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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ㅣ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의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만약 어떠어떠한 세계가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어슐러 K. 르 귄의 '헤인 시리즈'는 먼 미래의 행성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둠의 왼손>의 게센은 눈부신 테크놀로지도 효율적인 사회 체제도 찾아볼 수 없는, 한 마디로 오늘날 지구보다 나을 게 없는 세계다. 궁극적으로 르 귄이 이 책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다름, 차이의 문제다.
<솔라리스>처럼 아예 인식 구조가 달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라면 차이는 영원히 차이로 남을 뿐이겠지만, <어둠의 왼손>의 게센과 에큐멘 인은 같은 헤인의 후예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간에는 (다소 일방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교류의 욕망과 이해의 필요성이 싹튼다. 고립된 마지막 세계를 찾아온 엔보이 겐리 아이가 에스트라벤과 함께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소설의 줄기인데, 특히 빙하지대를 지나면서 불신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에 상당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과연 생물학적 조건을 비롯하여 제도, 기술, 개인 윤리 모두가 상이한 두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남녀의 구별이 없는 종족이라는 아이디어가 가장 신선하긴 했지만 이를 페미니즘 소설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성적 차이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을 제하면 인류학이나 윤리학의 보고서 성격이 더 강하다. <빼앗긴 자들>이 이런 주제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실험한다면, <어둠의 왼손>은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어가고 있다. 상이한 두 세계를 상정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치밀한 상황 설정과 여러 가능성의 철저한 검토 없이는 안이한 해결책이 되고 마는데 그런 점에서 르 귄은 재능이 많아 보인다.
본문에도 등장하지만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르 귄의 문체이다. 많은 SF가 알레그로의 속도로 진행된다면 이 소설은 안단테 풍이다. 주인공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구성과 곳곳에 들어간 짧은 우화들은 순수 문학에도 뒤지지 않는 문학적 풍취를 자아내지만, 시리즈의 일부인 때문인지 가끔 설명이 친절하지 않고 글읽기가 다소 지루하다는 인상을 준다. <빼앗긴 자들>에 비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은 좀 떨어진다. 그렇지만 진지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