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언어가 그저 지시체와 의미를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근대 일본에서 번역어가 형성된 과정을 통해 실증하고 있는 책이다. 사실 번역이야말로 언어의 이런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터인데, 언어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넘어오면서 그 언어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와 역사까지 함께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은 오해와 전이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마련이며, 때로는 번역어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차원의 의미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카세트 효과'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의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중요할 것 같은 식으로 모호하게 사용되는 번역어 효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과거의 사정을 넘어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다. 목도하는 바대로 지금은 카세트 효과의 전성기라 불러도 좋을 시대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의도적으로 일상과 유리된 번역투의 말을 사용하기보다 아예 외국어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학문에서는 물론 스포츠와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바이다. 번역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 노력하기보다 외국어 자체가 갖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특징에 손쉽게 편승하려는 노림수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문화적 장벽이 허물어지는 세계화 추세와 맞물린다면 언젠가는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 관계로 번역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번역어 성립 사정을 연구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