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지음, 장혜영 옮김 / 에코리브르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오늘날 과학 소설의 먼 조상 정도로 여겨지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우리에게 친숙한 비교를 들자면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웰즈의 <타임 머신>의 아이디어를 혼합해 17세기 식으로 각색한 소설 같다. 발명한 기계를 타고 달나라와 해나라를 방문하는 가상의 여행을 기록한 것으로, 당대 사회를 향한 비판과 풍자, 기계와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적절히 섞어 우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사상가들의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흥미진진한 모험과 지루한 철학적 논쟁이 번갈아 등장한다. 현대적인 의미의 잘 짜여진 유기적인 이야기 구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이런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색다른 상상력을 즐기는 것일 테고, 따라서 관건은 이런 상상력이 단순한 고고학적 취미를 넘어 얼마나 현재 우리의 현실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솔직히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구약성서와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과 그리스 철학자들이 등장하는 <달나라 여행>은 그나마 당대 사회의 고정 관념을 뒤집어보려는 발상이 그럭저럭 참신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균형은 <해나라 여행>에서 철저하게 무너진다. 작품 자체가 미완성인 탓도 있겠지만, 중심을 이루고 있는 '새들의 재판'은 너무 메시지가 직접적이라 따분하고, 그 밖의 모험들은 너무 모호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다. 궤변과 황당함, 무의미한 퍼즐 맞추기 같은 인상인데, 이런 것들을 떠나서도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없다.

상상력을 즐길 수 없다면 당대 사회의 맥락에서 작가의 사상과 세계관의 관점으로 읽는 방법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이 작품에 대한 합당한 처우일 듯한데, 그러려면 보다 자세한 해설이 첨부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기이한 사람의 횡설수설 정도로 읽힐 가능성이 많다. 정리하자면 순수한 상상력과 비판적 이성이 기묘하게 얽혀있는 작품이다. 물론 기묘한지 절묘한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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