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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문학동네 소설상이 어느새 12회 째를 맞이하여 모두 여덟 작품이 나왔다. 여덟 작품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읽은 것 중에서 제 1회 『새의 선물』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다.(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제 10회의 『고래』작품도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데는 인정하겠지만 치밀한 플롯이 아쉬웠고, 11회의『수상한 식모들』에서는 발상은 신선하고 유쾌했지만 너무 가볍고,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12회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심사위원들의 평을 듣고 몹시 기대했다. ‘이제까지의 소설세계를 폭파시킬 매머드급 이야기’라던가,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라는 평은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드디어 책이 왔다. 표지보고, 뒷표지의 심사평을 읽고, 소제목을 훑어보고, 수상소감까지 읽었어도 쉽게 책을 펼칠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나 최근에 산 책이 쌓여 있어서 만은 아니다. 내 취향이 그렇다. 남들이 너무 좋다고 하면 기대감과 함께 그렇지 못할 경우의 실망감이 두려워 쉽게 펴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너무 맛있는 것은 나중에 아껴 먹는 어린 아이의 심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음미해 보고 싶은 마음...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다.
표지 뒷면의 ‘화려한 이야기들의 신천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최근에 읽은 장편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능가하는 판타지급 이야기는 한번 책을 붙들면 결국 다른 것은 하나도 할 수 없을 만큼 뒷장까지 오고야 만다. 소설의 기능 중에 하나인 재미, 즐거움을 이야기한다면 이 소설은 거기에는 충분히 합격점이다. 고양이가 간절히 되고 싶은 130킬로그램의 거구의 사나이나,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한 몸에 두 성이 존재하여 자가수정을 하는 사람, 입속에 도마뱀을 키우다 결국 실어증이 되어 사는 여자나, 심토머, 토포러, 도플갱어, 샴쌍둥이 등 상상하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앞으로 소설은 어디까지 새로워질 수 있을까? 375개의 파일 중에서 이 곳에 다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이야기는 개연성 있는 허구가 아닌 환상에 닿아 있지만, 내용은 삶의 진실에 발 딛고 있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많은 변종인간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나도 심토머이지 않는가 자문해 본다.(‘저도 심토머인가요?’ p293) 너무나 낯설고도 이질적인 군상들의 삶의 뿌리는 결국 우리의 삶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계속 <믿거나 말거나>, <쇼킹 아시아>, < 세상에 어쩜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며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이런 프로에서나 나올 것이라고 한다. 변종인간들의 삶을 TV프로그램에 빗대어, 세상이란 이토록 다양한 군상들이 어울려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는 듯 싶다.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P351)
라고 하며 형식의 미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 소설은 그 형식에 아주 충실하다. 350여쪽이나 되는 장편소설이지만 대서사로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옴니버스 이야기처럼 몇 개의 에피소드를 병렬식으로 연결하면서 13호 캐비닛 내에 있는 이야기와 화자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아포리즘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암시한다. 수미일관의 형식, 즉 발단 부분에서 루저 실바리스의 이야기나 결말의 주인공 공대리가 아무도 모르는 땅콩 모양의 섬에서 안전가옥에 갇힌 채 이야기를 써 나가는(혹은 보관하는) 모습도 일치한다. 서두와 결말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읽다 보면 계속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좀 식상한 감이 있고, 모기업에서 요구하는 키메라파일에 대해 좀더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짤리는 판국인데...
작가는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P353)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란 종은 심심해서 못 견디는 존재이다. 그래서 주인공 공대리는 (너무 심심해서) 13호의 캐비닛 비밀번호를 칠천팔백육십세번을 돌려 결국 알아맞춘다. 그럼, 작가가 하는 것은, 또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작가는 이 심심한 세상에 캐비닛 속에 있는 비밀을 알려 주는 것!!! 그래서 심심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와 재미를 던져주는 것이리라. 앞으로 이 작가의 캐비닛 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