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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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의 세계와 반만 죽은 고양이 (p.114)

 

아빠는 고양이 이야기를 해 준다. 상자속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이 고양이 곁에는 청산가리 통이 있는데, 1/2의 확률로 청산가리 통이 깨진다면 고양이는 죽게 된다. 내가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아 있을까?

고전 역학의 실재론자들은 우리가 그것을 확인 하든 안하든 고양이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했지만, 양자론자들은 다르다고 했다. 그것은 관찰자에 의해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갖는 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열어 봤을 때만 그 사건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는 정훈과 강토 형 그리고 몇몇 등장인물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정훈의 아버지 또는 강토 형의 애인이 현실에서 죽었지만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두 사람에게는 상자를 열어보지 않은 고양이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처럼 우주가 무한에 가깝다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고, 여기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다른 우주에서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는 항상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말하는 놀이를 즐겨했다. 가진 것이 없는 부자(父子)였으므로,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 부자(父子)는 진짜 부자(富者)였던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 또는 지금의 현실이 또 다른 우주에서는 살아있는 고양이로 환생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가진 삶의 희망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p.229)

 

'원더보이' 정훈은 1984년에 -조지오웰의 그 1984년, 어쩌면 말할 수 없는 말들만을 간직한 우리의 그 1984년-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다. 그 해 1월1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지구가 콩알처럼 작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 2천 5백만 시청자에게 보여줬다. 3천억 개의 별 중 하나여서 3천억분의 1의 고독을 간직한 지구에서 1천65억 명의 호모사피엔스 중에 하나일 뿐인 인간이 가지는 슬픔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기만 했다.

빅 브라더의 유한한 권력과 영원한 시간의 슬픔을 간직한 지구인이 공존하는 1984년, 그 해에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정훈은 살았남았다. 아버지는 남파간첩을 잡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애국자'가 되어 있었고, 정훈은 국민의 간절한 기도의 힘으로 살아 남은 '원더보이'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어느 순간 남의 속 마음을 읽는 능력도 생겨 있었다. 아버지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면서 죽음까지도 이용하고자 했던 권대령은 자신의 출세에 이용하기 위해 정훈을 양자로 삼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정훈의 초능력을 알게 된 권대령은 그를 고문실로 데려가 사회운동을 하다 잡혀온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게 한다.

 

"그 고통이 절정에 이를 때, 그들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고통도 자신을 완전히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차례로 발견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저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p.98)

 

스스로의 고통도 감당하지 못한 채 남의 고통을 읽어 내는 것은 정훈에게는 또 다른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권대령에게 벗어나 선재형을 찾아간다. 거기서 정훈과 닮아서 '원더보이' 정훈을 꼭 만나고 싶어했던 강토 형을 만나게 되고, 그가 애인을 잃고 같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훈은 해직기자 출신 재진 아저씨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고 거기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들의 인터뷰 녹음 테입을 풀어 적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강토 형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타인의 고통을 공포보다 더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일이에요." (p.191)

 

라고 말하며 강토형은 분신을 하겠다고 말을 한다. 나의 고통을 남과 공유할 수 없게 된 이들은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지 못하는 현실에서 또 좌절하게 된다. 강토 형이 원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고통으로 인해 나머지 사람 중 단 한 명이라도 그 슬픔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일이다.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아무런 감정도 가질 수 없도록 강요된 사회 구성원에게 고통의 깊이를 알게 해주고자 괴로워 한다.   

 

1980년대는 그 시기를 거쳐온 사람들 모두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떠나보내야 했고, 또 어떤 이는 그런 이를 보내면서도 한발짝도 앞서 나가지 못한 괴로움에 힘들어 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원인조차 밝힐 수 없어 힘들어했고, 어떤 젊은이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게 되어 아파 했다. 우리는, 격변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리고 1987년 여름이 되자,

베드로의 집에서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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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가 어찌됐건 간에 내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김연수의 소설들과 다소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또 이유야 어찌됐건 지금까지와의 소설과 다르다고 해서 부족하다거나 실망스럽다거나 이런 종류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김연수의 소설을 추천하냐고 할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역시나,

"퍼즐 같은 그의 글 쓰기 방식이 좋으니까." 이다.

물론, 단순히 소설에 숨은그림찾기를 만들어놔서라던가, 낱말 맞추기 같은 이야기를 써놔서 좋다라고 하는 건 한편으로 그의 글을 폄하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 더 재미있는 글을 쓰는 다른 작가의 글에 더 우선해서 그의 글을 찾아 읽게 되는 이유는 그 퍼즐 조각들 사이 사이에 박혀있는 고뇌의 유리 조각이 반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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