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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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판타지다.

인간의 머리 위에 수레바퀴가 나타나

빨강과 파랑으로 천국 갈 확률과 지옥 갈 확률을 표현하고

임종의 순간에 '돌려주세요!' 말은 없지만 빙글빙글 돌아가

사후 행선지를 결정짓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초자연적인 현상이 어느날 뜬금없이 생겨난 이후 변화하는 세계,

그래서 부제는 '수레바퀴 이후'.

나의 도덕성을 남들이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고,

나 역시 다른 이들의 도덕성을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세상,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해 온갖 종류의 천국과 지옥을 상상하는 세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고 행동과 말에 따라 순식간에 변화하는 확률을 보는 세상에서

대체 올바른 삶, 정의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한다.

'정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정의인가'라고 묻는

아주 오래된 질문(작가의 말에서 언급, 플라톤의 <국가>)

올바른 대답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데 파헬벨의 캐논처럼 변주한다.

(여기서 이 명제는 순환논증이라고 콕 찝어 주고 있어 반가웠다.

논리 오류 4 : 순환논리의 오류 포스팅에서 참조가 가능하다.)

행위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해야 하나,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 중, 반드시 공공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나,

공공에 대한 사랑이 가족과 자녀에 대한 애정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사후 행선지가 천국일 확률이 높다면 당장의 죽음으로 천국 갈 가능성을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공공선이 아닌가

해롭지는 않지만 정의롭지 않은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수레바퀴 이후의 세상에 대해

주인공 르포 작가가 만나는 이들이

자신의 입장과 직업,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자문자답한다.

내가 질문을 더한다면

올바른 삶을 살다 마지막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악인으로 살았지만 마지막엔 생명을 구하며 희생했을 때,

그럴 때 수레바퀴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이런 질문들이 당장은 의미 있을지 몰라도

종국엔 쓸모 없어지는 건,

이런 세상에 아이는 사라지고, 죽음만 남기 때문에

'오늘보다 초라한 내일, 내일보다 볼품없는 모레를 향해 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세계의 다양한 이슈를 언급하는 만큼

아이들과 토론할 주제를 여럿 찾을 수 있겠다.

다만,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

'정의로운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주 오래된 질문으로 통한다.

TMI : 이 책은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이다.

박지리 작가는 <합체>,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등을 출간했으나 31세로 생을 마쳤다.

'한국 문단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박지리 작가의 뜻을 이으려 시작한 문학상 공모전'이 박지리 문학상이다.

바퀴가 막 발명되었을 때 지구에는 700만 명의 인간이 있었다.

덕분에 수레바퀴의 출현은 진짜 바퀴의 발명만큼이나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연봉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에 갈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 자기 계발서를 읽고, 유망한 주식 종목 대신 도덕의 토대에 대한 이론을 공부한다. 자본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요구가, 변방에만 머무르던 이론들이 부상하고 있다. - P17

선생님은 가능하신가요? 남의 피해가 아니라 내 피해에 대해서,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상대를 마음 편히 용서한 적이 있으세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수레바퀴가 빨간색이다, 하면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으세요? - P110

사회에 기여하지 않거나 덜 기여하는 행위는 무가치한가?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는 것 이외의 지향점은 없단 말인가? - P116

각국 정부의 협조만 얻으면 이걸 사회계약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거예요. 검은 수레바퀴를 가진 사람에게 살인 면허를 부여하는 거죠. 이때 살인은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고요. - P149

내가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긍지를 가지지 않는것,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믿지 않고 어느 무엇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사랑과 따스함이 아니라 원칙과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것, 가족을 내버리고 세상을 고민하는 것, 더디 기뻐하고 분노를 참고 돌처럼 무감각한 것, 더 적은 것을 누리고 거기에 만족하는것, 너희를 이 땅에서 치워버리는 것. - P173

그리고 시작되기도 전부터 저물어가는 내일을 위해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초라할 것이고 모레는 다시 내일 보다 볼품없을 것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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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11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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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상상한 세계는 해수면이 높아지고 각지에 전쟁이 벌어지는 일이 일상인 세계.

그러다 결국 바닷물을 막기 위한 댐이 터지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 어디쯤이 되는,

물건을 얻기 위해 잠수해서 도시를 뒤져야 하는, 그런 세계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배경이 서울일 뿐.

세상이 물에 잠긴 지 15,

물꾼 선율이는 물속에 잠자던 '수호'를 건져낸다.

시냅스 스캐닝 어쩌구가 장착된 안드로이드.

그냥 보아서는 사람과 다를 것 없고, 기억도 사람과 같은 로봇이다.

수호는 자신의 죽음과 서울이 물속에 잠긴 그 사이 4년의 시간 사이에서

사라진 그 기억을 찾으려 선율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간다.

환경 문제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너무 가볍지도 않게.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의 작가 단요의 청소년 소설이다.



소녀는 아직 과거에 잠들어 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과거에. 망가지지도 않은 물건들을 버려대고 냉장고에 음식을 박아 둔 채 잊을 수 있었던 시절에. 물론 꿈이긴 했지만, 선율은 그런 꿈이라면 잠만 자다가 굶어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 P21

눈을 반쯤 덮은 속눈썹이 물에 잠긴 나뭇잎의 그물맥처럼 섬세하게 보였다. 선율은 그 뒤편에 웅크려 있을 금속제 뇌를, 거기에 담긴 마음을 생각했다. 2038년 12월의 서울에서 출발해 2057년의 서울에 도착한 마음을. 자신의 죽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전기로 만들어진 마음도 피와 살로 만들어진 마음만큼이나 복잡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8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 그걸 알 때까지 살아 보려고. - P42

사람을 한 명으로 내버려두지 않는 낱말들 말이다. 부모님이 그랬고 남편이 그랬고 아들이 그랬다. 낱말들은 청소기와 자동차가 그랬던 것처럼 물에 잠겼으며 어느 물꾼도 서울 밑바닥에서 그것을 건져 오지 않았다. - P58

억지로 끌려와서 삶에 내던져진 나는.
수호는 그렇게 물으면서 눈을 감았고, 떴고, 다시 감았다가, 떴다. - P153

지오는 끝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마음의 힘일 것이다. 뾰족뾰족한 기억 위에 시간을 덧붙여서, 아픔마저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고통을 지우는 게 아니라, 잊는 게 아니라, 피해 가는 게 아니라, 그저 마주 보면서도 고통스럽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다시, 다른 시간의 발판이 된다는 것.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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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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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혼, 내면의 소리만을 따르는 무법자 조르바.

법과 이상, 조국과 민족이라는 세계의 허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실패에서 일어나 살아가는 이야기.


외적으로만 보면

내일이 없는 패배자의 하루살이고 여자에 기생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회의 법과 질서를 벗어나 내면의 목소리에 따르는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바라보면

참패 속에서 승리를 찾고, '사면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돌멩이'가 될 수 있는,

삶을 대하는 다른 태도에 감탄하게 된다.


남성적 측면만 본다면 조르바는 꽤, 상당히 불편한 인물.

예전 독서모임에서 한 회원이

부부 회원 중 남편에게 '조르바 같다'고 했다가

그 부부랑 대판 싸웠고 그 부부는 더 이상 모임에서 볼 수 없었다.

말한 이는 '자유로움과 삶의 성찰',

그 말을 들은 부인은 '바람둥이'에 무게를 둔 덕분.

'조르바 같다'는 칭찬일까 욕일까.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 P82

내가 찾던 광맥은 바로 이것이었구나! 더 무엇이 필요하랴…. - P262

어둠이 내려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 P264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 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 P328

저항이란 무엇인가? 필연을 극복하여 외부적 법칙을 내부적 법칙으로 환치시키고 존재하는 것을 깡그리 부정하며 자기 정신의 법칙에 따르는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긍지에 찬 돈키호테적 반동이 아닐까! - P388

꺼져 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나는.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 P403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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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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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판타지다.

인간의 머리 위에 수레바퀴가 나타나

빨강과 파랑으로 천국 갈 확률과 지옥 갈 확률을 표현하고

임종의 순간에 '돌려주세요!' 말은 없지만 빙글빙글 돌아가

사후 행선지를 결정짓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초자연적인 현상이 어느날 뜬금없이 생겨난 이후 변화하는 세계,

그래서 부제는 '수레바퀴 이후'.

 

나의 도덕성을 남들이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고,

나 역시 다른 이들의 도덕성을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세상,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해 온갖 종류의 천국과 지옥을 상상하는 세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고 행동과 말에 따라 순식간에 변화하는 확률을 보는 세상에서

대체 올바른 삶, 정의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한다.

 

'정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정의인가'라고 묻는

아주 오래된 질문(작가의 말에서 언급, 플라톤의 <국가>)

올바른 대답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데 파헬벨의 캐논처럼 변주한다.

(여기서 이 명제는 순환논증이라고 콕 찝어 주고 있어 반가웠다.

논리 오류 4 : 순환논리의 오류 포스팅에서 참조가 가능하다.)

 

행위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해야 하나,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 중, 반드시 공공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나,

공공에 대한 사랑이 가족과 자녀에 대한 애정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사후 행선지가 천국일 확률이 높다면 당장의 죽음으로 천국 갈 가능성을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공공선이 아닌가

해롭지는 않지만 정의롭지 않은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수레바퀴 이후의 세상에 대해

주인공 르포 작가가 만나는 이들이

자신의 입장과 직업,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자문자답한다.

 

내가 질문을 더한다면

올바른 삶을 살다 마지막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악인으로 살았지만 마지막엔 생명을 구하며 희생했을 때,

그럴 때 수레바퀴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이런 질문들이 당장은 의미 있을지 몰라도

종국엔 쓸모 없어지는 건,

이런 세상에 아이는 사라지고, 죽음만 남기 때문에

'오늘보다 초라한 내일, 내일보다 볼품없는 모레를 향해 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세계의 다양한 이슈를 언급하는 만큼

아이들과 토론할 주제를 여럿 찾을 수 있겠다.

다만,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

'정의로운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주 오래된 질문으로 통한다.

 

TMI : 이 책은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이다.

박지리 작가는 <합체>,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등을 출간했으나 31세로 생을 마쳤다.

'한국 문단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박지리 작가의 뜻을 이으려 시작한 문학상 공모전'이 박지리 문학상이다.

 

바퀴가 막 발명되었을 때 지구에는 700만 명의 인간이 있었다.

덕분에 수레바퀴의 출현은 진짜 바퀴의 발명만큼이나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연봉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에 갈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 자기 계발서를 읽고, 유망한 주식 종목 대신 도덕의 토대에 대한 이론을 공부한다. 자본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요구가, 변방에만 머무르던 이론들이 부상하고 있다. - P17

선생님은 가능하신가요? 남의 피해가 아니라 내 피해에 대해서,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상대를 마음 편히 용서한 적이 있으세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수레바퀴가 빨간색이다, 하면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으세요?

- P110

사회에 기여하지 않거나 덜 기여하는 행위는 무가치한가?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는 것 이외의 지향점은 없단 말인가? - P116

각국 정부의 협조만 얻으면 이걸 사회계약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거예요. 검은 수레바퀴를 가진 사람에게 살인 면허를 부여하는 거죠. 이때 살인은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고요. - P149

내가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긍지를 가지지 않는것,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믿지 않고 어느 무엇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사랑과 따스함이 아니라 원칙과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것, 가족을 내버리고 세상을 고민하는 것, 더디 기뻐하고 분노를 참고 돌처럼 무감각한 것, 더 적은 것을 누리고 거기에 만족하는것, 너희를 이 땅에서 치워버리는 것. - P173

그리고 시작되기도 전부터 저물어가는 내일을 위해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초라할 것이고 모레는 다시 내일 보다 볼품없을 것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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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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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은 나와 맞지 않는데

이유는 빨리 읽어내기엔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단어와 문장과 행간을 이리저리 돌리고 돌려야 해서

눈과 머리를 매우 혹사시키는 것이,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런 이유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의무감으로 읽게 되는데

이 책 역시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얇은 분량에 감사하며 손에 들었다.

(그럼에도 왜 읽냐고 물으신다면 재밌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게

결국은 한시대를 풍미한 작가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놓고 첫 문장부터 도발하듯 쓴 글은 오랜만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첫 문장에 이런 사실을 적은 책은 못 본 것 같다.

대부분은 처음엔 그래도 점잖은 척을 하지.)


작가 아니 에르노에 대해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개인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예리하게 탐구한 작가로 젠더·언어·계급 측면에서 첨예한 불균형으로 점철된 삶을 여러 각도에서 지속적으로 고찰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개척해왔다(시사IN 인용)"고 하며 수상의 이유를 밝혔다고.


이 책 역시

자신이 경험한 열정을 감정적 판단을 배제하고 관찰하듯 글을 썼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 열정으로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노벨상 수상 이유와 결을 같이한다고 본다.


제약이 기다림과 욕망의 원인이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멀어지는 열정은 특별하지만 외롭고도 고통스럽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자신을 이렇게 샅샅이 들여다본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열정인가 관찰을 위한 수단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감정의 깊은 흔적과 시간과 경험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 안에 침잠하는

단순한 열정인 건가 하고.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 P10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 P17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언제나’와‘어느 날’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 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 P26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 P32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 P59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 P66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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