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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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를 읽었다. 펼칠땐 건달 이야기였고 덮을땐 어쨌든 왕 이야기였다. 30년간 지역의 건달계를 평정했던 마사오가 어떻게 장원두, 조창용, 박재천같은 아이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됐는지, 또 그 아이들은 어떻게 마사오의 왕국에서 성장했는지, 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보여준다. 마사오의 죽음은 비로소 장원두를 '왕을 찾는 여정'으로 이끈다. 장원두의 오래된 기억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부풀려진 소문들을 비집고 다니다 보면 우리 각자의 왕을 만나게 된다. <왕을 찾아서>는 나와 당신의 유년에서 가장 빛나는 왕의 유품을 발굴해낼 수 있도록 돕는다. 비록 유년의 유물이 시간의 켜에 묻혀 장년에 이르면 용도가 전혀 다른 유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그것이 왕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만 한다면. 기억과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해도.

 

내가 여섯 살이던 여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선친께서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은 책.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 100권과 세로글쓰기로 된 철학인문서 100권. 아버지의 얼굴도, 웃음소리도, 따뜻한 손길도 너무 아득해서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나로서는 남겨진 책을 보면서 선친을 그려보곤 했다. 그나마 때때로 어머니와 내 손 윗 형제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었다. 어린 자식들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은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고 꼭 저축하라' 였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를 책과 저축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내 인생 첫번째 왕의 통치지침이며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을 버릴 마음이 없다.

 

왕의 법령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게 여전히 유효하다. 왕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군림(君臨)한다.

 

지리적으로 화와이는 미국 본토와는 뚝 떨어져 있다. 거리상으로는 캐나다와 멕시코가 미국의 영역에 포함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캐나다는 캐나다, 멕시코는 멕시코일 뿐 미국과는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위치상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본토와는 고립된 섬이지만 화와이 여전히 미국의 영역이다. 국가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통치권의 도달 여부다. <왕을 찾아서>의 장원두가 지역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지난 5년 동안 지역에는 발걸음 한 번 하지 않았다 해도 마사오의 통치는 유효하고 장원두는 마사오의 백성이다. 어떤 장소가 되었든 왕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이라면 혹 왕이 부재중-부재의 기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해도-이라 하더라도 왕의 영역이다. 내가 왕을 부정하고 멀리 떠난다고 왕국의 영역을 벗어날 순 없다. 심지어 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새 왕이 된 자 조차도 이전의 왕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조창용처럼 마사오를 힘으로 제압했다고 해서, 박재천처럼 마사오를 이용해서 제 욕심을 채운다고 해서 마사오의 백성마저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왕을 선택하는 것은 왕에게 있지 않고 백성에게 있다. 그런 백성들에게 새 왕의 통치력이 미칠 리 없다. 백성의 마음은 말할것도 없고. 죽은 마사오가 산 박재천을 능가하는 이유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니 사람이 없으면 다스릴 백성이 없는 것이고 백성이 없는데 왕은 무슨 왕. <왕을 찾아서> 290p

 

무엇이 왕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어쩌면 욕망이?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에 어장이 형성되는 것처럼 왕이 되고 싶은 욕망과 왕을 모시고 싶은 욕망의 경계에서 수많은 왕의 신화가 산란되고 있는 건 아닐까? 

 

먹장구름 빗 속을 뚫고 맨발로 달려가 알현하려 했던 왕이 빈 왕좌만 남겨둔 채 어디로 갔단 말인가? 표지의 빈 왕좌에 좌정할 수 있는 왕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스스로 이미 인생의 주인이며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왕이 필요하다. 인생의 바다에서 북극성처럼 반짝이며 항로를 이끌어 줄 왕, 사라져도 군림하는 왕을 찾아 나서자. 어디가 되었든 왕이 있는 곳은 눈부시도록 화창할테니까. 

 

고개 정상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지역은 여전히 회오리 바람과 함께 피어오르는 비안개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은 눈부시도록 화창하다. <왕을 찾아서> 3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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