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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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는 순간 생각한다. 이건 보통일이 벌어지고 있는 집은 아니구나. 


'강자'와 '약자'로 나뉘는 순간은 둘 중 하나다. 균형을 이루던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한 명의 힘이 강해지거나, 혹은 한 명의 힘이 약해지거나이다.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기가 그랬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는 주인공 오기는 교통사고로 며칠 만에 눈을 뜬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기관이 오직 눈꺼풀 정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 전까지 교수로 인생의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에게 갑자기 달려든 반전은 감당하기 너무한 고통이다. 


겨우 조금 움직이기 시작한 왼손으로 등긁개를 잡는 일뿐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억의 반추이다. 그는 자리에 누워서 하나씩 과거의 기억을 꿰맞춰 나간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아내를 생각한다. 기자의 사명과 공명심이 아닌, 샤넬 슈트를 입은 멋쟁이 오리아나 팔라치를 꿈꾸던 조금은 허영이 있던 여자.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았고 대부분 이뤄내지 못했지만 사랑스러웠던 여자. 그리고 마침내 '동경'과 '욕망'을 구별하고 말게 된 여자. 여기까지가 그가 알던 그녀였다. 거기에는 어떤 오차도 없이 정확한 형태의 아내가 완성되어 있었다. 


'도대체 그 빛은 언제 사그라든 것일까.'(p.28)

책의 제목이 '홀(hole)'인 것은 바로 오기의 완벽한 인생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지점을 스스로 기억해 내기 때문이다. 홀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그동안 너무도 여러 번 그에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단 한 번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간병인을 자청하던 장모에게서 서서히 구멍이 생기기 시작한 이유가. 


어디부터였을까. 아마도 딸의 서재에서 딸이 써왔던 글, 마지막이 될지 모르고 작성했던 '고발문'을 읽고 나서 장모의 마음은 굳어졌을 것이다. 고발문은 오기의 모든 악행에 대한 최종 보고였을 것이므로. 그날부터 장모의 복수가 시작된다. 그것은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복수가 아닌, 피 말리는 폭력이었다. 이 복수의 형태는 그녀의 딸이 오기에게 당했을 고통의 데칼코마니이다. 이미 부부 사이에 커다란 '홀'이 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영달과 명예만을 향해 내달리던 오기, 그리고 그녀의 불만을 항상 피해의식 정도로 치부해 버렸던 오기. 그런 오기에게 장모는 그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형식은 유지하지만, 내용은 야비하다. 부부관계는 유지했지만 부인의 존재를 무시했던 것처럼, 간병인의 역할을 하면서도 오기가 '병신'임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장모는 마당에 큰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장모는 문병 온 오기의 동료 에스와 이런 대화를 한다. 


'연못이요? 정원에요?

'산 걸 풀어놔야죠. 

 살아서 꼬리도 치고 숨도 쉬고 헤엄도 치고 그러는 걸 둬야지요.'

'잉어 같은 거요? 근사하겠네요.'

'산 게 근사합니까? 추접하죠. 

 악착같이 그 좁은 구멍에서 살려고 해댈 텐데....' (p.149)

장모에게 오기는 추잡하게 살아남으려는 존재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 한번도 그것을 감사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다 잃고 나니 이해해달라고 조르는 비열한 존재다. 딸이 그토록 큰 구멍에 빠져 허우적 거릴 때도 아무것도 못 보았으면서, 자신이 빠져 있는 시궁창에서는 나갈 수 없냐며 눈치를 보는 쓰레기다. 


소설의 마지막엔 과거에 오기가 부인과 했던 어떤 소설의 이야기가 나온다. 간발의 차이로 죽을 고비를 넘긴 어떤 남자가 어느 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아내가 남편을 찾았을 때 다른 도시에서 이름을 바꾸고 살고 있었다. 그 이야기 끝에 그녀는 펑펑 울었다. 그는 그녀가 우는 이유도 몰랐고 달래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그것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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