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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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정조와 그의 시대에 관한 드라마와 영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07년 한국은 그야말로 ‘정조의 시대’다. 그는 이제 대왕으로 불린다. 우리가 조선조에서 대왕으로 일컫는 왕은 세종과 정조 둘 뿐이다. 아마도 그의 젊음과 개혁 그리고 그 치열함에 반비례했던 짧은 생애가 그를 세종만큼 유명하게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쓴 『조선 왕 독살사건』이란 책을 본 이후 나는 정조하면 울부짖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위로 사도세자가 겹친다. 정조가 취임일성으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쳤듯이 사도세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정조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조를 다른 방향에서 조명하는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당시를 조명한 거의 유일한 책이다.

  뒤주에 갇혀 죽은 세자. 아마도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조선시대 왕가의 최대 비극인 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이를 사도세자의 정신병과 영조와의 불화 때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저자는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당시 노론과 소론 양당파간의 이해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비극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파간의 정쟁이 여러 차례 환국을 거쳐 ‘너죽고 나사는’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당대에 와서는 왕과 세자까지도 자신의 당파 성향이냐, 아니냐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사도세자도 노론이 주도한 택군작업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또한, 세자는 정신병이나 지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여러 일화를 바탕으로 세자는 총명하고 담대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역설한다.

  아무리 소론 성향의 세자를 노론이 해하려고 했어도 아버지인 영조가 지켜주었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늦게 얻은 아들을 그토록 귀여워했던 영조. 어떻게 친아들을 뒤주에 가둬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것일까. 영조는 세자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세자의 관서행과 나경언의 고변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그 오래전부터 영조는 세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노론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세자의 행동이 영조에게는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 외아들이자 친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는 ‘미물도 불쌍히 여겨 불나방이 등잔으로 달려들면 손을 휘저어 내쫓고 개미도 밟지 않고 건너서 갈’만큼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만큼은 그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참…권력이란 무엇인지. 저자의 말대로 ‘권력은 눈물과 인정을 넘는’ 것 인가보다. 비정한 아버지 영조 말고도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조가 떠오른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나라에서도 권력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을 죽이는 사례가 많을 것이다. ‘권력이 무엇이길래?’ 한숨과 함께 의문이 든다.

  저자는 사도세자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과 과연 동일인물인가 의심이 들만큼 다르다. 저자는 사도세자가 소론 중심으로 정계개편을 이루고 왕권 강화를 이루었을 것이며 북벌까지도 꿈꿨다고 말한다. 북벌이라는 말로 민족감정을 자극, 사도세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끌어올리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도 든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현체제 유지를 간절히 바랬던 노론 사대부들도 싫지만, 사도세자가 이루려했던 왕권강화와 북벌도 과연 역사의 올바른 추세였을까? 반면에 사도세자가 집권해서 왕권강화를 이루었다면 나중에 정조가 집권하여 개혁 드라이브를 펼치기 훨씬 쉬웠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든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소론이나 노론이나 사농공상의 신분제 안에서 그놈이 그놈이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사도세자와 정조가 꿈꾸던 세상은 더 나은 세상은 아니었을까? 시대적 한계 안에서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이 곧 역사의 진보이니까 말이다. 정조 사후 벌어진 암담한 조선 역사 때문에 그들이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꿈이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쉬운 점은 등장하는 전문용어나 단어 중에 낯선 단어가 꽤 많았던 것이다. 이 책의 의도가 그동안의 역사 연구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고자 한 것이었다면 추가적인 설명이나 주석을 달았어야 했지 않을까. 흥미로운 소재를 쉽게 풀어써 역사에 쉽게 다가가게 한 미덕은 인정해야겠지만, 이런 불친절함이 다소 아쉬웠다. 최근에 회자된 ‘불고기 사주고 콜라 안 사줘서’ 독자들의 마음 상하게 만드는 일은 아닐지. - 내가 읽은 책이 2003년에 발간된 구판이라 휴머니스트에서 발간한 최근판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 사족으로,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다른 책인 『조선 왕 독살사건』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조선왕 독설사건』을 먼저 읽은 후에는 다소 겹치는 내용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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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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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신문에서 롬멜에 관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는 롬멜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누군지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떨게 만든 뛰어난 전략가에다 ‘대치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하고 ‘전투가 끝나면 피아 구별 없이 부상자 구출에 노력’한 영웅이라는 기사를 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한술 더 떠서 적장인 처칠마저도 ‘전쟁터에서는 재앙이지만 군인으로서는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했단다. 없던 관심도 생기고 잠자고 있던 관심도 깨우는 기사에 그길로 도서관으로 가서 롬멜에 대한 책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발견한 롬멜의 모습은 내 상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원칙적이고 도덕적이지만 사회적 불의를 제어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전투에서는 대담하지만 윗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목말라하는, 성실하고 착할 뿐인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명성을 드높였던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짧은 승리 후에 긴 후퇴와 정체가 있을 뿐이었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직장 상사와의 불화에 괴로워하는 가장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하지만 롬멜은 그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도 극진하게 가족을 챙긴다.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에도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장에서 벗어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상륙작전이 벌어지리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영웅이라기 보다는 그저 성실하고 가정적인 가장의 모습만 어른거린다.

  더 나아가 히틀러와의 관계에서도 분명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종종 ‘그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히틀러를 비롯한 수뇌부를 비판하면서도 히틀러의 위로와 격려 한 마디에 ‘총통의 나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며 안도하는 모습은 내가 알던 롬멜과 동명이인은 아닐까 의심케 한다. 저자는 롬멜이 히틀러가 자행한 전쟁 범죄에 대해 몰랐고 비윤리적 살상에 직접 앞장서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또, 롬멜이 전쟁의 전개양상과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목도하고 히틀러에 반대하고 연합군과 단독강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롬멜은 죽는 순간까지 ‘나는 총통을 사랑하였고 아직까지도 그를 사랑한다네’라고 고백한다. 이렇듯 롬멜은 끝까지 그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한다. 저자의 말대로 그의 삶은 너무도 ‘모순적인 삶’인 듯 보인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보고 싶었던 영웅은 책 속에 없었고 애초에 그에 대해 가졌던 존경과 호감마저도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영웅’ 롬멜을 잃은 대신 ‘인간’ 롬멜을 찾았다.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지만 조국을 위해 이겨야 하는 평범한 군인 그리고 전쟁 속에서 번뇌하고 고통을 겪는 한 인간이 서 있었다. 어쩌면 저자가 말했듯이 ‘롬멜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볼 수 있는 영사막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영국과 독일에서 각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웅이 되어야만 했던 한 인간, 롬멜. 사악한 전쟁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그의 타고난 순박함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다. 하지만 그의 순박함이 그의 체내에서만 빛나지 않고, 전쟁과 끔찍한 범죄 앞에서 더 큰 빛을 발휘했다면 역사는 분명 바뀌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앞으로 더 오랜 시간 롬멜은 ‘진정한 영웅’과 ‘착한 군인’ 사이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 같다.

  낯선 독일 이름들의 등장이 한순간 머리를 멍하게 하기도 하지만 풍부한 사진으로 얻는 즐거움도 크다. 인간 롬멜을 찾기 위한 최고의 책은 아니지만 저자의 성실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책이다.

(서두에 언급한 내용은 <매일경제> 허연 기자의 기사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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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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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했던 것보다 큰 수확을 걷은 느낌이다.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라는 소재가 흥미를 끌어서 읽게 됐는데, 읽고나니 ‘독살설’을 통해 조선의 중․후반 역사를 다 훑은 것 같아서 드는 생각이다. ‘~사건’이라는 대중역사서의 범람 속에서 이 책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히려 ‘독살’이라는 관심을 끄는 코드로 역사를 쉽게 설명한 지은이의 솜씨가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조선은 이미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해서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표출된 모순을 시정하고, 모종의 개혁을 꾀하지 않는 이상 회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현 체제에서의 변화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의 결과가 ‘독살’로 이어진 것이었다. 물론, 여기 제시된 모든 왕들이 ‘독살로 제거’되었는지 ‘불운으로 요절’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공식적인 기록이라는 것이 승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은폐될 가능성이 충분하고, 당시 정황상 독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저자 또한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강하게 부정하고, 일제의 고종 독살설은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지만 다른 경우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 상황적 배경을 들추며 강력한 심증을 드러낼 뿐이다.

  가장 안타까운 독살의 대상은 소현세자와 정조였다. 중화사상과 주자학의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당시 사대부들과 달리 두 사람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이 두 인물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가 된다. 그 큰 기대만큼 그들의 이른 죽음에 아쉬움도 크다. 이 두 사람이 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들이 가졌던 개방적인 사고와 개혁적 마인드 때문에 ‘독살’이라는 의혹과 자꾸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8명의 독살의혹 대상자 대부분이 인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핏줄만도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효종, 그리고 인조의 손자이자 효종의 아들인 현종 세 명이다. 사실 소현세자와 원손 석철까지 죽여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자신의 권력 때문에 인조 이후 조선 역사는 변화없이 정체되고 서인들의 천하가 되고만다. 무리하게 즉위시킨 효종과 현종 역시 ‘적통’ 논란 속에서 제 명을 다하지 못한다. 인조의 죽음과 맞바꾼 기득권 사대부층의 발호는 경종과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폐단을 낳는다. 한 사람의 권력욕이 이후 100년의 역사를 더 나아가 한 왕조의 역사를 뒤바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왕 한 사람의 죽음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있느냐, 역사의 주인은 왕조의 왕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이 왕조국가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왕 한 사람이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수많은 민중이 개혁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시대적 한계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 안에서 ‘개혁’을 이루려했던 왕 또는 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설한다. 저자 또한 ‘독살설에 대한 연구가 조선의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이며, ‘조선에 대한 연구는 현대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라고 말하며 역사연구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일면 타당성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은 학문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왕’의 독살이 ‘국민’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에서)독살로 바뀌었을 뿐이지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대계가 아닌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정치가들에게 독살되지 않기 위해서 국민 각자가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조선 왕 독살사건’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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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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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취향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책 추천의 효용에 대해서 의심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추천이 책을 읽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도 한 아버님께서 책을 반납하시면서 넌지시 ‘이 책도 굉장히 좋은 책인데’라고 한 마디 던지신 것이 책을 읽은 이유가 되었다. 곳곳에 그어진 밑줄과 한 귀퉁이가 접혀진 책장이 마음을 심난하게 하였지만, 읽다보니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다. 책 앞날개에 적힌 2005년 동아일보 선정 서울대학교 3대 명강의 중 하나라는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재미있는 강의는 학점이 짜다’는 프레임은, 책을 읽는 내내 저자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프레임에 의해 해석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지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사례들은 이미 널려있지 않은가? 우리 주변에 산재한 ‘콩깍지 커플’만 봐도 그렇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의 프레임에 의해서 해석된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내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책에 수록된 ‘감각의 불확실성’에 관한 작은 실험들을 보면 깨지게 되어있다. 이 책의 새로움은 프레임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지혜롭고 더 나은 삶을 열 수 있다는 발견에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심리학과 자기계발의 영역을 넘나들고, 이야기도 가벼움과 무거움의 수위를 오르내린다. 하지만, 저자는 심리학 실험과 사례를 통해 시종일관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세상은 ‘프레임’에 의해서 해석되고, 내 프레임이 왜곡되어, 어딘가 찌그러지고 굴절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해도 그 불편함을 느끼는 일도 쉽지 않고, 그 프레임을 다른 프레임으로 바꾸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에 그 점을 알고 노력한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습관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도스토예프스키도 말했다지 않은가. 오늘, 내일 ‘최상의 프레임’을 가지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할 일이다. 아, 그러고보니 재미있고 유익한 책을 읽고도 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흡사 재미있는 강의를 듣고도 학점을 잘 못받은 경험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프레임도 부단한 노력으로 '재미있는 강의는 학점도 달디 달다.'는 프레임으로 바뀔 수 있을까? 두고 봐야겠다.


  사족으로, 이런 의문도 든다. 어차피 우리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있다면, 그리고 각각의 프레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면 과연 진리 또는 공통된 사실은 존재하는가? 각각의 프레임으로 인한 차이는 합치될 여지가 없는가? 라는. 프레임이라는 소재는 여러 모습으로 변형될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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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일반판 (2Disc) - 할인행사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에이치비엔터테인먼트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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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성경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성경에 따르면 인간들이 한통속이 되어 신의 영역을 넘보려고 바벨탑을 세우자 신이 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간들의 언어를 다르게 만들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사실을 모티브로 출발한다. 영화는 다소 길고, 여러 이야기들이 산만하게 펼쳐진다는 느낌을 줘서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도 준다. 하지만 끝까지 보다보면 지루하지 않거니와 각각의 이야기가 맞물려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는 각자 다른 곳에서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처럼 제각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하나로 맞물린다. 때문에, 일본과 미국, 모로코에서 벌어지는 그 다양성이 일반성이 되고, 하나의 사실이 다양하게 변형된다. 사실 영화에서 보이는 모든 비극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 오해는 서로에 대한 이유없는 혐오와 불신에서 비롯되고, 그 불신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서 생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서 벌어진 멕시코 출신 미이민자에 대한 과잉대응, 모로코의 한 작은 마을에서 보이는 리처드(브레드 피트)와 미국인 여행객들의 태도. 감독은 타문화와 타민족에 대한 경멸과 혐오가 소통의 부재 속에서 증폭되고 있음을 갈파한다.

  그렇다면, 벙어리인 치에코는 어떤 이유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가. 벙어리인 그녀는 벙어리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다. 이 상황은 언어가 다른 민족들끼리의 관계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벙어리에 대한 편견 역시 타문화와 타민족에 대한 편견과 다를바 없다. 오히려 치에코의 이야기는 이 문제가 타민족끼리의 문제가 아닌 인간 서로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대화가 서로간의 이유없는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알 수 있다. 친구들과 친해진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친해지기 전에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해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난 네가 깡패인 줄 알았어. 맨날 인상쓰고 말없이 교실 뒷자리에 앉아있길래.' 이런 말에 대해 친구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니야. 난 눈이 나빠서 눈을 찌푸리지 않고는 칠판이 잘 보이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먼저 말 걸만큼 숫기가 있지도 않고.'라고 말이다. 개인과 개인간의 문제도 이런데,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좀 더 규모와 형태가 달라질 뿐이지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는 진정성만 가지고 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오해와 불신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

  문제는 '일부러' 오해와 불신을 강화할 경우이다. 현재의 패권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적을 만들고 증오를 키울 경우에는 방법이 없다. 사실, 어떤 집단 내부의 단결을 도모할 때는 집단 외부의 가상의 적을 만드는 것만큼 쉬운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 영화를 보면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자는 감독의 생각이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였다.

  며칠 전에도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서 폴란드 이민자 한 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백인의 백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이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 오늘도 곳곳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라'는 광고가 나부끼고, 수많은 동남아인들이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고 고되게 일하고 있다.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만 봐도 우리들의 외국인에 대한 인식이 정도를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더 섹시하고 매력적인 '백인' 미녀들에 대한 신변잡기에 집중하고, 그들이 당한 억울한 사연이나 편견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답하지 않는다. 남희석이 대신해서 사과하면 끝인가? 세계는 하나라고 이야기하고, 타문화와 민족에 대한 테러와 공격이 난무하고, 수많은 외국인과 부딪히며 살아야 할 지금. 이 영화는 다소 이상적임에도, 정말 필요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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