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예술가의 초상 02
솔로몬 볼코프 엮음, 김병화 옮김 / 이론과실천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과 정치를 주제로 삼아 가장 할 말이 많은 클래식 음악 작곡가라면 단연 바그너와 쇼스타코비치를 들겠다. 바그너가 19세기 중반 유럽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풍운아라면, 쇼스타코비치는 불행히도 20세기 소련의 스탈린 치하 시대라는 그 때, 그 곳에 있었던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굴곡을 정면으로 부딪히며 살았던 그가 들려주는 우울한 예술가의 초상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고 또 매혹적이다.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가 만년의 쇼스타코비치를 인터뷰한 것을 정리한 이 <증언>은 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몰고 온 문제작이었으며, 금년 초에 출판 25주년을 기념하는 판본이 다시 나올 정도로 계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 책에서 쇼스타코비치가 회상하는 것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생애나 음악에 대한 언급이 책 여기저기에 등장하지만, 책의 중심은 그가 알고 지냈던 동시대의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가)의 이름들이 차지한다. 책의 하나의 큰 줄기는 음악의 축을 따라 진행되고, 또 하나는 스탈린의 공포 정치를 축으로 진행된다. 물론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의 관계다. 책은 스탈린을 채찍과 당근을 주며 작곡가를 길들인 독재자로 그리며, 본인은 이런 정치와 명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신성한 바보 유로지비(yurodivy)로 묘사한다. 여기에다가 내부자의 시각에서 동료 예술가들을 평가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놓칠 수 없다. 특히 마야코프스키와 프로코피에프에 대한 그의 평가는 충격적이다.

결국 <증언>은 가혹한 시대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들과 기회주의적이고 무능한 동료들의 행태를 매섭게 몰아붙이면서, 자신에게 가해진 비난과 편견과 오해를 덜어내려는 쇼스타코비치의 자기 변호인 셈이다. 그러니 책을 덮고 나자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과연 쇼스타코비치는 어느 정도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철저하게 시대의 희생자인가, 아니면 실은 바그너를 능가하는 고도로 정치적인 인물인가. 아니면 이 모두가 솔로몬 볼코프의 날조의 산물인가.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쇼스타코비치가 대단히 복잡하고 모순된 지성을 소유한 작곡가라는 점이고, 20세기 음악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또한 그의 시대와 고국의 상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사족에 불과하다.

간만에 러시아적인 정신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게 되어 즐거웠다. 더불어 다시 체호프의 소설을 들춰볼 이유가 생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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