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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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구자(先驅者) - 진정한 복수에 관한 소고(小考)

 

 

모리구치 유코 선생님

 

 선생님의 <고백>, 잘 읽었습니다. 특히 살인자를 향해 타이르듯 담담하게 ‘진정한 복수’를 말씀하시던 마지막 장면에선 제 심장마저 서늘해지더군요. 당신은 복수의 진수를 보여주신겁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반면에 “과연 모리구치 유코 선생이 진정한 복수를 한 걸까?” 하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고 하더군요. 유코 선생님의 복수는 반드시 이어지는 복수를 부를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A를 용서했다면 복수의 씨앗은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수란 어떤 대상에 압박을 가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수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말하자면 용서를 통해 복수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판결문을 읽는 판사처럼 한 치의 떨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흔들린 건 저였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의 말을 곱씹을수록 선생님께서 이루신 진정한 복수에 대한 저의 확신은 안개 저 편의 불빛처럼 희미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진정한 복수’라고 말씀하신건 복수에도 레벨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몇 해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벌그룹의 회장이 떠오릅니다. 술집에서 맞고 들어온 아들의 복수랍시고 조폭들을 동원해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 말입니다. 이런 논할 가치도 없는 삼류 복수와 선생님의 그것을 동급으로 놓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저는 차근차근 선생님께서 완성하신 복수의 과정을 되짚어 보려합니다. 복수의 동기, 태도, 방법, 결과에 이르기까지 면밀히 살필 생각입니다. 용서가 진정한 복수라고 외치는 저 무리들의 단호함에 맞서 선생님의 복수가 왜 진정한 복수인지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먼저 복수의 동기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인간은 애정을 품고 있는 관계가 훼손되거나 상실되었을 때 복수를 결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A와 B에게 가혹하리만큼 엄청난 복수를 하셨습니다. 딸 마나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복수의 강도(强度)는 애정의 크기에 비례하는 법이니까요. 저도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로서 세상의 어떤 사랑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만 못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딸아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으니 유코 선생님 당신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더군다나 담임을 맡고 있었던 제자들이 딸아이를 죽인 범인인 것을 알게 됐을 때는 하늘의 해와 달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겠지요. 누가 감히 용서라는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입니까?

 

 다음은 복수를 하는 선생님의 태도입니다. 경찰은 마나미의 죽음을 사고라고 판단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 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수였다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거나 맹렬한 분노를 감당치 못해 범인을 죽여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감정에 붙들리게 되면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섬뜩할 정도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셨습니다. 거기에 용서가 끼어들 틈은 없었습니다. 덕분에 마나미의 죽음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선생님의 복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감정은 드러낼수록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이상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복수의 방법입니다. 복수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정의의 실현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에 사로잡혀 경찰에 신고했다면 ‘진정한 복수’는 물건너 갔겠지요. 내 손을 떠난 복수는 이미 복수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용서에 가깝지요.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A와 B를 법대로 심판하는 대신 은밀하고 치밀한 개인적 제재를 통해 벌함으로써 진정한 복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수의 결과를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복수의 끝이 복수 대상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삼류 복수지요. 복수 대상이 사라진다면 복수는 실패한 겁니다. 갑작스럽게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면 복수하는 자는 심각한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지요. 용서는 복수 대상을 부재케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성공적인 복수는 복수하는 자의 동기를 복수 대상에게 그대로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유코 선생님, 당신은 A가 가장 신봉하던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그의 가슴에 고통을 또렷이 각인시켰으며 A가 삶의 나머지 시간을 당신에게 복수의 칼을 가느라 허비하게 만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진정한 복수’의 선구자십니다.

 

 그런데 유코 선생님, 문득 떠오르는군요. 선생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모든 기억을 지워주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고 외치는 저 무리들의 주장이 옳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의 복수 과정을 다 살펴본 지금, 저는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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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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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이름이 있다. 나도 이름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선친께선 젊은 날 정치에 뜻을 두셨지만 이루시지 못했다. 막내의 이름에 '멀리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으셨다.

내 이름에는 선친의 안타까움과 소망이 공존한다. 

 

 사람들은 이름을 함부로 짓지 않는다. 이름은 삶을 만들어가는 단서, 정체성의 근원 설화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명소를 찾기도 하고 사전을 들고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힘겹고 어려운 지난 삶이 혹 이름때문은 아닌지 의심하다가 개명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름에는 '다른 사람과의 구별' 이상의  의미가 있다. 

 

 '라일라'는 <황금 물고기>(르 클레지오)의 주인공이다. 라일라는 대여섯 살에 유괴되어 밤에 랄라 아스마에게 팔려온다. 랄라 아스마는 라일라가 밤에 왔기 때문에 '밤'이라는 뜻의 '라일라'라고 이름 지어준다. '라일라'라는 이름은 라일라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라일라의 진짜 이름은 희미하고 흐릿한 몇 개의 기억으로는 도저히 밝힐 수 없는 어둠 속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라일라는 언젠가 누군가가 진짜 이름을 말해 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라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분명히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머리 속이 하얗게 된다. 누구도 답해 주지 않는다.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라일라와 다르지 않다. 처음과 끝을 모르는 시원의 어딘가에서 갑자기 유괴되어 지구라는 별로 팔려 온 것은 아닐까? 떠나야 한다. 두려움은 진짜 이름을 찾는 여정 속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라일라는 감방의 죄수가 탈옥하듯 떠난다. 그녀의 유년은 랄라 아스마의 저택에 감금되어 있었다. 무자비하게 행해지는 폭언과 학대에서 공포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 공포는 진짜 이름을 찾을 때 자취를 감출 것이다. 진짜 이름을 찾는 날이 자유의 날이 될 것이다. 라일라의 여정에 놓여진 것들은 그녀를 노리는 수많은 그물과 올가미들 뿐이다. 인신매매었다가 도망친 흑인 여자 아이 앞에 놓여 있는 삶은 고단하고 비루한 현실이다.

 

 10대의 라일라는 긴 여행을 한다. 아프리카  힐랄 부족에서 모르코로 유괴된 후 에스파냐,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까지 이른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난다. 만남과 떠남을 반복하는 그녀의 여정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자신을 가두려는 사람들로부터의 도피라고 해야겠다. 아니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주라고 해야겠다. 아니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정처없는 방황이라고 해야겠다. 아니 자유에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던 대장정이라고 해야 옳겠다. 

 

 라일라가 만난 사람들은 직업, 신분, 인종, 국적, 나이, 성(性), 이름이 제 각각이다. 그들 중에는 라일라를 가두고 지배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또 지배 문명에서는 소외되었던 아프리카인들, 집시들, 아이티인들, 인디언들도 있다. 라일라의 여정에 꼭 필요한 것을 베푸는 사람들은 문명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알게된 세네갈 출신의 엘 하즈 할아버지는 죽은 후 라일라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남긴다. 엘 하즈는 병으로 죽은 손녀 마리마 마포바의 이름으로 된 여권을 준다. 엘 하즈는 라일라에게 '이름과 여권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

 

 또한 프랑스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던 엘 하즈의 손자, 하킴은 라일라를 아프리카 박물관에 데려가 아프리카의 역사를 들려주고 니체와 흄과 로크와 라 보에티의 글을 읽게 하고 마침내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건네준다.- 알제리 혁명의 대명사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은 민족과 국가의 탈식민주의를 넘어 개인의 해방인 '존재의 탈식민지'까지 분석해 낸 책이다 - 라일라는 역사와 철학, 특히 프란츠 파농 위에서 그녀의 새 이름을 짓는다. 라일라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라일라는 자신의 땅, 힐랄 부족의 땅으로 되돌아 왔지만 예전의 라일라가 아니다. 숱한 떠남과 만남 속에서 라일라는 마침내 '다른 이름,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다. 성의없이, 함부로 지어진 캄캄하고 어두운 이름 '라일라'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빛난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 읽었던 책, 듣고 연주했던 음악이 자유라는 물고기의 반짝이는 비늘이 된 것이다. 이름이 삶을 만들기도 하지만 라일라처럼 삶이 만들어 내는 이름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인류의 근원에 대한 의문도 결국 '이름 찾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무수한 개인이 했을 이 질문. 그럼에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이름은 왜 이토록 빈약할까? 모두 다른 이름을 가졌는데도 같은 의미로 들리는 것은 또 왜일까? 라일라의 이름 찾기 여정을 통해 우리는 알지 못했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만난다. 식민의 경험을 가진 서구가 오만하게 내버린 소수 피지배 민족들의 이름을 되찾을 때 인류라는 이름의 의미가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져 하나의 완전한 이름으로 만들어 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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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제국의 발견 -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사회 이야기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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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첫 장에는 수 초동안 지구상에는 7억 마리의 개미가 태어나고 5억 마리의 개미가 죽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많은 개미가 태어나고 죽어도 나는 개미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공원의 풀 섶에서, 길거리의 보도블록에서, 심지어 집 안에서 수없이 개미와 마주쳤지만 마주친 그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개미가 구축한 땅 속 세계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 편의 영화때문이었다. 1998년 드림웍스社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개미(Antz)>를 보면 여왕개미, 수개미, 일개미 외에도 전투개미, 유모개미 같이 분화된 직군이 묘사되어 있다. 또 다른 개체군끼리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진딧물을 사육해 단물을 얻어 마시는 장면도 나온다. 무척 흥미로웠지만 그땐 그저 어느 정도의 과학적 사실 위에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것이라고 여겼다.

 

 최근에 읽은 최재천의 <개미제국의 발견>은 그러려니 생각했던 개미 사회에 대한 나의 흐릿한 지식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바꾸어 놓았다. <개미제국의 발견>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과학적 사실을 그들(과학자)만의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친절한 설명과 수많은 사진을 곁들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나아가 개미사회에서 관찰한 사실과 현상을 인간 사회의 경제, 문화, 정치와 대비시켜 과학적 지식에서 삶의 지혜를 들여다 본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며 '실화보다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고 했는데 과연 <개미제국의 발견>은 어떤 소설이나 다큐멘터리보다 재미있다. 1984년 이후 개미를 연구해온 저자의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미제국의 발견>은 3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개미사회의 경제, 문화, 정치가 그것이다. 개미사회의 경제를 펼치면 개미들의 분업제도가 인간이 이룩한 고도의 공장 경영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버섯농장을 경영하는 잎꾼개미나 깍지벌레를 사육하는 레몬개미 이야기를 읽을때는 인간을 뛰어넘는 농축산의 역사에 입이 떡 벌어진다. 개미사회의 문화로 넘어가면 더욱 놀랍다. 개미는 페르몬을 통해 지능적 의사소통을 하며 해와 별을 방향지표로 삼아 집으로 돌아온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사는 개미는 방향을 틀 때마다 각도를 측정하고 계산해 두었다가 먹이를 구하면 일직선으로 집으로 달려간다니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개미사회의 정치는 어떨까? 개미사회는 기본적으로 여왕개미에 충성하는 일개미들로 똘똘 뭉친 전체주의적 왕국이다. 하지만 여왕개미의 여왕물질이 약화되면 일개미들이 알을 낳기도 하고 군락의 변방이나 굴 속 어느 한 방의 입구를 막고 자기들끼리 알을 낳기도 한다. 여왕개미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사회적 갈등'이 존재한다. 또 신생국가를 건설하는 여왕개미들이 서로 협동해서 제국의 초기에는 공생하다가 제국의 기초가 다져진 이후에는 하나의 여왕자리를 놓고 피비릿내나는 암투를 벌이기도 한다. 심지어 붉은색의 아마존개미는 다른 종의 개미굴에 쳐들어가 번데기를 납치해 노예를 삼기까지 한다고 하니 <개미제국의 발견>을 읽은 후에 다시 보는 개미는 도저히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저자 최재천 교수는 요즘 '통섭'의 학자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개미제국의 발견>은 저자의 과학대중서 데뷔작으로 1999년 출간됐고, 이후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호모 심비우스>, <과학자의 서재>, <통섭의 식탁> 등 저서, 번역서, 편저, 공저를 합해 50여권의 책을 냈다. 뿐만 아니라 EBS 특강,  초청 강연,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개미제국의 발견>이었다. 그의 책, 특강, 강연, 인터뷰에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개미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이니 개미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학문 분야와 벽을 허물고 섞이는 '통섭'을 계속한 결과 그는 개미와 동물의 행태연구를 넘어 인간의 경제, 환경, 정치, 교육, 복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마치 한 마리의 여왕개미가 오랜 세월 이룩한 개미제국을 연상케 한다.

 

<개미제국의 발견>은 개미가 구축한 놀라운 제국을 속속들이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순수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성찰하게 하며 결국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라(잠언 6장 6절)" <개미제국의 발견>을 읽고 나면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개미에게 가서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부지런함 말고도 한 두 가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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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의 거짓말 - 워렌 버핏의 눈으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말하다
최경영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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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고 싶어하든 말든 뉴스는 끝임없이 밀려든다. TV의 화면과 신문의 지면은 24시간 내내 뉴스를 토해낸다. 심지어 인터넷은 그 수많은 뉴스를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우리는 뉴스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의심해보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뉴스의 양과 전달 속도 때문에 문자 그대로 새로운 ‘뉴(new)스’로 내몰린다. 그렇다하더라도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이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한다면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나의 순진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9시의 거짓말>은 “한국 언론, 너는 진실을 보도하고 있는가?”라며 프롤로그를 연다. KBS 시사보도 영역에서 주로 활동한 저자 최경영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MBA과정도 이수할 만큼 경제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언론계 종사자인 저자가 표제에 ‘거짓말’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한국 언론에 칼을 겨누는 이유가 뭘까?

 

 저자는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할 자유를 박탈당한 현실이 통탄스러’워서, ‘우리 사회 언론의 가치관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책을 시작했다고 한다. 상징 조작을 통해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하고, 기계적 중립으로 거짓과 위선의 농도를 희석시키고, 추정과 편견을 사실인양 앞자리에 앉히고, 진실 보도는 외면한 채 돈 되는 보도를 우선하며 권력과 기업의 입장만 대변하는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저자는 한국 언론의 몰상식 하나를 비판할 때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자본가 워렌 버핏의 상식 하나를 대비시킨다.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확인되고 검증된 것에만 투자하며 탐욕을 쫓아 버블을 만들어내는 월 스트리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워렌 버핏. 그가 말하는 기업의 본질 가치와 한국 언론의 진실을 등가로 본 저자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세계 최대 자본가의 상식이 진실을 추구한다는 한국 언론의 상식보다 훨씬 효용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무대에서 환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서커스단 코끼리에겐 무대 뒤편에서 채찍과 당근을 들고 서 있는 조련사가 있다.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자본의 단맛과 권력의 쓴맛 앞에서 주저하며 조련사의 의제(議題)만 세팅한다면 서커스단 코끼리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9시의 거짓말>은 독자를 무대만 바라보며 진실의 반쪽만 아는 관객에서 진실의 전부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하도록 의식화시킨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면 관공서의 깃발이 다림질 한 듯 쫙 펴진 채 휘날린다. 언론이 저 깃발 같아야 하지 않을까?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분명히 정체를 드러내는 깃발. <9시의 거짓말>은 한국 언론의 몰상식 위에서 대중을 향해 진실을 외치는 아우성이며 기성 언론에 날리는 불화살이다. 이 작은 불화살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진실된 ‘자유 언론’의 불을 일으켜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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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 - 간디학교 교장 양희규의 '행복한 작은 학교' 이야기
양희규 지음 / 가야넷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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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토요일(2012. 5. 12.) 청소년 인문학 읽기 동아리 아이들과 <죽은 시인의 사회>(피터 위어, 1989)를 봤다. 고등학교 시절 봤던 이 영화를 무려 20년이 지나서 다시 본 것이다. 그때의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2012년 지금의 교육 현실이 그때와 다를 바 없어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덩달아 눈을 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라스트 신이다. 닐 페리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떠나는 키팅을 향해 아이들은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던 키팅의 수업을 기억한 듯 책상 위로 올라가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하지만 마음 속에선 영사기가 계속 돌아간다. 아이들은 아련해지는 ‘카르페 디엠’의 메아리를 가슴에 묻은 채 제자리에 앉아 교장의 답답한 시(詩)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키팅의 수업은 학교의 전통(?)을 넘지 못했다.

 

 좋은 선생은 있어도 좋은 학교는 없는 것일까? 학교에서 배움의 즐거움과 삶의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면 그곳을 학교라 할 수 있을까? 우리 교육이 꿈, 희망, 아름다움, 자기 발견 같은 인생의 중요한 모든 가치를 희생시켜 겨우 얻는 것은 무엇인가? 겨우 극소수의 물질적 성공-대학 입시, 좋은 직장, 결국 돈-아닌가? 우리는 학교를 떠나 비참한 현실과 황폐한 일상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질문하기 시작한다. 학교에 대하여, 배움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꿈에 대하여, 성공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배움은 의문과 질문에서 시작된다. 학교는 학생이 질문하고 선생이 답하며 함께 배우는 곳이다. 질문을 잊는 순간 인간이 가진 상상력과 창의력은 아침에 자욱했던 안개가 햇살을 만난양 사라져버린다. 맞다. 과거에도 지금도 소위 학교라 불리는 곳은 끊임없이 듣는 곳이지 질문하는 곳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학교, 변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있을까?

 

 도서관에서 학교와 교육에 대한 책을 뒤적거리다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선구자로 불리는 양희규 간디학교 설립자의 <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을 찾아냈다. 양희규는 서문에서 이 책은 ‘아이들이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교육 이야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원천에 관한 이야기, 진정한 행복을 탐구해 온 삶의 기록’이라고 했다. 외고나 특목고, 하버드나 스탠포드 같은 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의 공부법, 그런 아이들을 길러낸 부모나 선생들의 교육법이 끝없이 쏟아지는 대한민국에 간디학교 이야기는 퍽 신선했다.

 

 저자는 자기의 학창시절의 일화들을 하나 하나 소개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1학년 과학시간에 ‘집 앞 담벼락 햇살이 왜 뒷동산의 햇살보다 따뜻한지’ 질문했다가 무시당하는 장면, 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시(詩)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말했다가 면박을 당하고 다음 수업에 참고서에 있는대로 대답해서 칭찬받는 장면, 고등학교 3학년 화학시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원자의 모양을 선생님은 어떻게 아는지’ 묻는 장면. 그 어떤 장면에서도 제대로된 답을 얻지 못한 저자였지만 대학, 대학원, 유학시절 내내 삶의 행복에 대해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질문 끝에 스스로 답한 것이 바로 간디학교다.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오늘부터,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진정으로 자기의 전 생애를 걸고 몰두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몇 번의 시도만으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찾을 때까지 발견할 때까지 노력을 계속 해야 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좀 더 명확하게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한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 50p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정교한 이론을 만들거나 심지어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여 그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관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어떤 문제들을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 <월든>(헨리 데이빗 소로) 중에서

 

 1997년 경남 산청에서 시작된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은 저자가 그루터기 선교회에서 배운 교육원리와 간디의 삶에서 건진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교사와 학생간의 사랑, 가능한한 무한히 주어지는 자유, 스스로 먹고 입을 것을 버는 자립과 육체 노동의 기쁨, 진리를 따르는 단순한 삶, 공동체의 행복 같은 것들이다. 이름하여 ‘사랑과 자발성의 교육’을 추구한다.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에는 아이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새겨져 있다. 아이들에게 자연과 자유를 되돌려 주기만 하면 그 속에서 놀면서 행복한 삶을 배울 것이라는 믿음이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좁은 교실, 작은 책걸상에 온종일 앉아서 10년이 넘도록 수업을 듣는다. 신이 허락한 자연과 놀이를 빼앗긴 채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어린 시절을 그렇게 지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사랑할 수 있는지, 나에게 어떤 종류의 삶이 맞는지 생각해볼 기회도 잃어버린다. 내가 경험한 불행한 학교 생활 속으로 내 아이의 등을 떠밀 수는 없다. 성공하면 행복한 삶이 아니라 행복하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학교를 다닐 때 한번도 학교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건만 아이의 학교와 공부에 대해, 삶과 행복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사실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더욱 중요한 것은 청소년 시절의 행복은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위해 희생한 청소년기의 행복이 언젠가는 보상되리라고 믿는가? 그런 생각은 인생의 중요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년기의 행복, 청소년기의 행복, 성인의 행복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며 결코 과거의 불행을 현재의 행복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 (2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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