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덮었을 때 존 화이트 알렉산더의 '이사벨라와 바질 항아리'가 떠올랐다. 오빠들이 그녀가 사랑하는 로렌초를 죽여서 산에 묻어버리자, 그녀는 크게 슬퍼하며 그의 머리를 가져와 항아리에 넣고 바질을 심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사라져 버린 영혼에 대한 대체물로써의 육신은, 보편적인 상태에서의 공포나 이성으로 재단할 수 없는 광기의 투사물이 되어버린다. 이사벨라에게 그의 머리는 잘려진 인간의 신체가 아닌 로렌초 그 자체로 여겨진다. 이와 비슷하게 주인고 '담'도 그녀가 사랑하던 '구'가 죽고 나자 그의 시체를 집으로 데려와 정성스레 닦는다.


만지고 물고 핥던 육신이 사라지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자신과 기억을 공유하고, 반응을 보이며, 나의 기분에 맞춰 변하던 상대의 영혼이 사라지는 일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이사벨라, 그리고 이 책의 담이는 사랑하는 이의 시체를 곁에 두고자 한다.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싸늘하게 식은 육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단하나의 흔적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려 한다. 


말을 끝내고 다시 자리에 눕는데, 구가 말했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p.19)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사벨라처럼 그의 시신을 두고 잠들 수 있을까. 담이 하는 것처럼 '구'의 몸을 하나 하나 뜯어 먹을 수 있을까. 그녀가 구를 먹는 장면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지만, 마치 백설기를 떼어 먹는 아이처럼 그녀의 마음은 천진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담에게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직 그 방법만이 구를 그녀의 마음에서 되살아 나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고, 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구의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보증인인 구로부터 벌어들이는 돈 모두를 가져가는 사체업자들은 '결국 네가 가진 건 몸뚱이 하나 아니냐'는 말을 종종 했다. 담은 그 말들을 들으면서 잔인한 현실과 그들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분노해야 했다. 그런 말들은 인격적 의미를 가진 사람의 신체가 아닌, 정육점에 내걸린 고기를 볼 때 하는 말이어야 했다. 돈이 없으므로 그들의 육식은 한갖 고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영혼 또한 보잘것 없어져야 하는 현실을 담은 못견디게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올가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담은 구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구의 증명'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쩌면 그녀가 그 방식으로 '구'는 고깃덩어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단순히 하나의 장기를 남기고 가는 돈 되는 고깃 덩어리가 아니라, 내가 먹어서 내 몸에 그대로 들어와 다시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고귀한 존재 같은 것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그의 몸을 탐했고, 그를 통해 그의 육신은 단순한 피와 살이 아닌 영혼을 가졌던 숭고한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먹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미개함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피가 튀지 않고 뼈가 잘리지 않는 것만으로 인간은 훨씬 세련되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 더 잔인하게 상대를 말살하는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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