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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달 여 전, 모일간지의 ‘문화비전’란에 소설가 백가흠이 쓴 글을 읽었다. 제목은 ‘안나푸르나가 가르쳐 준 것’. 백가흠의 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기에 반가운 맘으로 읽다가 난 죽비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백가흠의 글보다도 마지막 부분에 박범신이 한 말이 나를 더 흔들었다. “나는 선생이 어느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기자가 진짜 촐라체에는 오를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박선생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에겐 소설이 촐라체야. 목숨 걸고 올라가는 거지. 설마 소설 쓰면서 목숨까지 걸까 싶겠지만 나는 걸어.’ ”
이 글을 읽으면서 난 그냥 울고 싶어졌다. 그리곤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걸어. 나는 걸어. 나는 걸어... 나는 소설에 목숨을 걸어..........’
대가인 그 분께서, 수없이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낸 작가인 그 분께서 여전히 목숨을 걸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이었다. 일반인들은 설마 소설 쓰면서 목숨까지 걸까 생각하겠지만 자신은 목숨까지 건다는 그의 말 때문에 난 당장 가까운 동네 서점으로 달려가 이 책을 사왔다. 소설이 곧 촐라체인 ‘그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목숨 걸고 한 일이 있었던가? 자문해 본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재능도 없고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추진을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싶었다. 그리고 격려하고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다. 목숨까지 건다면 할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걸면서...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읽으면서 난 처음으로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작가는 목숨을 걸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촐라체(cholatse).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m 봉우리이다. 전 세계 젊은 클리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인 이 촐라체를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 상민과 영교가 오른다. 그리고 정선배라고 부르는 화자인 '나'가 베이스캠프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서술해 간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뺀 본문은 상민과 영교, 캠프지기(화자)가 1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그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셋은 모두 삶의 깊은 그늘을 지니고 있다. 그 음영은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벼랑끝으로 몰게 한다. 자의보다는 어쩔 수 없이 촐라체로 끌려온 것일 수도 있다. 촐라체를 넘을 때, 그들은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촐라체를 넘지 못할 땐 결국 세상에서도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촐라체는 단순히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이들에겐 실존의 문제였고 삶과 죽음, 생존의 문제였다.
박상민과 하영교,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를 부정하고 거부하면서도 한 핏줄이라는 인연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작가는 그 애증의 관계를 한 자락 한 자락씩 풀어내고 있다. 화자인 나는 중학교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반장인 박상민과 인연을 맺고 있다. 우연히 네팔에서 만난 그들은 거대한 카르마(karma-업, 숙명)에 의해 생사의 경계를 같이 넘나들게 된다.
박상민은 김형주 선배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등반했다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로프를 끊고 죽은 김선배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삶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김형주 선배이다. 상민은 그를 넘지 못하는 삶에서 죽음을 견디며 살았다. 그 죽음같은 삶을 이기기 위해 촐라체로 왔다. 영교는 아버지의 빚을 재촉하는 아버지 후배인 나팔귀 아저씨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듯 촐라체로 왔으며 화자인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때 한 여자가 아들이라며 데리고 온 후 자신의 꿈을 버리고 그 아들을 위해 살았지만 그 아들은 17세 때 절로 들어간다. ‘그리워서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모두 삶에서 패배한 사람들이다. 그 패배는 결국 촐라체로 오게끔 만들었다. 아니, 촐라체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촐라체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곳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곳, 그곳에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느 쪽으로 흡수될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 내야 한다. 그 시간을 견디어서 살아 나온 자만이 촐라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들에게서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았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열정을 보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혹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아직 세상을, 생명을 버릴 수 없었다. 죽음은 끈질기게 그들을 유혹했다. 모진 추위와 굶주림, 갈증, 단말마적인 신체적 고통... 발목이 부러져 건들건들 흔들리고 갈비뼈는 몇 대가 부러져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며 손과 발은 동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들은 끝내 촐라체를 이기고 돌아왔다. 비록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말미암아 손가락을 절단하고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새롭게 시작된 그들의 삶은 이젠 절름발이 삶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우군인 형제를 얻었고, 무엇보다 죽음을 이기고 돌아왔다.
이 책을 덮으며 나의 촐라체는 무엇일까? 나에게 묻는다. 한동안 염세주의,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나에게 이 책 『촐라체』는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미칠 것 같은 날을 보냈다. 오래된 지병이 재발되어 한동안 죽을 것처럼 앓으면서 난 삶이라는 늪에서 헤매었다. 올해 새롭게 계획하고 추진했던 일들은 지지부진했으며 그와 함께 의욕도 잃었다. 벼랑 끝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미친다는 것은 밑을 친다는 말과 같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밑이란 심연의 끝, 세상의 끝, 삶의 끝이 아니겠는가? 그 끝을 본 사람만이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아직 미치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직 세상의 끝은 아니었다. 난 촐라체 근처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밑을 보고 온 상민과 영교도 살아 돌아왔다. 그럼 난 아직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세상의 끝, 벼랑 끝을 보았다 할지라도...
작가는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천지간에 홀로 있다고 느낄 때, 세상이 사막처럼 생각될 때, 그리하여 살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실존의 빙벽 아래로 투신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바로 소설 <촐라체>의 주인공인 ‘상민’과 ‘영교’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p10~11)라고 썼다. 그렇다. 지금 난 상민과 영교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작가에게도...
삶의 크레바스(빙하 위의 균열. 빙하의 경사가 급할수록 발달하는데 깊이가 수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에 갇혀서 죽음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 순간 순간의 환락과 안일에 빠져 삶을 탕진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하고 기동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깨닫게 해 준다. 전인미답의 삶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