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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홈즈의 사무실, 오후6시 즈음)
왓슨 : 이보게, 홈즈 아직 멀었나? 난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네. 점심을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떼웠네.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홈즈 : 이제 이것만 정리하면, 자, 다 됐네. 여섯시 조금 넘었군. 자네가 그렇게 시장하다니 어서 나가세. 내가 맛있는 저녁을 사지.
왓슨 : 지금은 뭐든 먹을 수 있네. 삼겹살이든, 해물탕이든, 자장면에 탕수육이든 뭐든 좋아. 뱃가죽이 등에 붙어 버렸거든.
홈즈 : 사무실 맞은 편 골목에 오삼불고기를 기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네. 거기로 가세.
왓슨 : 오삼불고기, 생각만해도 입 속 가득 침이 고이는군. 오징어와 삼겹살에 매콤한 양념을 넣고 불판에 익힌 다음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으면...
홈즈 : 바로 저길세. 식사때만 되면 길게 줄을 서서 먹을만큼 인기가 있네. 오늘 저녁엔 아직 줄이 없군.
왓슨 : 어이쿠, 그래도 식당 안은 거의 꽉 찼는데...음..냄새가 좋아.
홈즈 : 자, 저쪽 빈 자리에 앉자고.
왓슨 : 허, 홈즈, 입구 쪽을 보게. 자네 말이 맞구먼. 이제 막 줄을 서기 시작하는데. 운이 좋았어.
홈즈 : 여긴 따로 주문이 필요없어. 메뉴가 오삼불고기뿐이거든.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바로 음식이 차려진다네. 이것 보게, 벌써 불판이 나오는 군. 워낙 장사가 잘 되는 집이라 말이야, 식재료도 신선하다네.
왓슨 : 벌써, 다 익어가는 걸.
홈즈 : 천천히 많이 먹게.
(식사가 끝나고 커피전문점에서)
홈즈 : 왓슨, 오삼불고기는 맛있던가?
왓슨 : 하하, 알면서 뭘 그렇게 물어보나. 정말 잘 먹었네.
홈즈 : 하긴 한마디 말도 없이 입에 쌈을 쉴새없이 밀어넣더구만. 그리고 가족들에게 맛 보이려고 5인분이나 포장을 했으니...알만하네. 그건 그렇고 내가 음식 값을 계산하는 사이, 자네 주인 아주머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데...
왓슨 : 아, 그거. 어떻게하면 그렇게 맛있는 오삼불고기를 만들 수 있는지,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지 물었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더군. 여기 이렇게 받아 적은 종이도 있어.
홈즈 : 오삼불고기 레시피구만. 어디 볼까?
왓슨 : 여기 있네.
홈즈 : 음, 그러니까 오징어 한 마리, 삼겹살, 떡볶이용 떡, 양파, 양배추, 대파에 갖은 양념을 넣어 잘 버무린 다음 불판에 구워 상추, 깻잎에 싸서 먹으면 되는구만.
왓슨 : 그렇지, 아주 쉽지?
홈즈 : 그런데 말이야 왓슨, 갖은 양념이 뭔가?
왓슨 : 갖은 양념은 뭐 고추장, 간장, 설탕, 고추가루, 마늘로 만들었겠지.
홈즈 : 왓슨,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먹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인이 그 비법을 쉽게 이야기해 줄 것 같나? 우리가 오삼불고기를 만들기 위해 자네가 적어온 식재료를 다 준비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아주머니가 말한 '갖은 양념'을 만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될걸세.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지만 전혀 다른 맛을 낼 거란 말이지.
왓슨 : 하기야 그렇겠지...그렇지 않다면 너도 나도 스스로 만들어 먹을테니까.
홈즈 : 뭐, 너무 실망하진 말게. 오삼불고기가 먹고 싶을때마다 그 식당엘 가면 되니까 말일세. 이제 지난 주에 읽었던 책 이야기 좀 해볼까?
왓슨 : 그러지, 손현주 작가의 <불량가족 레시피>네.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홈즈, 묘하게도 자네 말을 듣다보니 이 책에 대한 통찰이랄까, 영감이랄까 뭐 그런게 떠올랐네. 오삼불고기 레시피, 불량가족 레시피 하다보니까 말이야...
홈즈 : 하하, 그 친구 무슨 영감이 떠 올랐길래 그렇게 묘한 미소를 짓나?
왓슨 : 홈즈, 그러니까 말이지, 자네는 <불량가족 레시피>에서 여울이의 가족이 '불량'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홈즈 : 내 생각에는 그들이...
왓슨 : 홈즈, 잠깐만. 자네는 직업이 직업인 만큼 벌써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네만. 필 받았을 때 말일세.
홈즈 : 그렇게 하게, 재밌을 듯하네.
왓슨 : 자, <불량가족 레시피>에 나오는 여울이의 가족을 하나 하나 보자구. 먼저 주인공 권여울. 17세, 소원여고 1학년이네. 엄마는 나이트클럽의 댄서. 혼외자로 태어났네. 나중에 다시 얘길 하겠지만 보통이 넘는 아이지. 다음은 여울이의 할매네. 생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손자, 두 명의 아들을 뒤치닥거리하고 있어. 할매의 나이는 무려 여든 셋일세. 예순 셋이 아니라 여든 셋.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픈 삶의 역사가 있네. 이제 여울이의 아빠. 이 자는 제일 불량한 이력을 지녔어. 두 여자와 결혼했고 한 여자와 동거했네. 그때마다 아이들을 낳았고.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인사지. 여울이의 삼촌이라는 사람은 명문대를 졸업한 투자전문가네. 하지만 거듭된 투자 실패로 투자자들을 피해 도망다니다 결국 뇌경색으로 신체 마비가 와 버렸어. 아내와는 위장 이혼을 했지만 지금은 진짜 이혼이 되어버렸네. 지금은 밥만 축내는 식충이... 여울이의 오빠는 중학교때부터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네. 스물 한 살 청년이 기저귀를 차고 다니네. 내성적인데다 병약하고 소심하지. 언니 유나는 열 아홉의 고3 수험생이네.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 진학은 꿈도 못꾸고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채권추심 하청업을 돕고 있지. 홈즈, 숨이 차네.
홈즈 : 나도 책은 읽었네만 여울이, 할매, 아빠, 삼촌, 오빠, 언니의 이력을 자네 입으로 다시 들으니 참 기가 막히는군. 뭐 이런 가족 구성이 다 있나. 한 집에 사는 게 기적이네.
왓슨 :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완전 막장 드라마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고 말이야. 한 사람 한 사람을 뜯어보니 정말 가관이고 <불량가족 레시피>란 제목이 딱 들어맞더군.
홈즈 : 그런데?
왓슨 : 그런데 말이야, 홈즈. 그 가족이 불량스런 맛을 내는 건 그들이 과거에 만들어 온 삶의 이력과 태생도 한 몫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았지.
홈즈 : 그래? 뭔지 어서 말해 보게. 뜸 들이지 말고.
왓슨 : 그건 바로 '말'일세.
홈즈 : 말?
어려서부터 할매는 나만보면 '송장 칠 나이에 똥 걸레 빨게 한 년'이라는 소리를 거침없이 밷었고, 그런 잔소리와 타박은 나를 이 집에서 겉돌게 만들었다. <불량가족 레시피> 14p~15p
"그게 다 타고난 어머니 팔잔데 어떡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속 썩이는 자식을 둔 것도 능력없는 남편 만난 것도 어머니 복이라고 생각하고..." 삼촌이 머릴 감싸고 소리를 빽 질렀다. <불량가족 레시피> 25p
갑자기 언니가 내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아야, 뭐야?" "일어나, 이년아! 내가 미쳐 정말!" 왜 아침부터 지랄이야!" <불량가족 레시피> 73p
"가시나야, 퍼뜩 죽어라. 어려서 술 많이 처묵으면 빨리 죽는다 카더라.(중략) 나중에 지 엄마맹키로 유흥가로 빠질라 카나." <불량가족 레시피> 76p
"네가 술꾼이냐! 이제 겨우 열일곱뿐이 안 된 년이 어디 할 짓이 없어 술 처먹고 새벽까지 싸돌아다녀!" 불곰의 큰 손이 우악스럽게 내 얼굴을 쳤다. <불량가족 레시피> 84p
"그러니까 우리 집에는 나 말고 일하는 인간이 없는 거네. 다 큰 자식은 허구한 날 빌빌대서 응급실에 실려가지를 않나, 동생이란 놈은 대갈통 맛이 갔다는 핑계로 뺀질거리질 않나" <불량가족 레시피> 124p
"너도 나가, 새끼야! 다 필요 없어. 그렇게 술 처먹지 말라고 일렀건만 애비 소리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사람 구실 못할 거면 나가 죽어, 이 새끼야..." <불량가족 레시피> 126p
왓슨 : 이 가족의 비밀은 그들이 지금 서로에게 내밷는 '말'에 있다는 뜻일세. 그들이 하는 대화를 잘 살펴보게, 홈즈. 그들의 대화는 부정적인 말이 빗발치는 전쟁터네. 서로의 가슴을 향해 날리는 치명적인 독설과 폭언을 보게. 한 마디 말로도 사람을 죽게 할 수 있고 마음 속 깊은 곳에 한을 품게하고 복수의 칼을 갈게 만들지. 하물며 그게 일상적이라면 더 말해 뭣하겠나? <불량가족 레시피>를 읽는 동안 내 혀 끝에서 느껴졌던 불량스런 맛. 그 맛을 낸 갖은 양념이 바로 욕설, 저주, 비난, 한탄, 원망이 뒤섞인 그들의 말이었던 게야.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馬]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마음대로 부립니다. 배를 보십시오. 그렇게 큰 배가 강풍에 밀려 다녀도 항해사는 아주 작은 키 하나로 그 배를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현대인의 성경> 야고보서 3장 2~5절
홈즈 : 왓슨, 대단해. 그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몸을 성장시키듯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을, 특히 청소년을 성장시키지. 인간은 타인의 말 속에서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일수록 영향력은 커지지. 짐작했겠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은 바로 가족일 수 밖에 없네. 가족은 출생 공간일 뿐만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씻고 자는 생활 공간이기도 하네. 이 공간 안에서 축복, 감사, 위로, 격려, 지지, 인정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은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네. 성장기의 아이들에겐 더욱 치명적이네.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도 없지. 자신감이 없으면 대인관계도 소극적으로 되고 말이야.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네.
왓슨 : 홈즈, 역시 자네가 더 정확하게 짚어주는군 그래. 여울이도, 할매도, 아빠도, 오빠도, 유나도, 삼촌도 똑같은 뉘앙스로 내밷는 말이 있네. '내 마음을 몰라 준다' 라는 것이지. 가족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이 말들이 참 가슴 아프더군.
도대체 할매는 내가 왜 그러는지에 대한 탐구가 없다. 마음을 살피려 하지 않고 행동의 결과만 볼 뿐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18p
"느그들이 에미 힘든 거 알아주기를 하나, 배꼽잡게 웃겨 주기를 하나." <불량가족 레시피> 20p
"그리고 너, 한 번이라도 아빠 입장 생각해 봤어? 맏딸이면서 말이야." <불량가족 레시피> 93p
"아버지가 내 맘 한번 알아준 적 있었어요? 따뜻한 위로 한번 했냐고요? 내 나이에 기저귀 차고 다니는 심정 알기나 해요?" <불량가족 레시피> 126p
여울이는 자기 가족을 '불쌍한 영혼의 집합소'로 '삼류인생들의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어. '불량'을 '좋은'으로, '불쌍'을 '행복'으로, '삼류'를 '일류'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두말할 필요없이 '말'을 바꾸는 것이겠지.
홈즈 : 왓슨,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가출도 나를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말을 바꿀 수 없으면 당분간 부정적인 말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볼 필요가 있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몸으로 현실에 부딪히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건 무척 힘들어. 하지만 그 힘든 현실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 걸세.
갑자기 삼촌이 다시 보였다. 몸까지 성치 않으면서 혼자 힘으로 살아 내려는 노력이 눈물겨웠다. 자식에게 떳떳하기 위해 24시간을 주유소에서 지내는 그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불량가족 레시피> 165p
왓슨 : 음, 가출이 아주 부정적이진 않다?
홈즈 : 성인들의 경우는 어느 정도 괜찮지. 하지만 청소년들의 가출은 반대네.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너무 취약하네. 여자 아이들에겐 더욱 취약하고.
왓슨 : 여울이의 경우는 가출 안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지. 물론 가출을 꿈꾸는 아이지만 말이야. 끝까지 아슬아슬 했네만.
홈즈 : 여울이는 특별한 가정 환경을 가진데다 17세의 여고생이니 방황은 당연하겠지?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됐는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기 마련이네. 감추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기도 하겠지? 할 수만 있다면 변신이라도 하고 싶지 않겠나?
왓슨 : 허허, 이제야 자네 본격적으로 여울이를 조명하겠다는 뜻이구만. 시작해 보게, 홈즈. 여울이의 변신이야기 말일세.
홈즈 : 눈치챘군. 왓슨, 내가 모자, 안경, 콧수염 같은 걸 변장하고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신하는 이유는 의뢰받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일세. 그런데 여울이가 코스튬플레이 동호회에서 발표를 위해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 건 그 목적이 좀 다른 것 같더구만. 현실에서 나로 살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기때문에 만화나 영화 속 캐릭터가 되는 것이지. 여울이의 변신은 두 가지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네. 하나는 숨기기 위해서지.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라네. 다른 하나는 드러내기 위해서지. 남에게 보이고 싶은 것, 알려졌으면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네. 왓슨, 자네 의사로서 할 말 없나?
왓슨 : 그런 변신을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겠지. 변신의 두 목적 사이에서 여울이는 부조화를 경험해야 하네. 뿐만 아니라 현실 상태와 변신 상태의 불일치에 침묵해야 하고.
홈즈 : 그렇군. 하지만 여울이는 변신을 통해 없던 자신감이 생기고, 관심을 끌고 인기를 얻으면서 존재감을 느낀 모양이네. 요즘 청소년들이 개인 블로그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자신을 대신하는 캐릭터, 즉 아바타를 만들어 성장시키는 방법 대신 여울이는 직접 만화나 게임의 캐릭터로 분장하는 코스튬플레이라는 방식을 택했네. 동화처럼 직접 마법을 걸 수 있었다면 여울이는 영영 영화 슈렉의 '피오나 공주'로 살아 가고 싶었을 걸세. 하지만 변신은 또 다른 변신을 부르기 마련이며 이 캐릭터, 저 캐릭터를 전전하다보면 결국 천의 얼굴을 가지게 되네. '나'로 살고 싶어 시도한 변신이 '나'를 완전히 없애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지. 다행스럽게도 여울이는 코스튬플레이를 통해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법, 나로 살아가는 법을 깨닫게 되지.
이런 우스꽝스로운 분장을 하면서 자신감이라는 것도 얻었다. 습관처럼 달고 다니던 우울함도 조금은 떨칠 수 있었고, 엄마의 빈자리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고마워, 코스튬플레이! (중략) 이제 진짜 용기를 내 출가한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생각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194-195p
왓슨 : 홈즈, 여울이가 코스튬플레이 동호회에서 덤으로 얻은 게 하나 더 있네.
홈즈 : 자네, 오늘 말이 척척 나오는 군.
왓슨 : 그런가? 여울이가 불량스런 말의 홍수를 헤쳐갈 희망의 뗏목. 그건 책이었네. 코스튬동호회에서 좀 생뚱맞게 40대의 아줌마, 마리아를 만나잖나. 그녀는 여울이에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지.
홈즈 : 음, 기억이 나는군. 여울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서 천사 미하일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답을 내놓는 장면이 흥미로웠네.
미하일은 세몬과 살면서 그 질문의 답을 얻는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랑때문에 산다는 게 그 답이었다. (중략)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불량가족 레시피> 103p
왓슨 : 하지만 여울이가 마리아 아줌마와 톨스토이의 작품에 대해 나누는 장면, 구속된 아빠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영치해 주는 장면을 떠올려 보게. 여울이는 미하일의 답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걸세. 희망적인 이야기가 필요했던 여울이에게 좋은 선물이 된 셈이네.
홈즈 :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가 마리아 아줌마를 통해 여울이와 독자에게 전달된 건 좀 아쉬웠네. 왜냐하면 뭐랄까 작가가 끼여든 느낌이었어. 내가 보기에는 여울이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어른에 대한 신뢰가 없네. 할매, 아빠, 얼굴도 모르는 엄마, 학교 선생님, 매점 아저씨 등과 관계를 봤을때 말이야. 그래서 좀더 자연스러운 인물을 매개로 제시되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왓슨 : 일리가 있는 말일세. 그래도 청소년 소설의 지평을 넓힌 건 분명하네. 대부분의 청소년성장소설이 입시, 왕따, 학교 폭력, 이성관계 등 진부한 소재를 활용하네만 <불량가족 레시피>는 특별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몰락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가족의 재기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 코스튬플레이를 긍정적으로 소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홈즈 : 하여간 여울이는 가정 형편상 방황을 많이 하네. 나이트 클럽에 가서 술도 마시고, 공부보다는 코스튬플레이에 더 관심이 많고, 학교에서 식권도 위조해서 팔아먹었다가 들켜서 곤혹을 치르고,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고백했다가 딱지 맞고... 등등. 왓슨, 난 말이야, 청소년 시기의 방황이 한 개인의 연대기에서 신화(神話)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네. 당장 현실이라서 아프지만 시간 한겹 두겹 쌓이게 되면 언젠가는 과거의 일이 되기 마련이네. 신화가 뭔가? 국가 탄생의 태몽아닌가. 신화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리내려 역사의 굳건한 반석으로 존재하네. 신화가 없는 그리스와 로마를 상상할 수 있나? 신화가 없는 민족은 돌아갈 땅이 없는 짚시와 진배없네. 평생 끝나지 않는 여행을 하다가 종내는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지. 방황이 넓고 깊을수록 아름다운 신화가 탄생하는 법이라네. 인류사가 처음부터 역사시대로 시작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나. 들려줄 신화가 없으면 무척 쓸쓸할 걸세. 청소년기의 방황은 인생이라는 장엄한 연대기의 신화네.
왓슨 : 큭큭.
홈즈 :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왓슨?
왓슨 : 여울이 할매 있잖나. 정말 경상도 사투리 맛깔나게 쓰더군. 그 할매도 시간이 지나면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니 우스워서.
홈즈 : 여든 셋의 할매와 열 일곱 소녀의 동거. 여울이가 몇 살까지 살 지 모르겠지만 결혼해서 애 하나만 낳아봐도 할매가 신화 속의 영웅보다 더 위대했다고 엉엉울며 고백할걸세. 대단한 할매야.
왓슨 : 11시가 넘었군, 나가세.
홈즈 : 조심해서 들어가게, 오삼불고기 잘 먹고.
왓슨 : 오늘 고마웠네. 또 연락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