장의 지도는 인간에게 꿈과 상상력을 심어주고, 그 꿈을 실현시켜 주며 미지의 세계로 나가게 해 주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국력을 상징하기도 했고, 땅의 모양과 환경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해 예술로 승화시켜 주기도 한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라는 첨단 제품이 발명되면서 지도 없이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찾아갈 수 있지만 난 아직도 자가운전을 하며 먼 거리를 여행할 때는 지도부터 꼼꼼히 살펴보면서 내가 가야할 방향을 머릿속에 입력시키고 메모를 한 후 찾아간다. 네비게이션이 기계에 의존하여 기계처럼 가야한다면 지도는 좀더 인간적이다. 지도 한 장을 매개로 하여 나와 공간이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다.

이 책은 고지도를 중심으로 지도의 역사와 그 시대를 탐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크게 3장으로 나뉘어지는데 1장에서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이라는 큰 제목 아래에 어떻게 지도가 탄생했으며 옛사람들의 지도와 유럽 사람들의 눈에 비친 동양을 설명하고 2장에서는 ‘바닷길을 열어라’라는 제목 아래에 바닷길을 찾아 떠난 사람과 새로운 땅에서 발견한 신기한 물건을 소개한다. 3장에서는 ‘탐험이 가져온 선물’이라는 제목 아래에 지도는 어떻게 만들며, 지도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지도에 무엇을 담았는지, 동양의 지도는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지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땅에 관심을 가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 지도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과 현실, 소망이 반영돼 있다. 고지도에는 제우스나 아폴로, 포세이돈과 같은 신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고대 유럽인들은 세상의 주인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신을 동경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중세시대에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지도에 담았다. 성경에 나오는 가르침과 깨달음을 지도에 담은 것은 그만큼 그 시대엔 기독교가 삶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탐험과 항해가 활발해지면서 지리정보도 풍부해졌고 좀 더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옛사람들의 지도’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와 에라토스테네스의 지도, 알 이드리시의 지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지도는 요즘처럼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그 옛날에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점은 정말 높이 사야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서 사용했던 축적, 기호, 방위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으며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의 움직임을 이용해 지구의 둘레를 정확히 계산했다.

바닷길을 통한 탐험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발판을 만들어 주었고, 세계가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며 정확한 지리정보로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도가 완성되는 기초가 되었다. 바닷길 이전에도 초원길, 비단길로 동서양의 왕래가 있었으나 오스만투르크의 세력이 커지면서 교역을 할 수 없자, 제3의 길인 바닷길이 뚫린 것이다.

그러나 바닷길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향신료나 황금을 얻기 위해, 혹은 노예를 얻기 위해 탐험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노예해안, 황금해안, 상아해안 등의 이름으로 땅을 차지했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면 항해가 쉬워지고 그만큼 더 많은 식민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에 힘썼다. 그것은 곧 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림과 지도가 재미있으면서도 자세히 잘 나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이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서양 중심의 지도에 대해 소개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동양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히 다루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어린이라면 지도의 역사에 대해, 탐험에 필요한 것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 탐험가의 꿈을 꾸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 속의 그림도 소개하고 싶어서 사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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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신이 내게 왔다
백승남 지음 / 예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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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이 말은 도덕 교과서에서 나올 만큼 낡고 닳은 진부한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청소년기를 이처럼 절묘하게 표현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빠르고 세게 부는 바람과 성난 듯 거칠고 세찬 물결' 같은 청소년기는 불안하다. 그들 안에 있는 본성을 제어하기에 그들의 이성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세상은 낯설고 매혹적이다. 발 한번 잘못 삐끗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질 듯 위태롭다. 이 소설은 그 불안함을 우리의 전통신화를 빌려와서 보여주고 있다.

서양 신화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흑문도령이니 흑수문장, 자청비라는 신의 이름은 낯설고 어색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어쩐지 자기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에게 조금 친근함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결국 신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은 나 스스로 자유 의지에 따라 만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검은 수첩을 발견한 ‘나’는 그 후로 자신 안에 새로운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수첩은 문신, 즉 명계의 문지기 신이 놓쳐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으로 ‘나’가 거울 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뒤부터 ‘나’는 문신의 주인이 되고 문신은 ‘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 나의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힘, 그 덩어리는 정의의 사도도, 악의 화신도 아닌 나의 상태나 감정에 따라 선한 일에 쓰이기도 하지만 악의 도구로도 쓰인다. 나는 그 덩어리의 부추김으로 감정을 절제할 줄 모르고 지극히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하게 된다. 청소년기의 특징인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자아를 검은 수첩(괴물)으로 상징화시키고 있다.

 무협지나 판타지, SF소설을 즐겨 읽던 ‘나’는 마치 판타지소설의 주인공인양 그 폭력의 세계에 빠져든다. 문신의 이름인 흑문도령은 나의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면 ‘나’를 화나게 한 대상(선생이나 친구 등)에게 화를 입히게 한다. 말로써가 아니라 ‘기’로 명령체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검은 수첩을 손에 넣은 뒤부터 몇 배의 힘을 가지게 되어서 손길 한 번, 발길 한번에 상대방은 만신창이가 되며 곤두박질치곤 한다.

한없이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결국 나쁜 녀석을 손 봐줄 때면 자기 안에 감추어진 엄청난 에너지를 표출하게 만들고 점점 나는 반 친구들로부터 고립되어 간다. ‘나’가 점점 강해질수록 반면에 문신은 점점 약해진다. 내가 강해지는 건 내 안에 있는 힘, 덩어리(검은 수첩)가 계속 유혹하는 것이고, 그 힘의 정체는 이제 괴물이 되어서 ‘나’를 부추긴다.
 “넌 신의 아이야. 세상의 악을 다스리도록 신이 너를 선택한 거라고”
라면서... 그것을 안 문신은 말한다.
 “빛에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강한 힘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도 대왕님 말씀이야. 넌 원한  만큼 힘을 얻었지만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할 지도 몰라. 더 늦기 전에 그걸 돌려주고 날 놓아주지 그래.(P71)

그러나 '나'는 검은 수첩을 손에 쥔 뒤부터 자신 안에 있는 괴물 같은 힘의 정체가 어디서 온 것인 줄을 알기에 아직 버리고 싶지 않다.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싶은 욕망은 점점 커지고 있다.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 고독한 기사가 되어 썩은 세상에 홀로 저항하는 무림의 떠돌이가 되어 나는 창을 던지고 칼을 휘두른다”(P75)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법. 폭력배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뒤 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병원에서 자기처럼 신의 도움을 받고 있는 완수형을 만나게 된다. 그 형을 만난 뒤 나는 검은 수첩을 문신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내 안의 덩어리, 그 괴물은 ‘나’를 떠나기를 거부한다. ‘나’는 검은 수첩만 있다면 ‘내’ 안의 에너지가 증폭되는 것을 느끼지만 그 에너지는 결국 자기를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감지하고 떠나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선 자신과 괴물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폭력배들로부터 끊임없이 유혹과 도전을 받지만 ‘나’는 그 괴물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결국 그 힘이란 자아와의 싸움이다. 내 안의 덩어리의 실체는 주체할 수 없는 10대의 광기, 폭력성,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원초적인 본능 같은 것이다. 아직 이성으로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청소년기의 본능은 이성적인 인간과 대립하면서 지독한 통과의례의 한 과정을 보낼 것이다. 이 소설의 ‘나’는 덩어리의 유혹을 이기고 자유의지로 자신을 선택한다. 그 자신이란 ‘신의 아이’로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간의 아이’인 것이다.

이 소설엔 주인공의 이름이 없이, 그저 1인칭 주인공 시점인 ‘나’로 서술된다. 작가는 ‘한 순간 삶의 균형 감각을 잃고 헤매다가도 다시금 비약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든 청소년들’이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15세의 청소년들이 이 소설의 ‘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안에 또 다른 나, 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 부분에서 중간부분까지는 리얼하게 묘사된 폭력과 흑문도령, 검은 수첩에 대한 묘사가 너무 섬세해서, 아무리 판타지를 차용했다고는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결국 자기 안의 또 다른 ‘나’인 괴물(즉 본성, 충동성 등)의 싸움에서 지지 않고 버티려는 주인공의 모습은 주제와도 잘 녹아들어 감동을 준다. 무협이나 판타지를 좋아하는 청소년이라면 또 다른 흥미를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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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1-2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내용이군요~~~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카라 2007-11-25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순오기 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다니요^^
사고 싶은 책을 공짜로 살 수 있게 되어서 참 기쁘네요. 알라딘은 잊을만 하면 1년에 한 두번씩 이렇게 기쁨을 주는군요. 더 열심히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듭니다.ㅎㅎ
저도 순오기님의 리뷰를 보고 새로운 책 소개를 많이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댓글도 달아 주시고, 기쁜 소식도 전해 주시고... 행복하고 따뜻한 겨울 되세요^^
 
한 눈 팔기 대장, 지우 돌개바람 12
백승연 지음, 양경희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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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니의 고민은 막내아들의 심각한 한 눈 팔기에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아들은 언니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큰아들도, 둘째 딸도 언니가 원하는 대로 자라 주지 않으니, 셋째인 막내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데 이젠 그 희망마저 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뭔 낙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만일 이 책을 읽고 나서 언니 이야기를 들었다면 난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다 큰다고 얘기해 주었을까? 아마 또 다른 지우가 내 조카일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카도 이 책에 나오는 지우처럼, 아침마다 신신당부를 하며 학교에 곧바로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늘 지각하기 일쑤이다. 학교 끝나자마자 학원 가야하기 때문에 곧장 오라고 하지만 직접 학교에 가서 데려 오지 않으면 제 시간에 맞추어서 온 적이 거의 없다.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수영 개인레슨은 차가 집 앞에서 30분 넘게 기다리다 그냥 가야 할 때가 더 많다고 했다. 그렇게 꾸중을 하고, 잔소리를 해도 여전히 지각하고 늦게 오니 어쩌면 좋겠냐고 언니는 한탄한다.

그러고 보니 잘 아는 선배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그 선배의 아들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단 하루도 지각하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지각 대장이었다. 너무 지각을 하여 1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전에 보냈지만 지각하기는 매한가지라고 했다. 1시간 전에 보냈어도 지각을 하여서 어느 날은 몰래 미행을 했더니, 슈퍼에 들려서 장사하는 것도 구경하고, 문방구에 가서 게임도 하고, 길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나 벌레도 구경하고... 결국에는 매일 아침 함께 손 붙잡고 학교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젠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지우나 조카나 선배의 아들이나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치며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말썽피우는 일도 없이 어른이 만들어 놓은 제도나 규칙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면 어른이 보기에는 얌전한 모범생일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상상력이나, 호기심이 결여된 아이일 수도 있겠다. 어쩜, 그런 아이는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세상에 즐거움이나 변혁을 주는 일에는 소극적이지 않을까? (지금 난 내 조카와 지우를 한없이 변호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이 동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온 기존의 형식과는 다르게 희곡으로 된 동화이다. 그러나 지문은 생략되어 있어, 아이들과 역할극을 하면서 스스로 지문을 만들어 갈 수 있게끔 상상력을 부여하고 있다. 무대에 올려질 희곡이지만 일반 무대보다는 마당극 쪽에 훨씬 가깝다. 직접 등장인물이 관객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빗자루 도깨비, 관객석에 내려가 어린이 관객에게 묻는다.

빗자루 도깨비: 얘, 너도 도깨비 맞지? 괜찮아. 나만 알고 있을게. 도깨비 맞지? 아니라고? 이상한데...

빗자루 도깨비가 자리를 옮겨가며 다른 관객들에게도 계속 묻는다. (p37)



큰 도깨비는 중얼거리며 관객석에가 다가간다. 한 어린이 관객에게 묻는다.

큰 도깨비: 넌 누구니? 혹시 다듬잇돌 방망이? 대걸레 자루? 몽당연필? 부러진 지우개? 휴지통? 다 아니면 그냥 도깨비?

큰 도깨비는 또 다른 아이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큰 도깨비:  너는 무슨 도깨비니? 혹시 학교 가기 싫은 도깨비? 놀기만 하는 도깨비? 춤만 추는 도깨비? 그냥 고개만 설레설레 젓는 이런 도깨비?....(p127)

어린 독자들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당극을 하는 한 복판에서 주인공 지우나 빗자루 도깨비, 큰 도깨비와 함께 흥에 겨워서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흥겨운 마당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대사에는 리듬감이 있어서 저절로 어깨를 으쓱하며 주인공들과 함께 노래를 하며 신나는 판타지 세계로 빠져 들 수 있다.

판타지의 모티브는 학교 옆에 있는 낡은 빈집이다. 판타지의 모티브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괘종시계나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옷장, 또는 거울, 액자 등 여러 소재들이 있다. 어떠한 소재이든 그것들은 모두 어린이를 또 다른 세계로 이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지우는 한 눈 팔지 말고 바로 학교에 가야한다는 엄마의 말에 씩씩하게 네!,라고 대답했지만, 낡은 빈집을 보자 엄마의 당부는 어느새 까맣게 잊고 홀린 듯 빈집으로 향한다. 백 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 집. 지붕은 부서지고 거미줄까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지만 지우의 호기심은 그 곳으로 향한다.

빈집에서 지우는 도깨비와 할아버지의 실랑이를 보다가 그만 빗자루 도깨비와 몸이 바뀌게 된다. 빗자루 도깨비가 된 지우는 이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린 우리네 도깨비를 만나고, 달나라로 가서 토끼와 함께 계수나무 아래서 절구를 찧기도 한다. 얌전하고 착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지만 지우가 된 빗자루 도깨비는 장난꾸러기고,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다시 달나라에서 낡은 빈집에 도착했을 때, 지우는 92세 된 할아버지를 통해서 빗자루 도깨비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우리 안에 있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우는 늘 어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똑똑하고, 얌전하고, 착한 아이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우의 모습은 어린이다운 천성 그대로 놀고 싶어하고, 장난치고, 수다 떨고 ‘몰라 몰라’ 라고 외치는 모습이다. 92세의 할아버지는 지우에게 말한다.

 “그렇단다. 내가 말이다. 한 백년쯤 살아보니 그런 일이 있더라. 내가 나인 줄도 모르고 남인 줄 알고 사는 일, 남이 남인 줄 모르고 난 줄 알고 사는 일,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그런 일 말이다.”(p123)

 이 책의 주제 문장이다. 이 책을 읽은 어린이들은 신나고 즐겁게 지우와 함께 판타지 여행을 하다가 뒷부분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이다. “나도 지우 같아. 얌전하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이고 싶지만 장난꾸러기고, 놀고 싶어하는 아이거든. 그런데 남처럼 살지 않고 나처럼 사는 것은 무엇이지?”라고...

당장 막내 조카에게 이 책을 선물해 줘야겠다. 아마 조카도 지우와 같은, 동일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도깨비를 만나 달나라 토끼까지 만나고 왔지만, 얌전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엄마 때문에 마음 속에만 꾹꾹 담아 놓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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