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 시공아트 9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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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혹은 남아메리카)라는 말을 들으면, 그곳은 이 세상 끝, 아주 먼 곳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떨 때는 그곳이 북극이나 남극처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땅처럼 여겨진다. 그곳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낸 남아메리카 미술을 연대기순으로 개관하고 있는 입문서이다. 20세기 초,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 국가를 세우고, 20세기 중반 군사 독재에 신음하던 남아메리카의 역사를 배경으로 거대한 벽화처럼 미술사가 펼쳐진다.

흔히 남아메리카 미술의 특징을 그들의 독자적인 전통-주술, 신비주의, 다혈질적 기질-이나 사회주의 미술 운동-벽화, 판화, 거친 콜라주-에서 찾고는 한다.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 남아메리카의 대표 작품이다라는 꼬리표가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 미술은 서구 전통이 연장된 것이다.'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그 무슨 식민주의 사관이냐 하는 반박이 내 안에서 이미 나오는 것 또한 사실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 또한 있다.

서구의 많은 미술가들, 이를테면 피카소나 마네, 반 고흐 등이 아프리카나 일본 등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즉, 독자적인 서구의 미술 속에 외부의 영향을 녹여 넣은 것이다. 그러한 영향에 대해 제작 당시보다 작가의 사후(死後)에 더 많은 연구와 발표가 뒤따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에 와서 큐비즘의 원조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남아메리카 미술, 아니 그 너머 남아메리카의 예술을 대표하는 디에고 리베라나 멕시코 벽화 미술의 또 다른 영웅 호세 클레멘토 오로스코 등의 벽화를 보면 오랜 식민 생활이 뿌리를 내린 기독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나오고 있다. 그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봉납>(1923∼28) 같은 작품에서 여실한데, 어두운 색채 속에 함께 모여 기도하는 군상들은 십자가 아래에서 '완벽한 조화'를 꿈꾸고 있다. 리베라의 <창조>(1922∼23) 역시 좌우 대칭의 구도 속에 천지창조의 드라마를 구현하고 있다(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란 영화가 있었다. 원주민들은 이구아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 아마존 깊은 곳에 자신들을 위한 기독교 성지를 만든다. 비록 서구인에 의한 묘사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상한 열기는 두렵기조차 한 것이었다).

거기에 1950년대 이후 불어닥친 초현실주의의 유행은 서구 리얼리티의 또 다른 개화를 보는 듯하다. 레메디오스 바로의 <조우(遭遇)>(1962)나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1940) 등은 막스 에른스트나 앙리 루소의 그림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서구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답습한 작품조차도 대상의 풍부한 볼륨이나 관능성으로 인해 초현실적 색채가 더욱 살아난다는 점이다.

이렇듯 남아메리카의 미술은 서구의 또 다른 얼굴처럼 내게는 다가온다.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늦게 나타났을 뿐,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술에 무지한 자가 보고자 애쓰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생각 역시 든다. 섬세한 영향과 그 극복의 역사를 짚어내기에는 내 눈이 아직 정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남아메리카의 미술이 세계 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인간의 고통과 희망, 역사와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막스 에른스트와 앙리 마티스가 보여도, 더 나아가 그것이 흔적에 그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남아메리카의 미술은 아름답다. 강하고 진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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