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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밤
커트 보네거트 지음 / 동인(이성모)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커트 보네거트 소설의 매력은 냉소와 연민이 어우러진 문체와 독특한 거리두기에 있다. 잘 알려졌듯이 이것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으로 거슬러 간다. 나치라는 공공의 적이 아니라 선의 진영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연합군의 예기치 못한 배신을 목격한 그는 믿음과 윤리의 지반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고 인류라는 종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경하고 개성 넘치는 글쓰기가 탄생한 것이다.
보네거트의 소설은 대부분 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서술하는 구성을 취하는데, 마치 인식 체계가 다른 타자가 관찰하는 것 같은 생경함을 띤다. 사사로운 개인사를 시시콜콜 묘사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소설에서 보이는 심리 묘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주인공의 행동을 중심으로 시 같기도 하고 아포리즘 같기도 한 짧은 대화체로 서술함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문체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인공은 하나같이 왜소하고 나약한 인물로, 우연한 계기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시대의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묘한 심정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 존재와 불가해한 세상에 대한 보네거트의 반응 방식이다. <내 영혼의 밤>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공 하워드 캠벨 2세가 처한 궁지는 이렇다. 사람들은 그를 나치의 선전관으로 기억하지만 실은 미국의 스파이였던 것. 그 이중적 입장을 둘러싼 오해와 아이러니가 극의 구조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독일과 미국 정부에 백인 우월주의 집단과 러시아 스파이, 이스라엘 정부가 삶에 끼어들면서 무기력하게 분열증에 빠지고 마는 가련한 개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주인공에게 측은하면서도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삶이 주는 무게에 휘둘리며 사는 우리에게 이렇듯 위안과 공감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영혼의 밤>은 보네거트의 황금기의 소설 중 가장 정상적이다. 다른 작품들이 우주적인 배경에 제정신이 아닌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풍자와 독설과 유머를 분열적으로 오간다면, 이 소설은 처음 보네거트를 접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작품이다.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적으로 다룬 명실상부한 대표작 <제5도살장>이나 상상력의 진수를 보여주는 <고양이 요람>의 충격에는 못 미치지만 작품의 진실성과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면에서는 이 작품 역시 놓칠 수 없다. 부디 보네거트 할아버지가 트리팔마도어 행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걸작들이 복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