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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날은 없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1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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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옥수님의 청소년 작품은 거의 다 읽었다. 「푸른 사다리」로 시작해 「키싱 마이 라이프」, 「어쩌자고 우린 열일곱」 등 작가의 문학 더듬이는 청소년의 삶 전반으로 세세하게 닿아 있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럽기보다는 예리하고 신랄하다. 그렇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임을 작가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도시 빈민의 삶에서 시작하여 미혼모, 탄광촌 광부 등 작가의 손길은 많은 작가들이 외면하거나 별로 다루지 않았던 소외계층의 삶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젠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신랄하고 예리하지만 거기엔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믿음이 또 이 책을 읽게 했다.

 

이 책의 부제가 for perfect family 이다.

완벽한 가족은 인류 모두의 로망일 것이다. 완벽한 가족이 없기에 우린 그런 로망을 품으며 꿈을 꾼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 내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가족. 그 불완전한 가족이 완전한 가족을 꿈꾸며 더듬더듬 걸어가는 모습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의 다양성만큼이나 가족의 모습도 다양할 것이다. 이 땅에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희생되고 억압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잘 포장하고 있을까? 형태나 모습은 다를지라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폭력성을 이 책은 가감없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아프다. 그러나 서서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를 보듬으며 결국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지만 또한 가해자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프면서도 따뜻해져 온다.

 

오래 전 추석연휴를 맞아 친구와 둘이서 울릉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둘 다 노처녀이기 때문에 명절날 집안으로 들이닥칠 친척들의 예고된 질문들을 피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명절이 어떤 사람들에겐 헤어져 있던 가족들과의 만남으로 즐거울 수 있겠지만, 정말 즐겁고 애틋한지, 그런 가정이 얼마나 될지 의문을 품게 만든 여행이었다.

 

포항에서 울릉도행 배를 타려고 했으나 뱃시간을 놓쳐 구룡포에서 하루 민박을 하였다. 조용하던 동네에 그래도 명절이라 그런지 시끌벅적하던 추석 전날. 우리는 파도소리가 밤새 철썩 철썩 들리는 바닷가에 민박을 정했다. 쓸쓸한 노처녀들의 명절을 파도소리로 위안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낭만은 잔인하게 깨져 버렸다. 민박집과 이웃하고 있는 옆집에서 밤새도록 형제들의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목소리로 보아 40대쯤 되어 보이는 형제들은 부모의 재산문제로 새벽녘까지 날선 목소리로 우리의 여행을 우울하게 했다. 가족의 한 단면을 그렇게 보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중학교 3학년인 남강민과 20대 직장여성인 최미나, 둘이 화자가 되어 번갈아 가면서 강아지 찡코가 중심이 되어 스토리를 전개한 나간다.

 

형으로부터 받은 모욕, 멸시, 폭력을 주인공 남강민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애완견 찡코에게 되갚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고, 찡코의 죽음은 더욱더 깊은 죄의식 속에 빠트려 버렸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서서히 아버지와 아들들의 정다운 대화는 사라지고 그 틈을 메우는 것은 폭력이다. 그들은 아내의, 또는 엄마의 부재를 견딜힘이 없었다. 사랑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그 결핍감과 상실감을 폭력으로 대신하고 있다. 패고, 맞고 소리치고 부수는 개 같은 날들... 아빠는 형을, 형은 동생을, 동생은 애완견을... 그렇게 폭력은 악순환을 거듭하며 증폭되어 갔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애완견을 죽임으로써 주인공 남강민의 불안한 정서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마성. 그것은 굳이 남강민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찡코를 죽이는 장면이나 같은 또래 근수를 향한 적의와 분노, 폭력 등은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아서 잘 포장된 채 살고 있지, 누구나 그런 상황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처절한 모욕과 멸시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는 강아지 한 마리 죽이는 것이나, 친구를 의자로 내리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질풍노도라고 표현하는 16살 소년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고 낭비될 수밖에 없는 16살 소년에게...

 

 반면 12살 소녀 최나미의 강아지 살해는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폭력적인 오빠로부터 강아지를 지키고 보호하려다 터져 나온 미숙한 실수였다.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기 전에 우리 사회의, 우리 학교의, 우리 가정 안에 있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아니 그 폭력성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우리 내면에서 찾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의 뒤에 감추어진 가족애. 남강민이 친구들한테 폭력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날, 최나미를 통해 묘사된 형 강수의 눈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동생을 때린 친구들에 대한 절절한 분노의 말 “죽었어. 두고 봐. 죽었어, 새끼들!” 그게 형의 모습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법과 비폭력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들의 폭력을 이해하고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안에 있는 내재되어 있는 악마성 뿐만 아니라, 가족애 또한 간과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상처는 치유되어야 한다. 환부는 도려내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이고 아픔이겠지만 고통이 없이는 새살은 돋아나지 않는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결국 곪아 터져서 또 다를 상처를 만들어 낼 뿐이다.

 

  랭보의 시를 빌려 표현한다면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상처를 품고 있는 그 영혼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것이 이 책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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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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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여 전, 모일간지의 ‘문화비전’란에 소설가 백가흠이 쓴 글을 읽었다. 제목은 ‘안나푸르나가 가르쳐 준 것’. 백가흠의 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기에 반가운 맘으로 읽다가 난 죽비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백가흠의 글보다도 마지막 부분에 박범신이 한 말이 나를 더 흔들었다. “나는 선생이 어느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기자가 진짜 촐라체에는 오를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박선생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에겐 소설이 촐라체야. 목숨 걸고 올라가는 거지. 설마 소설 쓰면서 목숨까지 걸까 싶겠지만 나는 걸어.’

이 글을 읽으면서 난 그냥 울고 싶어졌다. 그리곤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걸어. 나는 걸어. 나는 걸어... 나는 소설에 목숨을 걸어..........’
대가인 그 분께서, 수없이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낸 작가인 그 분께서 여전히 목숨을 걸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이었다. 일반인들은 설마 소설 쓰면서 목숨까지 걸까 생각하겠지만 자신은 목숨까지 건다는 그의 말 때문에 난 당장 가까운 동네 서점으로 달려가 이 책을 사왔다. 소설이 곧 촐라체인 ‘그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목숨 걸고 한 일이 있었던가? 자문해 본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재능도 없고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추진을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싶었다. 그리고 격려하고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다. 목숨까지 건다면 할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걸면서...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읽으면서 난 처음으로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작가는 목숨을 걸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촐라체(cholatse).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m 봉우리이다. 전 세계 젊은 클리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인 이 촐라체를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 상민과 영교가 오른다. 그리고 정선배라고 부르는 화자인 '나'가 베이스캠프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서술해 간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뺀 본문은 상민과 영교, 캠프지기(화자)가 1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그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셋은 모두 삶의 깊은 그늘을 지니고 있다. 그 음영은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벼랑끝으로 몰게 한다. 자의보다는 어쩔 수 없이 촐라체로 끌려온 것일 수도 있다. 촐라체를 넘을 때, 그들은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촐라체를 넘지 못할 땐 결국 세상에서도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촐라체는 단순히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이들에겐 실존의 문제였고 삶과 죽음, 생존의 문제였다.

박상민과 하영교,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를 부정하고 거부하면서도 한 핏줄이라는 인연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작가는 그 애증의 관계를 한 자락 한 자락씩 풀어내고 있다. 화자인 나는 중학교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반장인 박상민과 인연을 맺고 있다. 우연히 네팔에서 만난 그들은 거대한 카르마(karma-업, 숙명)에 의해 생사의 경계를 같이 넘나들게 된다.

박상민은 김형주 선배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등반했다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로프를 끊고 죽은 김선배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삶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김형주 선배이다. 상민은 그를 넘지 못하는 삶에서 죽음을 견디며 살았다. 그 죽음같은 삶을 이기기 위해 촐라체로 왔다. 영교는 아버지의 빚을 재촉하는 아버지 후배인 나팔귀 아저씨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듯 촐라체로 왔으며 화자인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때 한 여자가 아들이라며 데리고 온 후 자신의 꿈을 버리고 그 아들을 위해 살았지만 그 아들은 17세 때 절로 들어간다. ‘그리워서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모두 삶에서 패배한 사람들이다. 그 패배는 결국 촐라체로 오게끔 만들었다. 아니, 촐라체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촐라체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곳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곳, 그곳에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느 쪽으로 흡수될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 내야 한다. 그 시간을 견디어서 살아 나온 자만이 촐라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들에게서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았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열정을 보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혹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아직 세상을, 생명을 버릴 수 없었다. 죽음은 끈질기게 그들을 유혹했다. 모진 추위와 굶주림, 갈증, 단말마적인 신체적 고통... 발목이 부러져 건들건들 흔들리고 갈비뼈는 몇 대가 부러져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며 손과 발은 동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들은 끝내 촐라체를 이기고 돌아왔다. 비록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말미암아 손가락을 절단하고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새롭게 시작된 그들의 삶은 이젠 절름발이 삶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우군인 형제를 얻었고, 무엇보다 죽음을 이기고 돌아왔다.

이 책을 덮으며 나의 촐라체는 무엇일까? 나에게 묻는다. 한동안 염세주의,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나에게 이 책 『촐라체』는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미칠 것 같은 날을 보냈다. 오래된 지병이 재발되어 한동안 죽을 것처럼 앓으면서 난 삶이라는 늪에서 헤매었다. 올해 새롭게 계획하고 추진했던 일들은 지지부진했으며 그와 함께 의욕도 잃었다. 벼랑 끝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미친다는 것은 밑을 친다는 말과 같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밑이란 심연의 끝, 세상의 끝, 삶의 끝이 아니겠는가? 그 끝을 본 사람만이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아직 미치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직 세상의 끝은 아니었다. 난 촐라체 근처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밑을 보고 온 상민과 영교도 살아 돌아왔다. 그럼 난 아직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세상의 끝, 벼랑 끝을 보았다 할지라도...

작가는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천지간에 홀로 있다고 느낄 때, 세상이 사막처럼 생각될 때, 그리하여 살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실존의 빙벽 아래로 투신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바로 소설 <촐라체>의 주인공인 ‘상민’과 ‘영교’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p10~11)라고 썼다. 그렇다. 지금 난 상민과 영교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작가에게도...

삶의 크레바스(빙하 위의 균열. 빙하의 경사가 급할수록 발달하는데 깊이가 수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에 갇혀서 죽음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 순간 순간의 환락과 안일에 빠져 삶을 탕진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하고 기동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깨닫게 해 준다. 전인미답의 삶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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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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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소설상이 어느새 12회 째를 맞이하여 모두 여덟 작품이 나왔다. 여덟 작품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읽은 것 중에서 제 1회 『새의 선물』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다.(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제 10회의 『고래』작품도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데는 인정하겠지만 치밀한 플롯이 아쉬웠고, 11회의『수상한 식모들』에서는 발상은 신선하고 유쾌했지만 너무 가볍고,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12회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심사위원들의 평을 듣고 몹시 기대했다. ‘이제까지의 소설세계를 폭파시킬 매머드급 이야기’라던가,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라는 평은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드디어 책이 왔다. 표지보고, 뒷표지의 심사평을 읽고, 소제목을 훑어보고, 수상소감까지 읽었어도 쉽게 책을 펼칠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나 최근에 산 책이 쌓여 있어서 만은 아니다. 내 취향이 그렇다. 남들이 너무 좋다고 하면 기대감과 함께 그렇지 못할 경우의 실망감이 두려워 쉽게 펴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너무 맛있는 것은 나중에 아껴 먹는 어린 아이의 심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음미해 보고 싶은 마음...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다.

표지 뒷면의 ‘화려한 이야기들의 신천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최근에 읽은 장편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능가하는 판타지급 이야기는 한번 책을 붙들면 결국 다른 것은 하나도 할 수 없을 만큼 뒷장까지 오고야 만다. 소설의 기능 중에 하나인 재미, 즐거움을 이야기한다면 이 소설은 거기에는 충분히 합격점이다. 고양이가 간절히 되고 싶은 130킬로그램의 거구의 사나이나,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한 몸에 두 성이 존재하여 자가수정을 하는 사람, 입속에 도마뱀을 키우다 결국 실어증이 되어 사는 여자나, 심토머, 토포러, 도플갱어, 샴쌍둥이 등 상상하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앞으로 소설은 어디까지 새로워질 수 있을까? 375개의 파일 중에서 이 곳에 다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이야기는 개연성 있는 허구가 아닌 환상에 닿아 있지만, 내용은 삶의 진실에 발 딛고 있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많은 변종인간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나도 심토머이지 않는가 자문해 본다.(‘저도 심토머인가요?’ p293) 너무나 낯설고도 이질적인 군상들의 삶의 뿌리는 결국 우리의 삶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계속 <믿거나 말거나>, <쇼킹 아시아>, < 세상에 어쩜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며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이런 프로에서나 나올 것이라고 한다. 변종인간들의 삶을 TV프로그램에 빗대어, 세상이란 이토록 다양한 군상들이 어울려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는 듯 싶다.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P351)

라고 하며 형식의 미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 소설은 그 형식에 아주 충실하다. 350여쪽이나 되는 장편소설이지만 대서사로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옴니버스 이야기처럼 몇 개의 에피소드를 병렬식으로 연결하면서 13호 캐비닛 내에 있는 이야기와 화자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아포리즘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암시한다. 수미일관의 형식, 즉 발단 부분에서 루저 실바리스의 이야기나 결말의 주인공 공대리가 아무도 모르는 땅콩 모양의 섬에서 안전가옥에 갇힌 채 이야기를 써 나가는(혹은 보관하는) 모습도 일치한다. 서두와 결말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읽다 보면 계속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좀 식상한 감이 있고, 모기업에서 요구하는 키메라파일에 대해 좀더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짤리는 판국인데...

작가는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P353)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란 종은 심심해서 못 견디는 존재이다. 그래서 주인공 공대리는 (너무 심심해서) 13호의 캐비닛 비밀번호를 칠천팔백육십세번을 돌려 결국 알아맞춘다. 그럼, 작가가 하는 것은, 또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작가는 이 심심한 세상에 캐비닛 속에 있는 비밀을 알려 주는 것!!! 그래서 심심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와 재미를 던져주는 것이리라. 앞으로 이 작가의 캐비닛 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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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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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번역된 윌리엄 골딩 소설이 『파리 대왕』과 이 책, 『첨탑』 뿐이라고 하니 이미 난 두 권을 다 읽은 셈이 된다. 『파리 대왕』은 책을 읽은 후에 영화로도 보았기 때문에 이 책 역시 그런 친근한 맘으로 펼쳤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첫 장부터 만만치 않았다. 강력한 스토리의 흡인력을 보여주었던 『파리 대왕』과 달리 이 책은 주인공 조슬린의 의식의 흐름과 내면 세계에 깔려 있는 욕망을 따라가며 읽다 보니 가독성에 한계를 느꼈다.

 

스토리만 따지자면 이 작품은 아주 간략하다. 영국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성직자가 대성당에 첨탑을 건설하는 과정을 서술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 첨탑을 건설하는 것은 그의 생애를 걸만큼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거기엔 주인공 조슬린의 내적 욕망과 연관되어 있어서, 수시로 그의 의식 세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았다.

 

조슬린은 허술한 기초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사백 피트라는 거대한 높이의 첨탑을 건설하지만 그 첨탑은 무너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희생의 대가인지, 주인공 조슬린의 욕망과는 상관없이 진정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과는 다르게 그 첨탑은 위태롭긴 하여도 건재한다. 바벨탑 역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불경스러운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바벨탑은 무너졌다. 신이 될 수 없는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나 첨탑은 허술한 기초 위에서도 기적처럼 서 있다. 독자는 첨탑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슬린은 계시(혹은 환상)를 받고 첨탑을 건설하지만 결국 그 계시라는 것은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대체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알게 된다. 발단 부분에 보면 조슬린의 등에 통증이 온다. 그것은 첨탑을 지으라는 신의 계시로써 등에 천사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말에 가서는 등과 척추에 결핵이 있다는 질병으로 드러난다. 그의 욕망은 질병조차 신의 계시로 둔갑한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때로 무지한 믿음은 착시현상이나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조슬린이 결국 할 수 있는 말이란 “죄를 짓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이다. 죄를 지으면서까지 그의 욕망은 실현시켜야 한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이름으로...

 

조슬린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직자의 기품을 지닌 인물은 아니다. 인간적인 자신의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오직 신의 대리인으로써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인물로 비쳐진다. 조슬린에게 첨탑이란 욕망의 대체물이다. 그 욕망은 첨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랑을 기만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신이 되고 싶어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나,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첨탑의 조슬린이나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욕망의 포로임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  첨탑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인간의 헛되고 무모한 욕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일까?

 

쉽지 않은 독서였다. 영미 비평가들은 재독 삼독을 해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하였다지만, 역시 어려운 독서일 것 같다. 나중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깊이 음미하며 다시 읽고 싶다. 그 때는 조슬린에 대해 다른 해석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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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야월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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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소설집을 읽는다. 이 책에 실려있는 10편의 중단편 중 몇 편은 이미 <현대문학>이나 <문학사상> 같은 여러 문예지에서 읽었다. 그러나 난 그의 소설을 다시 읽고 또 읽고 했다. 하루에 다 읽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글 읽는 속도가 느려서도 아니고, 바쁨 때문만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하룻밤만에 다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우물처럼 깊은 그의 고독에 전염이라도 된 듯, 가슴 저리게 천천히 읽어야 했다.

 

작가들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문학 세계를 갖고 있지만 김도연의 세계는 여느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변방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천천히 중앙으로 전해져 온다. 아직 많은 독자층을 거느린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의 책을 읽은 독자라면 독특한 그의 문학 세계에 빠져 버릴 것이다. 이 책은 2006년 동인문학상 1차에 후보작으로 선정되었었다. 선정 이유로 이청준씨는"도시의 언어를 가지고 농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했다. 또한 죽은 조상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대목, 동물이나 귀신하고 대화하는 대목 등은'동양적 상상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의 이야기 전통을 드러내 보인, 흥미 있는 글쓰기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흰 등대에 갇히다」작품에선 사향노루를 연구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작품 속에서 사향노루라고 불리는 사내는 십 년 동안 <사향노루, 백년동안의 고독>이란 제목의 글을 ‘창작과 비평’에 기고하였지만 매번 거절당한다. 그가 여기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언급한 것은 스스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보여 주는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소설을 쓰고자하는 욕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청준씨가 지적하였듯, 그의 작품에는 동양적 상상력이라 부를만한 독특한 글쓰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나 고독하다. 도서관 사서가 사향노루와 그냥 노루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묻자 그는 순수소설과 대중소설과의 차이라고 말한다. 경찰과의 대화에서 착한 인상의 경찰은 “사향노루 연구는 배가 고파야 할 수 있죠. 아니면 상처가 깊거나...”라고 한다. 세상이 준 상처를 가슴에 안고, 배가 고플 수밖에 없는 순수 소설을 그는 고집하고 있다. 여기에 그의 고독이 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인간이기에 느껴야 하는 근원적인 고독, 순수 소설을 고집하는 배고픔의 고독뿐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불화에서 오는 고독, 운명에 순응하지 못하는 고독이 더 깊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 고독, 세상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그는 동물들이나 귀신들과 대화를 나눈다. 「도망치다가 멈춰 뒤돌아보는 버릇이 있다」에서 주인공인 총각은 늙은 사냥개와 대화를 한다.

"워리야...... 인간 세상엔 시란 게 있어. 시가 뭐냐고? 고독한 영혼이 부르는 노래지. 고독한 영혼이 뭐냐고? 삶의 희노애락에 화상을 입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만질 수는 없으나 쉽게 벗어나기도 힘든 무형의 꽃 같은 거야. 꽃말이야. 물론 꽃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그 중에서 어느 꽃이 가장 낫다고 고집할 순 없지만. 내가 볼 땐 말이야. 세상의 오물 속에서 피어난 꽃이 최고라고 봐. 오물이란 곧 환멸이야. 환멸이 피운 꽃! 멋지지 않아?"

 

그는 작품 속에서 시를 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시를. 다만 늙은 사냥개에게 그의 시를 읽어 줄 뿐이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지만, 세상은 그의 대화에 귀기울여 주지 않는다.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운명에 반항하지만 무력하게 벽에 부딪칠 뿐이다. 창공의 왕자인 알바트로스가 지상에 유배되어 세인들의 조롱을 받는 것처럼 그는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이 꽃을 피우고 있다. 오물 속에서 피어난 환멸의 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멋진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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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7-08-0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봤습니다. 구입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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