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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박영욱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4월
평점 :
철학과 대중 문화가 만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대중 문화의 철학적 해석이 있는데 <영화관 옆 철학카페>로 유명한 김용규 님의 작업이 대표적인 예다. 또 하나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텍스트'가 아닌 '매체'로서의 대중 문화를 철학적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는 제목이 연상시키는 것과 달리, 그리고 저자가 대중 문화의 구체적인 사례 분석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 문화 일반의 철학적 정초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다.
그래서 내가 책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기대와 달리 철학적 논의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에서 거론되는 몇 안 되는 학자들은 철학자라기보다 사상가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 특히 3, 4장이 그러한데, 현대 미술과 영화에 관한 책에서 (굳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고서도) 많이 논의되었던 사항들이다. 사실 철학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논의의 전개가 얼마나 철학적인 엄정함과 논리를 갖고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결함은 좀더 심각하다.
대중 문화의 위상을 철학적으로 높이기 위한 책이라면 우선 저자가 대중 문화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머리말에 이런 추상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는 식의 용감한 발언이 나온다. 여기서 나는 저자가 과연 철학자인지 의심이 갔다. 이렇게 중요한 질문이 왜 추상적인지도 이해가 가지 않을뿐더러 철학의 강점은 무엇보다 각론이 아닌 총론에서 찾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총론 없는 각론은 특히 철학의 경우 모래 위의 성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책 곳곳에서 저자의 논의가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것은 당연하다. 1장에서 커트 코베인의 음악이 쇤베르크의 음악만큼이나 혁신적이라고 한다. 대중 음악도 클래식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3장에서는 대중 문화와 순수 문화의 경계가 이제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 팝 아트는 사실 순수 문화에 가깝다고 한다. 2장에서는 문화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전개되는 고유한 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4장에서는 고전 헐리우드 영화를 일체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대체 저자는 대중 문화를 고급 문화와 독립된 장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미적 특질로 구별되는가, 그저 관습의 문제일 뿐인가? 음악, 영화, 미술 등 문화를 이루고 있는 각 분야는 통합적인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대중 문화는 방어적으로 옹호되어야 하는 대상인가?
세세한 오류들도 많다. 분명한 것만 지적하자면, 너바나의 가치를 논하면서 화성 중심의 클래식이 갖는 긴장-해결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적어도 블루스 이후 아프로-아메리칸 전통의 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또한 너바나의 음악이 장조-단조의 분리를 넘어서고 있다고 했는데, 이 또한 헤비 메탈의 파워 코드와 블루스의 블루 노트가 가능하게 해준 특징으로 너바나 이전 음악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논리로 따지면, 화성은 장조를 가리키지만 선율은 단조를 가리키는 Mack the Knife 같은 곡은 얼마나 혁명적인가?
이렇게 서로 다른 전통을 무시하고 표면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진단은 재즈와 힙합을 다룬 대목에서도 반복된다. 주도적인 성부가 있는 클래식에 비해 독립적인 성부들이 어우러지는 재즈가 진보적이라는 평가는 음악의 발생 과정과 수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일면적인 진단이다. 힙합의 등장이 화성 중심의 서양 음악을 해체한다는 평가 또한 대중 음악의 전통을 넓게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 로큰롤 이후 대중 음악에서 화성의 역할은 클래식과 엄연히 다르며, 무엇보다 아프로-아메리칸 전통의 음악은 화성 중심의 음악이 아니다. 이런 오류들에 비한다면, 궁상각치우를 도레미솔라에 대응한다고 한 것(p.29), 기타 리프와 솔로를 혼동한 것(p.51), 루프를 리듬이라고 착각한 것(p.109), chromaticism을 온음계라고 한 것(p.147) 등은 사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