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최근 신문에서 롬멜에 관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는 롬멜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누군지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떨게 만든 뛰어난 전략가에다 ‘대치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하고 ‘전투가 끝나면 피아 구별 없이 부상자 구출에 노력’한 영웅이라는 기사를 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한술 더 떠서 적장인 처칠마저도 ‘전쟁터에서는 재앙이지만 군인으로서는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했단다. 없던 관심도 생기고 잠자고 있던 관심도 깨우는 기사에 그길로 도서관으로 가서 롬멜에 대한 책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발견한 롬멜의 모습은 내 상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원칙적이고 도덕적이지만 사회적 불의를 제어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전투에서는 대담하지만 윗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목말라하는, 성실하고 착할 뿐인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명성을 드높였던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짧은 승리 후에 긴 후퇴와 정체가 있을 뿐이었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직장 상사와의 불화에 괴로워하는 가장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하지만 롬멜은 그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도 극진하게 가족을 챙긴다.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에도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장에서 벗어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상륙작전이 벌어지리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영웅이라기 보다는 그저 성실하고 가정적인 가장의 모습만 어른거린다.

  더 나아가 히틀러와의 관계에서도 분명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종종 ‘그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히틀러를 비롯한 수뇌부를 비판하면서도 히틀러의 위로와 격려 한 마디에 ‘총통의 나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며 안도하는 모습은 내가 알던 롬멜과 동명이인은 아닐까 의심케 한다. 저자는 롬멜이 히틀러가 자행한 전쟁 범죄에 대해 몰랐고 비윤리적 살상에 직접 앞장서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또, 롬멜이 전쟁의 전개양상과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목도하고 히틀러에 반대하고 연합군과 단독강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롬멜은 죽는 순간까지 ‘나는 총통을 사랑하였고 아직까지도 그를 사랑한다네’라고 고백한다. 이렇듯 롬멜은 끝까지 그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한다. 저자의 말대로 그의 삶은 너무도 ‘모순적인 삶’인 듯 보인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보고 싶었던 영웅은 책 속에 없었고 애초에 그에 대해 가졌던 존경과 호감마저도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영웅’ 롬멜을 잃은 대신 ‘인간’ 롬멜을 찾았다.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지만 조국을 위해 이겨야 하는 평범한 군인 그리고 전쟁 속에서 번뇌하고 고통을 겪는 한 인간이 서 있었다. 어쩌면 저자가 말했듯이 ‘롬멜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볼 수 있는 영사막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영국과 독일에서 각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웅이 되어야만 했던 한 인간, 롬멜. 사악한 전쟁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그의 타고난 순박함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다. 하지만 그의 순박함이 그의 체내에서만 빛나지 않고, 전쟁과 끔찍한 범죄 앞에서 더 큰 빛을 발휘했다면 역사는 분명 바뀌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앞으로 더 오랜 시간 롬멜은 ‘진정한 영웅’과 ‘착한 군인’ 사이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 같다.

  낯선 독일 이름들의 등장이 한순간 머리를 멍하게 하기도 하지만 풍부한 사진으로 얻는 즐거움도 크다. 인간 롬멜을 찾기 위한 최고의 책은 아니지만 저자의 성실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책이다.

(서두에 언급한 내용은 <매일경제> 허연 기자의 기사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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