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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했던 것보다 큰 수확을 걷은 느낌이다.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라는 소재가 흥미를 끌어서 읽게 됐는데, 읽고나니 ‘독살설’을 통해 조선의 중․후반 역사를 다 훑은 것 같아서 드는 생각이다. ‘~사건’이라는 대중역사서의 범람 속에서 이 책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히려 ‘독살’이라는 관심을 끄는 코드로 역사를 쉽게 설명한 지은이의 솜씨가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조선은 이미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해서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표출된 모순을 시정하고, 모종의 개혁을 꾀하지 않는 이상 회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현 체제에서의 변화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의 결과가 ‘독살’로 이어진 것이었다. 물론, 여기 제시된 모든 왕들이 ‘독살로 제거’되었는지 ‘불운으로 요절’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공식적인 기록이라는 것이 승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은폐될 가능성이 충분하고, 당시 정황상 독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저자 또한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강하게 부정하고, 일제의 고종 독살설은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지만 다른 경우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 상황적 배경을 들추며 강력한 심증을 드러낼 뿐이다.
가장 안타까운 독살의 대상은 소현세자와 정조였다. 중화사상과 주자학의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당시 사대부들과 달리 두 사람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이 두 인물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가 된다. 그 큰 기대만큼 그들의 이른 죽음에 아쉬움도 크다. 이 두 사람이 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들이 가졌던 개방적인 사고와 개혁적 마인드 때문에 ‘독살’이라는 의혹과 자꾸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8명의 독살의혹 대상자 대부분이 인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핏줄만도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효종, 그리고 인조의 손자이자 효종의 아들인 현종 세 명이다. 사실 소현세자와 원손 석철까지 죽여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자신의 권력 때문에 인조 이후 조선 역사는 변화없이 정체되고 서인들의 천하가 되고만다. 무리하게 즉위시킨 효종과 현종 역시 ‘적통’ 논란 속에서 제 명을 다하지 못한다. 인조의 죽음과 맞바꾼 기득권 사대부층의 발호는 경종과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폐단을 낳는다. 한 사람의 권력욕이 이후 100년의 역사를 더 나아가 한 왕조의 역사를 뒤바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왕 한 사람의 죽음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있느냐, 역사의 주인은 왕조의 왕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이 왕조국가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왕 한 사람이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수많은 민중이 개혁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시대적 한계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 안에서 ‘개혁’을 이루려했던 왕 또는 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설한다. 저자 또한 ‘독살설에 대한 연구가 조선의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이며, ‘조선에 대한 연구는 현대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라고 말하며 역사연구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일면 타당성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은 학문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왕’의 독살이 ‘국민’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에서)독살로 바뀌었을 뿐이지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대계가 아닌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정치가들에게 독살되지 않기 위해서 국민 각자가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조선 왕 독살사건’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