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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하던 1995년, 나는 잊을 없는 경험을 했다. 하도 충격적인 일이어서 처음엔 꿈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4월 5일 식목일, 기상 시간도 오전 6시에서 7시로 1시간 늦춰진 휴일이었다. 다들 곤히 잠들어 있던 새벽, 갑자기 내무반과 복도에 불이 켜지며 비상이 걸렸다. 눈[雪]때문이었다. 강원도에 눈이 지겹도록 많이 온다는 건 지난 겨울을 지나면서 알게 됐지만 '설마' 4월에 눈이랴, 하고 침구을 정리했지만 연병장은 '정말' 하얀 눈을 가득 품고 우리를 맞았다.
경남 김해에서 줄곧 자라온 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절기상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는 물론 경칩(驚蟄)과 춘분(春分)까지 지난 4월에 눈이라고? 김해에서는 겨울에도 보기 힘들었다. 20대 초반까지 눈 오는 날을 본 건 손에 꼽는다. 눈 오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기념 촬영을 했다. 밥그릇에 설탕을 두어 숟가락 넣고 깨끗한 눈을 가득 퍼 담아 빙수(氷水)라며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완연한 봄이라고 생각했던 4월의 눈은 꽃샘추위의 영역이 얼마만큼 확대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후로 나는 우리나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뚜렷한 건 맞는 말이지만 계절의 경계는 허물어 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봄의 한 가운데서도 꽃샘추위가 불쑥 불쑥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가을이 되어서도 '인디언 서머'가 더위를 몰고 오는 것처럼, 뚜렷한 사계절 속에 뜻밖의 계절이 엄연히 존재한다.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으면 4월에 눈이 간혹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리라.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나의 주변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사유하게 만든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4월에 만난 눈같았다. 우리 역사 속에 뜻밖의 역사가, 그리고 엄연한 역사가 쓰여지고 있음을 목격했다.
<검은 꽃>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韓人)들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김영하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역사 자료를 1차 자료로 하여 허구를 덧입혔다. 전형적인 팩션형 소설이다. 대한제국의 몰락,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 멕시코의 내전과 혁명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김영하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역시 김영하라고 할만큼 흡입력이 대단하다.
책을 덮는 순간 여러가지 이야기가 머리 속에 폭죽처럼 터졌다. 조국을 떠난 선조들의 삶,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과 약탈, 같은 민족 사이라도 끊임없이 충돌하는 개인들의 삶, 남녀의 사랑과 그 유한성,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선택, 꿈과 삶과 죽음의 허무함...슬프고 아프고 화나고 허탈하고 여러 감정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애니깽들의 삶을 살아 본 것처럼 나도 모르게 몰입했었나 보다.
하여간 <검은 꽃>이 내게 질문을 해왔다. 첫번째, '당신은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가?' 대한제국을 선택한 적이 없는 조선의 백성들은 어느날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대한제국의 한인들은 1905년 멕시코로 건너왔지만 1910년 원하지 않는 일본인이 되었다. 국가의 행위가 모든 국민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되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모든 인류에게 면죄부가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처럼 말이다.
요시다가 돌아서는 이정을 잡았다. 참, 이제 너도 일본인이야. 그러니까 너의 행적도 우리로서는 모두 보고 사항이야. 아고 있게지만 멕시코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1910년부터 모두 일본인으로 국적이 바뀌었어.(중략)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검은 꽃> 260p
조국이 없어진 멕시코의 한인들은 멕시코 내전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병이 된다. 40여명으로 구성된 용병들은 마야문명의 한복판에 신대한(新大韓)이라는 국가를 건설한다. 하지만 뿌리가 없어진 나무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전투중에 전멸하지만 김이정에게는 자신만의 논리가 있었다.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검은 꽃> 306p
대한민국 건국 6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묻는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죽는 것이 자랑스러운가? 자랑의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해도 이 나라는 감사의 조건들은 갖추고 있다. 내가 누리는 풍요로운 현재는 이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과거가 기반이기 때문이다.
<검은 꽃>의 두번째 질문, '역사는 반복되는가?' 최근 정부의 주요 복지코드는 출산장려정책과 다문화정책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문화관련. 다른 지역도 외국인들이 많겠지만 김해에는 외국인 등록인구가 1만 5천명이다. 불법외국인들까지 합하면 3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도 있다. 50만 인구에서 3만명이라면 6퍼센트다. 적지 않다. 베트남, 중국, 우즈베키스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중에는 결혼이주여성들도 상당수 있다.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들어 다른 나라로 이주했던 것처럼 그들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먹고 살기가 괜찮아진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농장주가 노예들을 수탈하듯, 양반이 하인들 위에 군림하듯, 기업주들이 외국인노동자들을 착취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들을 대하는 시민들의 꺼려하는 태도도 그들의 가슴에 상처를 준다. 우리 스스로 퇴보된 역사를 현재로 가져오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잊고 역사는 잊어도 역사를 기억하는 개인은 있기 마련이며 이들은 삭제된 파일을 복원하는 프로그램 엔지니어들처럼 역사의 진실을 복구하는 힘이 있다. 동남아의 아시아인들이 한국을, 적어도 김해를 아름다운 기억과 역사의 공간으로 그들의 문학 속에 그렸으면 좋겠다.
<검은 꽃>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문학의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잊어버린 개인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비록 애니깽, 까레이스키, 조센징으로 불리던 우리 선조들의 아프고 비참한 이야기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