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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평점 :
프랑스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면 마르셀 에메의 광장이 있다고 한다. 그 광장의 한 쪽엔 아주 특이한 동상 즉, 사람 하나가 건물 벽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듯한 모습의 동상이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책의 작가인 마르셀 에메의 대표작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동상으로 만든 것이란다. 몽마르트르에 이 작가의 광장이 조성되고,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가 만년을 보낸 집이 바로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가 그 곳을 몹시 사랑한 것이고, 프랑스 시민들은 그런 작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선 나도 몽마르트르에 가서 그 동상 앞에 서 보고 싶었다.
프랑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국인들도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제대로 작가 대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단편소설집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편이 없는 작가보다는 단 한 권이지만, 장편 소설을 쓴 작가를 더 대우해 주는데, 마르셀 에메 같은 경우엔 장편 소설이 있음에도 이 책으로 말미암아 더 빛을 발하고, 프랑스인들이 사랑하는 작가라고 한다. 프랑스 단편 문학의 거장이라면 모파상을 들겠지만, 이제 프랑스인들은 모파상보다도 마르셀 에메를 더 꼽는다고 하니, 그의 단편 문학이 어떠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책만 읽어보아도, 단편 문학의 미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일상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판타지를 들여다보노라면 프랑스인들이 왜 마르셀 에메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하엘 엔데를 떠올렸지만, 같은 환타지 소설을 쓴다고 해도 색깔은 역시 다르다. 미하엘 엔데가 좀더 진지하다면, 마르셀 에메는 왠지 골계미가 느껴진다고 할까? 해학과 장난스러움이 엿보인다. 역자 후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 조어를 만들어서 이젠 그것이 일반 명사가 되기도 했단다. 그 예로 이 책의 제목인 Le passe-muraille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이다.
이 책에는 모두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5편의 작품에서 <속담>만 빼면 나머지 4편은 모두 판타지 작품이다. 가장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칠십리 장화>이다. 나는 <천국에 간 집달리>는 반전으로 인해 흥미를 느꼈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주제가 주는 메시지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는다. 끝내 벽에 갇히고 마는 불행한 사내 가루가루. 사랑하는 여인으로 인해 벽에 갇혀야 하는 운명은 축복일까? 비극일까? <생존 시간 카드>는 그 탁월한 상상력으로 인해 재미있게 읽었다. 인간이 죽었다가 또 태어나고, 다시 죽을 수 있다니... 익살스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 그토록 불안하거나, 처절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언젠가는 잠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찾아오긴 하겠지만... 모처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친절한 역자 후기로 인해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후기가 아니었다면 프랑스 언어를 모르는 독자들은 그 속에 담겨진 여러 가지 뜻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