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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페미니즘
민은기 지음 / 음악세계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음악과 페미니즘>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단 이 책은 사실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책보다는 학술 논문에 가깝다. '페미니즘 방법론을 통한 서양의 고전 음악 연구 시론' 정도가 적당한 제목일 것 같다.
페미니즘이 음악 연구와 만날 수 있는 수준은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사회 구조와 제도의 문제. 여기서는 여성 작곡가나 연주가의 존재를 억압한 관습의 문제, 그리고 여성의 음악 교육 문제 등이 거론된다. 둘째, 음악에 묘사된 여성의 이미지. 특히 오페라나 표제 음악에서 전형적인 여성성이 어떻게 반복, 강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 보다 추상적인 수준으로 음악 구조 일반에서 성차의 문제. 여기서는 소나타 형식에서 남성적 주제와 여성적 주제의 대조, 음정 관계의 수동성, 능동성 문제 등이 다뤄진다.
대충 이런 문제들이 이 책이 다루는 범위 내에 있는데 특히 첫 번째 문제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된 또 다른 수준이 있다. 바로 음악학 '전반'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페미니즘을 통해 음악학이 그저 다른 인문학적 조류에 편승한다는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라 기존의 음악 연구의 전반적인 틀을 재고한다는 적극적인 차원의 문제다. 페미니즘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음악에 늦게 도착했지만 가장 활발하게 꽃피우며 음악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서양에서 음악은 여성적인 매체로 취급받아 왔다. 그것은 음악이 무엇보다 감정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인데, 그래서 사상가들과 음악가들은 이런 음악의 충동성을 길들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고 특히 르네상스 이후에는 이성적 규율이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기능 화성과 평균율, 오케스트라로 대표되는 합리적 질서가 완성되었다. 반면 음악의 즉흥적 매력이나 해석의 자유, 감정적인 반응 등은 주변에 내몰리고 말았다. 따라서 음악은 가부장제 질서의 억압이 가장 강도 높게 진행된 장일 뿐만 아니라 이제 그런 질서의 몰락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페미니즘은 서양의 음악사를 다시 쓰는 거대한 기획의 일환임은 물론 음악학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뒤집는 중요한 동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최근 음악학의 새로운 흐름들은 모두 넓게 보아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정전 중심의 고전 음악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음악(특히 비서구 음악과 대중 음악)을 포괄하려는 시도가 그렇고, 작곡가 중심에서 벗어나 연주자의 해석을 중시하는 시도도 그러하며, 기계적인 분석 대신 수용자의 정서, 감정을 연구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시도 또한 페미니즘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는 십여 년 전 미국에서 New Musicology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조류들인데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음악학의 주류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음악학의 주요 성과들이 참고문헌에는 소개되어 있으면서 정작 본문에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이 책의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음악과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무게에 부합하려면 이런 조류가 반드시 논의되었어야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페미니즘은 음악 연구의 '한' 분야가 아니라 음악학 전체를 다시 기획하게 만드는 동인이다. 이제는 이런 새로운 조류가 하루빨리 국내에 소개되어 정체된 음악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