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보인다 클래식이 들린다
데이비드 렌돌프 지음, 이창희 (외) 옮김 / 마루(금호문화)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클래식 음악 세계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초보자들을 유혹하는 책이 많지만 데이비드 랜돌프의 이 책만큼 똑 부러진 책도 드물다. 명곡 해설에 주관적인 감상을 덧붙인 일반 서적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책들이 먹기 좋게 요리된 음식을 주는 것이라면, 랜돌프의 책은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 즉, 무슨 음악을 들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음악을 들을 것인가가 이 책의 관심사다. 사실상 음악 미학 입문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음악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악보를 들여다보며 분석적으로 음악에 접근하지 않는(혹은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책으로 철저하게 감상자 위주로 논의를 전개한다. 여기에는 저자의 확고한 믿음이 바탕에 있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예술, 비서술적 예술이므로 표제나 가사보다 음악 자체의 의미가 일차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언어적 설명이나 일상의 감정이라는 차원에서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에 회의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에도 마찬가지로 회의적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음악에서 청자가 느끼는 정서적 반응이다.

물론 이런 믿음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 분석적 태도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 지적 분석이 감정적 반응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음악을 지나치게 청각적인 경험에 제한하고 있다(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귀를 이끄는 것이 꼭 소리만은 아니며, 음악외적 해석이 음악 경험을 얼마든지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미학 책이 아니라 초보자가 클래식 음악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고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더없이 훌륭하다. 초보자들이 주눅 들지 않고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데, 무엇보다 감상자들이 음악 감상에서 실질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을 설명한다는 점이 책의 장점이다. 이는 음악 형식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가령 반복을 통해 형식의 원리를 설명하고, 악장 구성을 대조와 다양성으로 풀어내고, 형식을 정적인 성격과 동적인 성격으로 구분하여 분류하고,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를 창조성의 핵심 영역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른 책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독창적인 대목이다. 쉬우면서도 정곡을 찌른다는 말은 바로 이 책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비교적 접하기 쉬운 곡들에서 예를 따왔지만 그렇다고 교과서적인 명곡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인덱스가 첨부되어 있어서 곡 설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다행이다(당연히 있어야 할 인덱스가 언제부터 고마운 일이 되었는지). 번역도 나무랄 데 없는 이 책이 그럼에도 그에 값하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마 진부한 제목 때문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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