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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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은 독자보다 작가 자신에게 위안이 된다. 짧은 글이라도 써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한강의 글쓰기가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라면 과연 무엇을 위로해 주는 것일까. 그녀의 소설은 대체로 무겁다. 등장인물들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으며, 종내에는 독자에게 그 묵직함을 전파시키고 만다. 나는 한번도 그녀의 소설을 편하게 덮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내가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이유다. 


한 남자가 찾아 온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흔하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던가. 이상한 일은 '내(k)'가 진짜 보고 싶어했던 경주 언니가 아니라, 경주 언니와 각을 세웠고 갖은 노력에도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했던 임선배가 찾아온 것이다. 그와 경주언니의 갈등이 불거진 것은 k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갔던 회사 수련회에서 였다. 경주는 임선배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었다. 회사의 불공정한 원칙에 대해 내내 침묵했던 그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이었다. 여직원이 결혼을 하면 으레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경주는 이에 맞서 싸웠고 유일한 미혼남이면서 훗날에도 회사에 남을 임선배는 침묵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후에 경주는 그 역시 나서지 않았던 것일 뿐 자기 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모두와 똑같이 무력했던 것뿐인데, 나 자신부터 그토록 철저하게 무력했는데, 어째서 그 미소 짓는 얼굴에 술을 뿌릴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믿었던 걸까?(p.28)

경주가 분노했던 임선배는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회사를 나와 시사잡지 편집부에서 일했다. 거기서 대기업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인쇄 직전 삭제되는 사건을 이유로 회사와 싸우게 된다. 싸우던 이들은 결국 그 잡지사를 나와서 새로운 잡지사를 꾸린다. (시사저널에서 시사IN으로) 그는 거기서 4년 여를 일하다 암에 걸려 생을 달리 한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어려운 형편을 잘 몰랐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선뜻 도움을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쓸쓸한 죽음을 위로하는 글이 실리고, 한강 작가는 그 글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소설이 그녀에게 위로해 주는 것은 미안함을 대신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도와줄 수 있었던 일이든 아니든 우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려는 모든 이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녀의 소설은 그 빛들에게 진 빚에 대한 작은 보답 같은 것이다. 


화자인 k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암자에 한 소녀가 찾아오고 두 스님 중 한 명인 노힐부득은 그녀의 유혹이 두려워 재워주지 않는다. 나머지 달달박박은 그녀를 재우고 목욕물도 받아 준다. 다음날 노힐부득이 친구가 유혹에 넘어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 갔을 때 그들은 모두 황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관음보살이었다. 노힐부득도 몸을 씻고 황금 부처가 된다. 그러나 k는 끝내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없었다. 도무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자주 찾아온다. 그녀가 시나리오를 더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삶이 어느 것에도 동화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통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힘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어 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평화스럽게 했고, 그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누군가는 부처가 되고 관음보살이 되는 기적이 세상 어느 곳에서는 일어나겠지만, 그것이 되지 않고 평화로울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미완'과 '방관'의 선택지만을 손에 쥔 것도 모른 채 완성의 갈증을 풀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왜 번번히 절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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