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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부터의 해방
이베타 게라심추쿠 외 지음, 류필하 외 옮김 / 자인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십년쯤 전일까, 내 기억이 완전히 잘못된 게 아니라면, 영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체육관에 작가들을 불러놓고 노트북을 한 대씩 나눠준 뒤 24시간 동안 소설 한편씩을 쓰게 했다. 제출된 소설들 중에서 스포츠경기에서 하는 짓같이 1,2,3등을 뽑아서 상을 주고...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좀더 세련된, 그리고 좀더 범위를 넓힌 '글 시합'의 결과물이다. 괴테의 고향 바이마르 시당국은 1997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는 '에세이 콘테스트'의 공고를 냈고, 1999년 전세계 123개국의 2,480명에 이르는 내로라하는 학자와 작가들이 응모를 했는데 - 1년에 걸친 심사가 끝난 뒤 발표된 1등상 수상자는 놀랍게도 러시아의 스무살짜리(1979년생) 여대생이었던 것. 이베타 게라심추쿠의 [바람의 사전Dictionary of winds] ; 실재와 가공을 마술하듯 뒤섞으며 써내려간 그녀의 에세이는 이 책의 부제로 쓰인 '세계 지성이 펼치는 시간에 관한 지적 유희'에 딱 부합하는 듯보인다. 시간과 관련된 단어를 제시하고 그것을 '유희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녀 고유의 것이라 하기 힘들지만 그 해석만큼은 충분히 독창적이었던 것. 가령, '총각바람'이라는 단어의 다음과 같은 해석: "러시아에 있는 셀리게르 호수에서 부는 바람. 밤이 되어도 잠잠해지지 않는다."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을 들춰보는 재미 중의 하나는 각각의 작품 앞에 붙어 있는 1위부터 10위까지의 등수와 그 등위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따져보는 것. 개인적으로는 8위를 한 미하일 엡스타인의 [시간의 살인]에게 금메달을 주고 싶었는데 "미래는 문법 없는 언어이고, 꿈이 없는 무의식이다. 미래는 다시, 또다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무언가 순수한 것이다." (p.127)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도 드물 거라는 판단이었는데... 10위 안에 두 명의 중국인이 들어 있다는 것과 그들의 에세이가 하나같이 동-서양의 철학적 교직에 값한다는 사실은 세계화 운운하는 자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이유가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