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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음악축제 순례기
박종호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매년 6월 대학들이 일제히 방학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떠난다. 이때 이들을 겨냥해 기획된 여행서들이 집중적으로 출간되는데, 요즘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주제를 잡아 여행하는 것이 트렌드다. 그래서 유럽의 미술관과 건축물을 테마로 한 여행서,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 나오는 도시들을 둘러보는 여행서들이 많이 나와 있다.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 역시 색다른 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음악과 관련된 유서 깊은 유럽 도시들을 소개한 책은 몇 권 있었지만 이렇게 음악 페스티벌에 집중한 책은 없었다.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더할 수 없는 선택이다. 십 년 이상 해마다 유럽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음악 페스티벌을 접한 저자가 꼼꼼하게 기록한 이 책에는 페스티벌에 관한 온갖 정보가 들어 있다. 페스티벌의 유래와 최근의 동향과 실용적인 정보는 물론 시원시원한 사진과 인근 도시에 대한 여행 정보까지. 페스티벌 선정도 유명한 블록버스터급에서 최근에 각광을 받기 시작한 후발주자들까지 골고루 안배되었다. (한 가지 의문, 영국의 페스티벌은 왜 빠졌을까?) 물론 이 책은 책을 들고 유럽의 축제 현장을 돌아다닐 여행객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꼭 현장에 있어야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은 아니며 책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히 유럽의 문화적 분위기를 즐길 수 있으니까.
정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움을 표하자면 그건 티켓 구매에 관한 사안이다. 저자는 거의 모든 공연의 티켓을 현장에서 운 좋게 구한 것으로 자랑스레 말하는데,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유럽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물론 현장에서 표를 구할 수 있는 몇몇 방법이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만을 믿고 현장에 달려갔다가 하루를 날린다면 그보다 더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저자처럼 현지 호텔의 단골이 되어 벨보이와 친분을 쌓아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 나온 김에 아쉬움을 더 들겠는데, 저자는 고급문화 향유자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유명 관광지나 둘러보는 일반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를 책 곳곳에 드러낸다. 바이로이트에서 어학연수를 받으면서도 바그너 축제에 대해 모를 수 있다. 그것이 뭐가 어떤가. 바그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이로이트는 성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유럽의 소도시일 뿐이다. 만약 맨체스터를 여행하면서 올드 트라포드를 둘러보지 않은 저자에게 축구팬이 쓴소리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축구는 그저 오락일 뿐이고 클래식은 문화라고 답할 것인가.
정보에 치중하는 책으로서 갖는 한계도 있다. 최근 들어 유럽에 음악 페스티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가장 큰 원인은 클래식 문화 전반에 팽배해 있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책에 실려 있는 사진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젊은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유럽에서 클래식 소비층의 편향은 심각한 문제이고 여기에 음반 시장의 침체까지 더해지면서, 시즌 중의 레퍼토리를 재활용할 수 있는 페스티벌이 좋은 돌파구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꾸준히 늘고 있는 유럽의 관광객들을 겨냥한 면도 있다. 또 하나 클래식 공연이 이렇게 국경을 넘어 소비되고 재활용되면서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이 나름의 특색을 잃고 다들 비슷비슷한 소리를 낸다는 역효과도 있다. 이런 비판적인 논의들을 곁들이고 페스티벌을 어떻게 기획하고 국가나 도시가 지원하는가 하는 정책적인 면이 소개되었다면 훨씬 값어치 있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다. 혹시나 이 책 때문에 클래식 음악은 돈과 여유가 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러운 취미라는 편견이 굳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건 물론 저자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문화의 소비층을 늘리기 위해서는 고급문화의 대중화 문제와 더불어 대중들의 의식적인 노력도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유럽의 음악축제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분명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이지만, 책을 덮고 난 다음에 여러 감정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