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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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출발드림팀의 구호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최선을 다하고 졌으면 졌음을 인정하는 모습은 성숙한 사회 구성원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 생각하면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출발드림팀에서는 모두가 0.00초에서 시작하고 똑같은 장애물을 넘어가며 똑같은 위기와 한계를 경험한다. 다만 차이라면 평소에 스스로가 몸을 다졌는지,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정도이다. 만약 거기서 한 명이라도 먼저 출발하거나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게 한다거나 한다면 당장 제지를 가할 것이다. 서울대 합격자의 70%가 강남 소재 고등학교에서 나오고, 하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학자금 대출자 비율이 높아지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뭔가 공정하지 못한 게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일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모두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류대는 시간을 잘 이용한 사람의 결과물이고 지방대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의 메마른 과실이 되어 버렸다. 특히 학생들에게 이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정규직 KTX 여승무원'이 정규직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노력도 하지 않고 정규직으로 되려는 건 불합리하다는 학생들의 답변 때문이었다. 모두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 정규직을 들어가려고 노력하는데 쉬운 길을 택하고서 이제와서 정규직으로 해달라는 건 한마디로 생떼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비정규직은 바로 자기계발을 게을리 한 탓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옥죄는 자기계발의 논리에 스스로 도취되어 자신들이 얻은 것은 오롯이 자신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 큰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겁없이 걸어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노동시장은 공정한 싸움터가 아니다. 스펙쌓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구성원들은 이제 '붉은 여왕의 나라'처럼 죽어라 뛰면 이제 고작 제자리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자기계발이 스스로의 계발에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 채, 회사에서 원하는 요건 채우기에 머물면서 학생들의 더 피폐해진다. 가끔 이에 대해 반론이라도 제시할라치면 가뭄에 콩나듯 나오는 '개천에서 용나는' 케이스가 너는 아직도 한참 노력이 모자라다며 질타한다. 그러는 동안 '공감'이란 단어는 사라졌다. 청소 아줌마들의 시위에는 찬성하면서도, 그들과 연대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촛불시위에는 참여하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에 대해서는 여전히 냉랭하다. 이제 학생들은 이미 고통을 이겨내고 성공한 선배의 전철을 되밟으며, 스스로의 고통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독인다. 그러는 동안 다른이들의 낮은 지위는 바로 노력부족이라는 등식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우리는 아니었는데?


책을 덮고 다른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대체로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문제다 라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진다. 내가 나를 돌아봤다. 그때는 IMF조차 터지지 않은 대학이었지만, 나는 나름 좋은 대학이라며 우쭐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 다른 학과보다 낮은 커트라인에 창피할 때면 '너무 하향지원을 해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온 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기성 시스템에 편입되고 안되고의 문제를 벗어나 스스로에게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이를 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기를 훌쩍 지나버렸기 때문에 당당히 비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좋은 대학 다니면서 자랑하지 않으려는 친구를 본적이 없고, 안 좋은 학교 다니면서 창피해 하지 않는 친구도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 식으로 '햐~지금 젊은 애들 걱정이다 걱정이야'라는 식으로 안이한 비판은 안된다. 사실 누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힐링'이니 '격려'니 하는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로라는 것은 결국 '다시 일어나서 달리렴.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힘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자기계발이 경쟁처럼 일어나서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현재는 답은 없다. 그래서 위로라도 구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로 아닌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는 질문으로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것을 우려한다.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문제제기를 못하는 것은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은 일


김영하의 단편 소설 '옥수수와 나'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스스로 옥수수라고 생각해서 닭들이 무서워서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던 남자가 어느날 스스로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닭들에게 쫓겨 오자 의사는 당신이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데 왜 그러냐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의 답은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모르잖아요.'


이런 상황은 의외로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옥수수이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왜 '옥수수' 이야기가 떠올랐을까. 만약 내가 이것은 잘못된 현실이며 이제 나로부터 이 상황을 개선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자.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있는데, 여전히 주변 상황은 그대로이다. 나는 차별하는 현실이, 자기계발에 매진해봐야 그저 평범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 현실이 오류 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아무도 쫓아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 도망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제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강준만의 '개천에서 용' 책을 볼 때처럼 답은 멀리 있거나, 혹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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