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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응' 하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 이만큼 와버렸으니 이제와서 뒤로 되돌아갈 순 없잖아. 그렇지?' (p.25)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상상한다는 것, 사람들이 많이 간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택한 나, 너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았을 나를 상상한다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의도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책이 100여 페이지가 남아 있다고 할 지라도 느닷없이 자살을 한들 이상하지 않다. 닻만큼 무거운 추억의 무게는 현실의 바다로 떠나야하는 주인공들을 한없이 바다 속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외동아이가 흔치 않던 1950년대 일본에서 외동 아들과 외동 딸로 서로의 상처를 이해해주던 두 초등학생이 등장한다. 하나는 '나(하지메)'이고 하나는 '시마모토'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중학교를 가게 되면서 볼 수 없게 되어버리지만, '레스토랑의 구석진 자리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세워놓듯' 서로는 서로의 자리를 남겨 놓는다. 그 자리는 예약한 사람이 왔을 때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자리로 남겨진다. 중학교에 가서 이즈미란 여자친구를 만나는 '나'는 첫 키스를 하고 깊은 고독을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시마모토의 자리를 채워버린 다른 존재에 대한 고독감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란 건 어떤 경우에는, 그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p.46)
이즈미와의 사랑이 영혼없는 만남처럼 텅빈 공허감을 주게되자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나조차도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즈미 역시 설득할 수 없다. 이즈미의 친한 사촌언니와 잠까지 자버린 '나'는 결국 이즈미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30대가 되기까지 12년 간의 '냉동'된 세월을 살게 된다. 하지메는 그 후 여름 휴가 때 우연히 만난 여자와 서른 살에 결혼을 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바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이건 왠지 내 인생 같지 않다고. 마치 누군가가 마련해둔 장소에서 누군가가 준비해 마련해준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p.114)
어느 밤 우연히 시마모토가 주인공이 운영하는 바에 찾아오고 '나'는 심하게 동요한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내가 평생을 공허하게 살았던 것이 그녀 때문인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공백이 결국은 자신의 현재를 먹어 삼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방황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주인공이 그것을 끝내려 한다는 의미다. 이는 평범한 생활을 내던지고 다시 시마모토가 있는 추억의 세계로 모험을 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하지만 시마모토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상하네. 넌 그 세월의 공백을 메우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야. 난 그 세월을 조금이라도 공백으로 놔두고 싶은데 말이야. (p.226)
다시 시마모토의 첫 마디로 돌아가본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메의 기억 속에서 시마모토는 다리를 절었지만, 그녀는 이제 다리를 절지 않는다. 이제 다리를 절며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그녀를 떠올리던 '나'의 기억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잃었다. 그녀는 여기 오지 않을 때는 여기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중간은 없다. 국경의 남쪽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환상과는 달리, 그 곳에는 멕시코라는 현실이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끝없이 놓여진 지평선을 향해 걷는 태양의 서쪽에서는 오직 신기루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알마니 와이셔츠와 BMW가 존재하는 현실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