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 근대의 절정,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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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는 역사 속에서 몇 명의 인물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근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증기기관과 기계를 통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의 시작을 ‘제임스 와트’를 통해 이야기하고, 이렇게 축적된 ‘부富’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대부분의 민중들을 ‘해적’으로 상징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등장은 ‘표트르 대제’가, 가장 중요한 프랑스대혁명은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이 대표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그랬듯이, 사람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고, 심지어 재미있다.


  이 책의 속도감은 상당하다. 물론 재미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수박 겉핥기식으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간 어려운 세계사 책에 실망했던 사람들이 찾아도 좋을 ‘대체재’인 동시에 아는 것은 많아도 하나로 꿰어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보완재’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풍성한 그림 자료와 왕가 계보도는 시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그림에는 후한 반면에 지도를 첨부하는 데는 다소 인색해서, 일일이 구글맵스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재미있게 쓰려다보니 ‘위악스러운’ 부분도 종종 눈에 띈다. 사실 이 점이 가장 아쉽다. 지은이는 이 책 34쪽에 사람을 오래 괴롭히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면서 고문 방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아쉽다 못해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저자후기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선정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했는데 쉽게 쓴다는 것과 저질스럽게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러고 보니 ‘쉽게 풀어 쓴다’와 ‘선정적으로 쓴다’도 전혀 다른 말이다. 이 점은 지은이가 다시 한 번 되짚어 봤으면 한다.  


증기기관이 발전해온 역사를 보다 보면, 마치 이것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되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증기기관이 나오고 나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여전히 수력과 풍력이 동력원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특히 물레방아가 증기기관보다 더 성능이 우수했다. 증기기관이 물레방아를 완전히 뛰어넘은 시점은 19세기 중반이다. 이때까지는 역설적이게도 물레방아를 더 잘 이용하기 위해 증기기관을 동원했다. _ 268쪽

  끝으로, 증기기관의 발명이 바로 모든 동력원을 대체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물레방아를 더 잘 돌리기 위해 증기기관이 이용되었다는 부분은 우습기도 하면서 동시에 생각할 거리도 던져줬다. 거칠지만 역시, 역사는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생각 말이다. 모순덩어리와 폭군도 역사에서 나름의 역할이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어 판사를 그만두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을 단두대로 보냈던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을 계승한다면서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처럼 말이다. 횡보하면서 역사는 발전한다.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강렬한 믿음, 타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용,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상당 부분의 포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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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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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연의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을 읽었을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느꼈다. 허탈과 분노 사이의 어떤 기분. 아무리 출판의 장벽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팬카페에 올릴 법한 글을 이렇게 찍어내는 것은 ‘팬’이 아닌 다수의 독자들을 농락하는 일 아닐까? ‘애플팬슬’의 유용함을 자랑하고, 이십여 쪽에 걸쳐 그림을 그리고, 오지선다형 문제를 내서 작가의 위트를 보여주는 것이 과연 ‘창작의 비밀’을 듣고 싶어 모인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위일까? 창의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다소 황당한 구성이었다. 이 책의 절반은 일반 독자를 위해 쓰였지만, 나머지는 사생팬을 위한 연애편지와 같았다. 작가의 팬이 아닌 이상 이 책을 소장해야할 가치까지 있을까?


  물론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고 인내심을 가지고 읽다보면 밑줄 긋고 싶은 부분들도 많다. 특히, 부담을 내려놓고 쉽게 써보라는 조언은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굉장히 유용한 처방이다. 첫 문장을 쓰지 못해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다가 포기하고 마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대신에 지은이는 문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촌철살인의 문장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단과 문단 사이의 리듬, 이야기의 흐름과 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장을 완성하는 데 힘을 빼게 되면 글을 시작하기조차 어려워지지만, 문단으로 관점을 돌리면 생각나는 대로 일단 쓰게 된다. 그리고 문단 간의 호응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니 글의 전체적인 완성도 또한 높아질 수 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대목은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한 때 1년에 100권 읽기를 목표로 짧고, 쉽게 읽히는 책들을 중심으로 독서를 했었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속도전으로 읽다보니 기억에 남지 않았고, 글로 정리해두지 않아 읽은 사실조차 흐릿해졌다. 물론 100권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해도 없었지만. 사람을 한 번 만나서 알 수 없듯 책도 그런 모양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좋아하는 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직 완전히 수긍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치 매년 동심원을 넓혀가는 나이테처럼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행위일 수도 있겠다.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답니다. 나는 새 책을 적게 읽고,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건 더 많이 하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군요. _ 65쪽 (『보르헤스의 말』에서 재인용)


  지은이는 ‘마지막 대목을 ‘교훈’이나 ‘반성’으로 끝내는 글도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결국은 또 그렇게 끝낸 것 아닌가 싶다. 중요한 것은 이후에 다시 한 번 그 ‘반성’과 ‘느낌’이 어떤 식으로 나를 변화시켰는지 점검해보는 것 아닐까 싶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반복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해본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하다보면 특별해진다.’ 그것이 정답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 혼자 하긴 미안해서(혹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 나 혼자 하기엔 억울해서) 더 많은 사람이 창작의 마술에 빠져들기를 바라고 있다. 독일의 교육학자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는 “창의성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우리를 벽에 부딪치게 만든다”고 했다.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만들려고 하는 순간, 스스로 벽을 세우는 셈이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 보면 특별해진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특별하고, 시간과 함께 만든 창작물은 모두 특별하다. _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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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5 - 로마 세계의 종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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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다 읽었다. 2006년 겨울 1권을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13년 만이다. 15권에 이르는 대작을 10년 넘게 노력한 끝에 완결을 봤다고 자랑하려면 자랑할 수 있겠지만, 칭찬받을 대상은 물론 저자의 십 수 년에 걸친 노력일 것이다. 한 주제에 대해 틀어쥔 채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결을 짓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특히, 로마사의 특정 시기가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다룬 개설서 중에 ‘로마인 이야기’만한 책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노력이 더욱 경이롭다. 가끔 내 시야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금 찾아 읽게 했던 힘은 온전히 시오노 나나미가 이 책에 바친 엄청난 노력과 수더분한 필력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로마는 역사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서양에서는 로마를 그리스와 함께 자기네들 역사의 시작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강대국의 조건을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도 로마는 반드시 다루는 소재다. 그 광대한 영토 때문이 아니라 서양인들의 삶에 자리매김한 그 문화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개 도시국가일 뿐이던 로마는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을까. 물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비결은 ‘실용성’과 ‘개방성’이다. 


  먼저, ‘실용성’은 로마사람들의 큰 특징이다. 이들은 법률, 수도, 도로 등 인프라 건설을 중요하게 여겼다. 로마인들이 거쳐 간 곳은 몇 백 년 동안 뒤틀림이 없는 도로가 깔렸고, 수원이 아무리 멀더라도 도시까지 수돗물을 끌어왔다. 또 법률을 통해 예측 가능한 통치를 하려고 했고, 공직의 재직기간을 정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합리성을 갖췄다. 이 모든 것이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특징이다. 


  ‘개방성’은 더욱 중요한 특징이다. 로마인은 피지배자를 로마의 지배계급으로 유인했다. 최초에 경쟁했던 에트루리아의 지배층도 로마의 귀족으로 편입했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편입 후에도 정복지의 지배층을 위해서 원로원의 의석을 내주었다. 또한, 군복무를 마치면 로마시민권을 부여했다. 현대에 ‘아메리칸 드림’으로 통칭되는 계층 간 활발한 이동성은 로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로마가 길을 열어주고, 그 길을 통해 인재가 알아서 모였기 때문에 로마는 강대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너무 커진 제국은 관리가 힘들어졌고, 훈족에 쫓긴 게르만 족의 남하, 지도층의 부패, 내부의 혼란 등으로 로마는 조용히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더불어 로마의 다신교적인 특징을 중요한 활력요소로 본다. 그래서 15권인 ‘로마세계의 종언’의 바로 앞인 14권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부제를 달았다. 다신교의 역동성과 관용에 반하는 일신교 그리스도교가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로마세계는 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또한, 책을 읽다보면 로마 제국 내의 피지배 민족들은 로마제국이 주는 편의를 기대하고, 기꺼이 제국에 참여하려고 한 것처럼 묘사한다. 이런 부분들은 시오노 나나미의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사관이 개입된 것이라고 본다. 마치 오만 가지 신을 다 섬기는 ‘신도 국가’ 일본을 ‘다신교 국가’ 로마와 동일시하고 ‘대동아 공영권’을 꿈꿨던 일본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아시아인들도 자율적으로 ‘대동아 공영권’에 참여하고 싶어 했을까? 수많은 이민족들도 로마제국에 편입되기만을 원했을까 궁금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흡입력이 상당한 책이고, 순식간에 몰입하게 하는 책이다. 나는 이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보려 한다. 그 후에는 역시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도 읽는 것이 목표다. 지금 당장은 긴 책을 결국 읽어냈다는 뿌듯함과 로마 시대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탐구욕이 샘솟는다. 물론 이번에도 몇 년이 걸릴지 예측할 수는 없다. 내 능력이야 타고난 한계가 있겠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서로마 제국 최후의 장군 ‘스틸리코’를 평하면서 한 말처럼 사람의 매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자세’, ‘태도’다. 성실하고 탐구욕 넘치며, 진지한 자세로 다시 한 번 로마세계로 빠져들어 보려고 한다.


자질이 대등한 두 사람도 ‘스타일’에는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인간의 차이는 자질보다 스타일, 즉 ‘자세’에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세’야말로 그 사람의 매력이 되는 게 아닐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매력이 짧지만 충일했던 그의 생활방식에 있었던 것처럼. _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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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9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전 절반 읽다가 못 읽겠더군요 카이사르 단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건 못 먹겠더라는.앞으로 좋은 소통이 있으면 합니다 ^^

송도둘리 2018-12-30 10:10   좋아요 2 | URL
저도 카이사르 이후 부터는 동력이 떨어져서 십년 넘게 읽었습니다. ^^ 종종 들러 좋은 경험 많이 얻어가겠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9-06-25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중단한 시리즌데 로마 역사이야기 다시 도전해보고 싶네요. <로마제국 쇠망사>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송도둘리 2019-06-25 16:16   좋아요 1 | URL
응원합니다. 저도 <로마제국 쇠망사>는 큰맘먹고 샀는데 아직 도전을 못하고 있습니다.ㅎㅎ
 
생존의 조건 - 절망을 이기는 철학 - 제자백가
이주희 지음, EBS MEDIA / Mid(엠아이디)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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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에서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죽는다. 또,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긴다. 춘추전국시대는 시대의 엄혹함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생각들이 제기되고, 또 실험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그 중 대표적인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강자의 조건‘처럼 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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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 식사 방식으로 본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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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먹느라 바쁘지만, 가끔 ‘우리나라는 왜 일본이나 중국과 다르게 수저를 모두 이용할까?’ 라든지 ‘공깃밥은 왜 다 스텐 그릇에 담겨 나올까?’와 같은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지은이가 책에서 답하고자 한 질문들은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했을 법한 주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호기심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지은이는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충분히 확보했다. 공을 많이 들인 책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읽는 중에는 생각보다 재미가 덜했고, 읽고 나서는 허전함을 느꼈다.

왜 그럴까. 일단 이야기가 ‘먹는 도구와 방식’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음식과 조리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어 밥만 있고 반찬이 빠진 느낌이 든다. 나아가 지은이가 어렵게 도달한 결론이 생각보다 새롭지 않고, 명확하지도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은이의 말대로 양반다리로 앉아 소반을 앞에 두고 식사하는 습관은 중국 성현들의 말과 행동을 금과옥조로 생각했던 성리학자들의 소신 때문일까? 아니면 온돌이라는 난방 시스템 때문에 굳이 의자가 필요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실질은 온돌 때문이지만, 형식상 성현들도 의자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포장한 걸까. 여전히 명료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문제들에 의문을 가지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출발했다.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지 않으면,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트리클리니움’에 엎드려서 식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 식후에 커피를 마시는 문화를 오래 전부터 숭늉을 마셨던 습관에서 찾는 것도 재미있다.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가서 신문물을 접하고 직접 조선 땅에 들여오기도 했는데, 왜 청나라의 의자는 수용하지 않았을까? 앞에서 소개한 이황의 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황은 의자에 앉는 자세를 ‘의좌(椅座)’라고 하면서, 이 습관이 ‘중고(中古)’에 겨우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중고’는 오래지 않은 옛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이전에는 모두 땅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예(禮)를 행했다고 적었다. 그가 말한 ‘중고’라는 말 속에는 공자나 맹자, 심지어 주자도 의자에 앉지 않고 ‘위좌’나 ‘반좌’를 했을 것이라는 강한 추측의 뜻이 담겨 있다. 성현의 말과 행동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던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좌’는 결코 예에 어울리는 자세가 아니었다. 공자도 맹자도 ‘의좌’의 앉음새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는 자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_ 63쪽


  끝으로, 지은이의 말대로 식당에서 흔히 쓰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멜라민 수지로 만든 그릇들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모두 다 지켜가야 할 전통은 아닐뿐더러, 그 기원조차도 산업화 시대에 편리와 효율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더 바꾸는 것이 맞다. 음식은 맛으로도 먹지만, 눈으로도 먹는다. 식당마다 특색 있는 식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식당에서는 무신경하게 스텐과 플라스틱을 쓰고 있지만, 이미 젊은 층들은 일본풍의 아기자기한 식기들을 사서 식탁을 꾸미고 있다. 이참에 식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경제성과 효율성의 덫을 넘어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21세기 초입의 오늘날, 한식음식점의 식탁 위에는 산업화 이후에 개발된 스테인리스 스틸·멜라민 수지·크리스탈(Crystal)같은 식기와 목기·자기·옹기·놋그릇 같은 산업화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식기가 마구 뒤섞여 있다. 과연 이러한 여러 종류의 식기가 음식의 형태와 식사 방식에 알맞게 사용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나 스텐 밥공기, 스텐 수저, 그리고 멜라민 수지 식기로 구성된 한국음식점의 식기와 식사도구는 미학적 측면에서 개선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 _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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