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4
김시천 지음 / 책세상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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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너무 흔들려서 책보기가 좋질 않다. 버스에선 바깥구경 아니면 잠이다. 근자 기차를 이용할 일이 많아져서 덕분에 책볼 일이 한결 많아졌다. 그동안 사모아놓기만 하고 읽기를 게을리했던 <책세상문고-우리시대>는 상하행 왕복이면 한 권씩이 떼져나간다. <책세상문고>는 알차고, 개성 넘친다. 그래서 풍성하고 신선하다. 막 떼넘긴 30대의 동양철학자 김시천이 지은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시대의 노장읽기> 역시 그러하거니와, 개인적으로는 '철학' 일반의 정체 하나를 확연히 밝혀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 철학은 그 자체로 근원적·본질적·일반적인 무엇이었다. 말하자면 '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또한 그 개적(皆的)들의 몸에 걸쳐진 '옷'일 수 있다는 사실, 혹은 가능성을 나는 이 책에서 읽었다. '철학이고 싶어하는' 무엇이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다. 요컨대, <도덕경>과 <장자>가 철학에 못박혀 읽히지 않고 다르게, 가령 정치학적으로 읽히는 건 훼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무게를 벗어나면 자유는 코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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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5-09-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에 흥미를 보이실 것 같다는 생각을 초장에 했었는데요....
대문 글귀를 보니까, 저도 얼렁 나이 들고 싶어졌습니다. ^_____^

책먹는하마 2005-09-0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밝히지 않은 '불편한 것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ㅜ.ㅜ
김시천의 이 책 안에, 한때 도올의 강의를 대놓고 비웃었던 사람에 대한 한줄짜리 언급이 있는데, 그걸 보고 새삼스레 지은이의 자세가 참 바르다는 생각을 했었죠. 치우침이 없는 사람이라야 하나를 제대로 팔 수 있는 법이고, 그래야 모름지기 철학이 가능하지 않나, 몰라요.^^

유리블랙 2005-09-0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양과목 선생님인데 ㅋㅋㅋ 아직 정식 수업은 안했지만, 정말 기대중이예요//

책먹는하마 2005-09-0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블랙님, 정말 훌륭한 선생님께 배우시는군요...^^
 
피터래빗 저격사건 랜덤 시선 5
유형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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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황지우의 [연혁沿革]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산문시였다. 이제 그 '가장 멋진 산문시'의 목록에 한 달여 전에 첫시집을 묶어낸 유형진의 한 시가 새로 등재되었거니와 강력한 기세로 황지우의 데뷔작을 밀쳐내 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 황지우의 [연혁]과 엇갈리는 점도 많고 맺어지는 점도 많은 이 시의 시적 성취에 대해서는 이제 차차 전문가들이 나설 터이고,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이끌 때 시는 그에게 그의 한계를 상기시킨다(When power leads man toward arrogance, poetry reminds him of his limitations)" 라고 했던 존 F. 케네디의 말을 신뢰하는 나로서는 지금 유형진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오만의 반대편에 슬프도록 아름답게 서 있다는 사실만 기릴 뿐이다. 기실, 산문시란 이야기를 찾는 자의 오만에 먹이는 시인의 강력한 펀치라는 사실은 접어두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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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8-07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참 예쁜 시예요? 그죠? ^^

책먹는하마 2005-08-1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적(雪滴)님의 거의 강요수준의 "그죠?"에 대한 답:

예쁩니다. 그리고, 깊기도 하고요. 예쁘면서도 깊이를 갖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누가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는가?
그레고리 E. 펜스 지음, 이용혜 옮김 / 양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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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브라질에서 반실불수의 한 여자가 자신에게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뇌에 이식한 지 5일만에 정상적으로 걷게 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YTN참조). 또 얼마 전엔 유엔 주재 하에 이른바 '복제 과학'에 타격을 줄만한 논의가 있었고, 또 외계 지성체의 인간창조설을 믿는 라엘리안이 주도하고 있는 '인간복제'에 찬성하며 자신이 복제되기를 강력하게 원했던 헐리우드의 한 영화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이 책, [누가 인간복제를 두려워하는가?]는 21세기의 유전학을 넘어서서 사회, 종교, 철학, 문화, 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짐작되는 '인간의 복제'를 가장 급진적으로 지지하는 과학자의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복제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관심이 없다. 이 무관심은, 가령, 신이(든 외계의 과학자든)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 피조물인 우리의 조상이 그 '제작행위'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 태도다. 아주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인간복제의 윤리성을 문제삼는 것은 마치 백신(Vaccin)의 윤리성을 문제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의 아이를 잉태한 성처녀와 무성생식에 의한 시험관 아이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는지를 과학이 아니라 윤리의 잣대로 잰다는 것 - 이것이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종교적, 영적' 전쟁을 유발시키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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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부터의 해방
이베타 게라심추쿠 외 지음, 류필하 외 옮김 / 자인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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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쯤 전일까, 내 기억이 완전히 잘못된 게 아니라면, 영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체육관에 작가들을 불러놓고 노트북을 한 대씩 나눠준 뒤 24시간 동안 소설 한편씩을 쓰게 했다. 제출된 소설들 중에서 스포츠경기에서 하는 짓같이 1,2,3등을 뽑아서 상을 주고...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좀더 세련된, 그리고 좀더 범위를 넓힌 '글 시합'의 결과물이다. 괴테의 고향 바이마르 시당국은 1997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는 '에세이 콘테스트'의 공고를 냈고, 1999년 전세계 123개국의 2,480명에 이르는 내로라하는 학자와 작가들이 응모를 했는데 - 1년에 걸친 심사가 끝난 뒤 발표된 1등상 수상자는 놀랍게도 러시아의 스무살짜리(1979년생) 여대생이었던 것. 이베타 게라심추쿠의 [바람의 사전Dictionary of winds] ; 실재와 가공을 마술하듯 뒤섞으며 써내려간 그녀의 에세이는 이 책의 부제로 쓰인 '세계 지성이 펼치는 시간에 관한 지적 유희'에 딱 부합하는 듯보인다. 시간과 관련된 단어를 제시하고 그것을 '유희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녀 고유의 것이라 하기 힘들지만 그 해석만큼은 충분히 독창적이었던 것. 가령, '총각바람'이라는 단어의 다음과 같은 해석: "러시아에 있는 셀리게르 호수에서 부는 바람. 밤이 되어도 잠잠해지지 않는다."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을 들춰보는 재미 중의 하나는 각각의 작품 앞에 붙어 있는 1위부터 10위까지의 등수와 그 등위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따져보는 것. 개인적으로는 8위를 한 미하일 엡스타인의 [시간의 살인]에게 금메달을 주고 싶었는데 "미래는 문법 없는 언어이고, 꿈이 없는 무의식이다. 미래는 다시, 또다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무언가 순수한 것이다." (p.127)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도 드물 거라는 판단이었는데... 10위 안에 두 명의 중국인이 들어 있다는 것과 그들의 에세이가 하나같이 동-서양의 철학적 교직에 값한다는 사실은 세계화 운운하는 자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이유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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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1-2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맞아요, 이런 책이 있었어요! 쿨럭.

책먹는하마 2004-11-2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럭~이라면, 감기? ... '시간'만큼 또 많은 책에서 주제로 다룬 것도 없을 텐데, 이 책의 미덕(!)은 그 많은 '시간의 책들'을, 얼마큼은, 아우른다는 점이 아닐까 싶은데...물론 너무 믿었다간...^^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유럽여행
쟌 모리스 지음, 박유안 옮김 / 바람구두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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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든 자신의 이력을 쓸 때 성별을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50년간의 유럽여행]의 저자(쟌 모리스)만큼은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낄 듯싶다.  "1926년 웨일즈에서 사내아이로 태어남. 30세에 [더 타임즈] 기자를 사임하고 여행기 전업작가로 나섬. [베네치아], [스페인], [옥스포드] 등의 여행에세이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팍스 브리타니카] 3부작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룸. 1964년 이후 8년에 걸쳐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하는 수술을 받고, 46세의 나이(1972)에 쟌 모리스라는 여인으로 거듭남. 성전환 후에도 왕성하게 여행기를 집필함. 웨일즈에서 자신과의 사이에 다섯 아이를 낳은 과거의 아내를 '파트너'라고 부르며 자매처럼 지내고 있음." 이 책 [쟌 모르스의 50년간의 유럽여행]은 제임스 모리스와 쟌 모르스의 합작품이다. 어떤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구별되는 거라면, 이 책은 두 개의 성적 시선이 하나가 되거나 혹은 교직되는, 그래서 '중성적'이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묘한 책읽기를 경험시킨다. 가령, 그가 여자가 된 뒤의 어느 해(1980년대) 오리엔트 특급 안에서 채록한 세 개의 에피소드들은 이 경험을 지극히 날것으로 제공한다.

* 한 미국 아주머니가 다른 여인에게 얘기한다. "나는 늘 말이죠, 내 아이는 마마보이로 키우지 않겠다고 얘기했답니다. 저 사람 어머니가 애를 그렇게 키웠거든요." 그녀가 고개짓으로 옆자리의 자기 남편을 가리켰다. 기차는 덜컹대고 수프 숟가락이 달그락거리고, 그동안 두 부인이 문제의 그 남편을 쏘아본다. "베네치아 가면 우리 저 남자 아는 척도 하지 맙시다." 아내 되는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p.389-390)

* 신혼여행 중인 듯한 젊은 앵글랜드 여인이 말한다. "우와! 저 성 좀 보세요. 정말 아름답죠?" 젊은 잉글랜드인 남편은 "그거 성이잖아. 성은 성이지 뭐. 성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라며 면박을 준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눈치이고, 그는 방해 당했던 스릴러 소설 읽기를 다시 시작한다.(p390)

* 한 미국인 사내가 내게 말한다. "이 책 꼭 읽어보세요. 런던에서부터 계속 이 책만 읽고 있어요. 책 제목이 [하느님이 나의 사장]이지요. [하느님이 나의 사장], 그게 제목이구요. 저자는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가게 높은 데다 '주님이 나의 관리인'이라고 써붙여 두었다네요. 인스부르크 도착 시간이 언제죠? 거기서는 햄버거를 살 수 있겠죠?"(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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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1-2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에 대한 히스테리증자[대개 여자]의 주된 질문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면 강박증자[대개 남자]의 경우엔 "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라던, 라캉의 말이 뜬금없이 생각납니다...

책먹는하마 2004-11-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은 남근과 성기를 구별했지요. 남근은 기표고 상징이니까 여자가 상실한 건 남근이 아니라 성기일 뿐이라고 그러지요. 신경증은 결국 남근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건데, 그런 점에서 쟌 모리스 같은 이는 결코 신경증 따위에는 시달리지 않을 듯...^^;;

레드페퍼 2005-06-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네요. 으~ 리스트에 넣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