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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쥐
이은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오후1시, 왓슨이 난처한 표정으로 홈즈의 사무실로 들어선다)
홈즈 : 어, 왓슨. 퇴근 시간도 아닌데 어쩐 일인가?
왓슨 : 홈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들렀네.
홈즈 : 급한 일?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서류 봉투 말인가?
왓슨 : 어어, 그렇지.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함세.
홈즈 : 그렇다면 오늘은 자네가 내 의뢰인이군, 하하.
왓슨 : 그러니까 말일세. 이게 뭐냐하면 한국 추리소설 영문판 완역본이네. 아직 영미권에서 출판되지는 않았네. 두 주 전이었지. 한국의 출판저작권 에이전트 미스터 리에게서 작품 검토 부탁을 받았네.
홈즈 : 자네에게? 하긴 자네는 내가 해결한 수많은 사건들을 흥미롭고 긴장감있게 독자에게 소개했으니 그럴만도 하겠군.
왓슨 : 바로 그걸세. 그걸 믿고 내게 부탁을 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어. 오늘 아침에서야 숨을 돌리고 있는데 이 봉투가 책장 한 쪽 구석에 쳐박혀 있는게 보이지 않겠나. 이틀 뒤면 이메일로 회신을 해야 하는데 나 혼자서 검토 의견을 내놓기는 시간이 촉박하지 뭔가. 한 부 복사해서 가지고 왔으니 자네가 도와주게.
홈즈 : 한국 추리소설이라, 정말 흥미롭군. 한국에도 추리소설이 있단 말이지? 특정 국가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없네. 미안한 얘기지만 아시아권에서 추리소설이라면 단연 일본이니까 말이야.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 정도가 내가 아는 아시아 추리작가네. 모두 일본 작가들이고. 뭐 하여간 지금부터 읽어보도록 하겠네. 의뢰인께서 그토록 부탁하시니까, 하하.
왓슨 : 고맙네. 오늘 저녁은 내가 약속이 있으니 좀 어렵고 내일 저녁에 다시 들를테니 그때 얘기하세.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추리소설 왕국이라는 일본에서 2009년에 출간됐네. 참고하라구.
홈즈 : 그래? 어디 보자. <미술관의 쥐>라...
<다음날 저녁, 왓슨이 다시 급하게 들이닥친다>
홈즈 : 이 친구 참, 뭐가 그리 급한가? 서두른다고 검토 결과가 뚝딱 나오나? 맘 편히 가지고 이리 와서 앉게. 자, 여기 물 한 잔 마시며 목부터 축이게.
왓슨 : 고맙네, 홈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니 혹 일을 그르치게 될까봐 맘 졸이게 되는군 그래. 지금부터 저녁 내내 자네와 얘기한 걸 정리해서 내일 회신하려면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는 다 틀렸겠지?
홈즈 : 뭐 꼭 그렇지는 않을걸세. 자, 거기 접시에 놓인 빵과 과일도 먹게.
왓슨 : 그러세. 이제 좀 진정이 되는군. 시작해 볼까, 홈즈.
홈즈 : 왓슨, '이은'이라는 이 한국작가 말이야. 다른 작품도 있겠지? <미술관의 쥐>도 꽤 수작이긴 하지만...음, 왓슨, 자넨 <미술관의 쥐>를 읽어보니 어떻던가?
왓슨 :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네. 자네와 내가 등장하는 셜록 홈즈 시리즈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군. 먼저 소재가 아주 독특했어. 미술관, 화가, 큐레이터,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림이 있지. 그림도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더군. 대표적으로 등장한 그림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파의 거장 조르조네의 '템페스타'였고.
홈즈 : 맞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소재로는 독특했지.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소재라고도 할 수 있지. 만약에 작가가 그림이라도 동양화를 선택했다면 영미권의 우리에겐 좀 낯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네. 또 칭찬할만한 게 있나?
왓슨 : 물론일세. 작품 전반에 큰 물줄기처럼 흐르는 주제의식이네.
홈즈 : 주제의식?
왓슨 : 추리소설에서 무슨 주제의식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 읽는동안 긴장과 스릴 즐기면 추리소설은 역할은 다했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미술관의 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제가 있네. 그건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 박길용 관장이 김준기와 만나는 첫장면부터 미술작품을 투자의 대상으로만 보는 경매장에서 양누리와 강윤희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거쳐, 변재범 실장이 형사 강정수에게 돈이 예술이라고 떠들어대는 장면을 지나, 김준기와 양누리가 박길용 관장의 마지막 칼럼 '미술관의 쥐'를 읽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박길용 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준기를 바라보았다.(중략)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중략) "자네가 말한 대로네. 예술 말일세. 그냥 자네가 좋아하고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지." <미술관의 쥐> 16-17p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술계에 전문적으로 몸담고 있는 사람이건 단순히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고 봐요. 바로 예술이요. 예술 그 자체요. 그런 게 점점 없어져가요......" <미술관의 쥐> 122p
변재범은 김정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예술이 뭡니까?" "뭐라고?" "김 형사가 생각하는 예술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요." (중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은 뭔데?" "자본 아니겠습니까?" <미술관의 쥐> 258p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 예술을 시작할 때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바로 예술이니까요. 예술은 뭐 대단하고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순수의 회복, 그게 바로 예술입니다. <미술관의 쥐> 280p
홈즈 : 그렇군. 주제의식... 자네가 <미술관의 쥐>에 대해 호평을 했으니 난 비평을 좀 해볼까하네. 그렇다고 혹평을 하려는 건 아니네.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네.
왓슨 : 오, 궁금해지는군. 들어볼까?
홈즈 : 왓슨,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은 독자의 호기심을 연료로 작동하네. 제목을 보고 몇 장 넘기면 하나 둘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이 터지지. 그 지점부터 독자는 끊임없이 궁금증으로 꽉 찬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네. 범인이 누구인지, 범죄는 어떻게 저질렀는지, 왜 저질렀는지, 추리의 단서는 무엇인지, 어떻게 사건이 해결될 것인지 하면서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지.
왓슨 : 그렇지. 그런데?
홈즈 : 어쩐 일인지 <미술관의 쥐>는 이런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고 치밀하게 자극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네. 띄엄띄엄 자극하는 것 같더군. 왜일까? 생각해 보았지.
왓슨 : 답이 나오던가?
홈즈 : 그건 독자의 질문에 일목요연하게 답하며 사건을 이끌어 가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네.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추리를 전개해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성실하게 독자에게 보여주는 인물말일세. <미술관의 쥐>에서는 김준기와 양누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약하단 말이지. 독자는 형사 김정수, 미술전문기자 오진환까지 초점에 잡아두어야 하네. 번거롭지. 돋보기의 초점이 분산되면 불을 일으킬 수 없듯이 시선이 분산되면 추리의 응집력 현저히 떨어진다 것, 자네도 알고 있겠지.
왓슨 : 그렇게 볼 수도 있구만. 근데 홈즈, 그건 자네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우리 이야기를 독자에게 보여줄 때 언제나 자네를 중심으로 삼았네. 이 때문에 우리 독자는 누가 범인인가?에 주의를 모으고 홈즈 자네가 어떻게 추리해서 사건을 해결하는지에 집중할 수 있어. 하지만 <미술관의 쥐>는 좀 다르지. 우리의 이야기가 사건과 추리 중심-누가? 어떻게?-이라면 <미술관의 쥐>는 주제-왜?-가 중심이네. 탐정이나 형사가 핵심인물이 아니지. 자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네.
홈즈 : 음, 그래도 퍼즐을 한 사람이 맞춰나갔으면 좋았을텐데... 임팩트가 약하단 말일세. 김준기나 양누리 말고 오진환 기자가 적격이었네. 미술전문기자로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데다 예의 날카롭고 치밀한 논리로 사건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었을텐데 말일세.
왓슨 : 허, 자네 무척 아쉬운 모양이군.
홈즈 : 또, 자네는 주제의식을 잘 드러냈다고 했지만 난 오히려 그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인물과 구성이 성기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네. 변재범 실장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왜 자본이 예술이라고 주장하게 됐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네. 나영호, 강윤희 팀장이 왜 변재범과 공모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폭력조직과 변재범은 어떤 루트를 거쳐 한 통속이 되었는지 연결고리가 느슨하네. 오진환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면서 그 전모를 밝혀가던 때 갑자기 경찰에 넘기게 되는 장면도 이해하기 어렵네. 기자라면 치열한 기자의식과 특종에 대한 애착이 있었을텐데 말이야.
왓슨 : 듣고보니 일리가 있군, 홈즈.
홈즈 : 독자의 가독성을 저해하는 논문의 삽입도 눈에 거슬리더군. 너무 길었네.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템페스타'의 용을 설명하기위해 논문을 통째로 인용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박진감을 반감되더니 이야기의 속도가 확 떨어졌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꽉 막힌 시내로 진입한 느낌이었어.
왓슨 : 나도 그 부분은 좀 지루하더군. 작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독자는 인내심이 부족한 거고.
홈즈 : 왓슨, 주제를 더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이건 어땠을까?
왓슨 : 뭔가?
홈즈 : 독자는 변재범과 그 일당이 범인인 줄 알지만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진 채 마무리되는 거지. 윤후 화백과 오진환은 여전히 실종 상태로 처리하고 변재범 일당은 수사를 비웃으며 정로미술관에서 아랑곳없이 근무하는 걸 보여주는 걸세. 작가가 예술계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면 내 방법이 독자에겐 더 설득력을 얻지 않았을까?
왓슨 : 이 작품의 긍정적인 면도 있었겠지?
홈즈 : 물론이네. 자네도 언급한 독특한 소재와 뛰어난 주제의식이 대표적이겠지. 그리고...<미술관의 쥐> 자체가 '템페스타의 용'이라는 추측도 해봤지.
왓슨 : 뭐라고?
홈즈 : 자네, 박길용관장이 김준기에게 '그림 속에 답이 있다'는 암시를 한 것, 기억하지?
왓슨 : 물론이네. 그게 나중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됐지.
홈즈 : <미술관의 쥐>가 하나의 암시네. 작품은 자본이 득세하고 순수성을 잃어버린 예술계의 현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네. 추측건대 작가는 예술계의 내부고발자가 될 수도 있었을걸세. 언론에 터뜨릴수도 있었겠지. 납치되어 감금당한 채 부인의 가짜 그림을 그렸던 윤후 화백이 사용했던 방법을 작가 이은도 사용한 거네. 전문가가 아니면 의식하지도 못하는 점을 찍는 방법. 예술계의 사람들이 <미술관의 쥐>를 얼마나 읽을까마는 예술계 내부의 썩은 부위를 아는 사람이 읽게 된다면 뜨끔 뜨끔하지 않겠나?
왓슨 : 그럴듯한데 홈즈. 그렇지. <미술관의 쥐>는 미술, 음악, 문학 등을 아우르는 예술계 전체에서 충분히 '템페스타의 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는걸.
홈즈 : 왓슨, 어서 가서 정리하게. 그리고 그 출판저작권 에이전트에게 이은의 다른 작품도 보내달라고 부탁해보게. 미래가 더 기대되는 작가라는 말도 덧붙이고 말이야.
왓슨 : 알겠네. 즐거웠네, 홈즈. 숙제를 끝낸 기분이야.
홈즈 : 참, 왓슨. 자넨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