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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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선택하는 자가 처한 것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사려깊고, 면밀히 통찰하고, 뒤집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더욱 명료해지지 않으면 자살의 문제를 쓸 수도,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간곡한 어조로 읊조리는, 얇지만 무거운 책. 자살의 고전인 에밀 뒤르켕의 <자살론>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딛고 가기를, 혹은 이미 건너갔었다면 되돌아와 디디고 가기를 권하고 싶은 책. '앙리 미쇼' 전공자라는 저자의 이력에 끌려(ㅆ긴 했지만  실은 부피 때문에) 흔쾌히 넘기기 시작했다가 얘기 하나하나의 중량에 가슴을 마구 짓눌렸던 책.

다음은 깊고 오랜 사색을 요구하는, 이 책 에필로그의 한 부분이다.(p.84-86)

나는 단 한 번도 자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자살에 관해서는 수도 없이 생각하긴 했지만 말이다. 몇 년 전에 한 젊은이가 안타깝게도 이국에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난 그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보다 약 2개월 전에-아마 2004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일어났던 다른 살인 사건이 생각났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이라크에서 경호 요원으로 일하던 피브리지오 콰트리치가 '예언자의 녹색여단'이란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돼 살해당한 일이 그것이었다. 알자지라가 소지한 피살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면 죽기 직전 복면의 사나이에게 그가 묻는다. 

"도대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답변은 조금은 장황하고 지저분했지만 이탈리아군의 완전철군이 요구라는 요지였다. 그러자 36세의 콰트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아는 철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잘 봐 두어라. 이탈리아인이 어떻게 죽는지 보여주겠다."

그리고 콰트리치는 목 뒤에 권총을 맞고 숨졌다...(중략)...나는 콰트리치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렇지, 이탈리아엔 '영웅적인' 자살의 전통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생각은 '도대체 그가 그런 말을 남기면서 무엇을 구하려고, 혹은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였을까' 하는 데에 머물렀다. 나는 그 장려한 말을 남긴 의미를 아직 모른다. 결정의 순간에 그가 남긴 그 외침에는 확실히 명쾌함과 장엄함이 있다. 한순간 허공으로 한껏 솟구쳐 올랐다가 다음 순간 폭발하여 산산히 흩어져버리는 격렬함도 있다...(중략)...그가 적어도 그 순간에 포기한 것은 몇 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 조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의 마지막 행위가 인간의 비참한 존재 조건을 상기시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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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6-12-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구 싶네요, 당장...

책먹는하마 2006-12-0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림지식총서'는 책세상의 '우리시대'하고 성격이 비슷한데...좋은 책들이 많습니다. 책값이 싼 대신에 볼륨이 너무 얇다 싶어서 아쉬울 때가 있지만...요즘 이른바 논술책이라는 거, 정말 가지수가 장난이 아니던데, 그런 책 열 권보다 이런 문고 한 권이 훨씬 도움이 될 텐데, 하는 생각, 괜히 드네요...^^;;

메모시아 2008-05-2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카야~~
오늘에야 이런 서평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아네요. 것도 심심해서 검색하다가요 ㅎㅎㅎ
전 이 책의 저자입니다
간단하지많은 않은 책을 주의 깊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진홍 드림

책먹는하마 2008-06-24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들어왔다가...

가끔, 저자는 볼까? 보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곤 했더랬는데
좀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네요
근데, 저자의 댓글에 철자 틀린 게 눈에 화악~ 들어온다는...ㅋㅋ
 
질투는 나의 힘 - [할인행사]
박찬옥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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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였던 김현은 시인 기형도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혹해하면서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을 썼다. 그 해설을 통해 김현은 기형도의 시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시를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보기 힘든 괴이한, 부정적 이미지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령, 하늘을 두꺼운 종잇장으로, 태양을 노랗고 딱딱한 것으로 비유하는 이미지”라든가 “서로 엉키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비연대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기형도의 시가 김현에게(더불어 많은 독자들에게)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것은 이러한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뒤에, 아니 밑에,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다보는 개별자,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알려져 있듯이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은 어느새 유명을 달리한 지 10년을 훌쩍 넘긴 기형도의 동명의 시를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가 박찬옥을 움직였다는 것은 연출가 자신이 밝혔듯 분명한 사실일 테지만, 그의 시가 영화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이 간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 전문)


박찬옥은 기형도로부터 ‘질투의 힘’을 빌려오긴 했지만 그 힘의 결과는 기형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자신의 희망이란 결국 모두가 질투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아픈 인식과 함께 그리하여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었다고 고백한 기형도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서른의 나이로 (다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반면, 박찬옥은 영화 속에서 가장 기형도 시의 분위기와 닮은 주인공 이원상(박해일 분)으로 하여금 자신이 맹렬하게 질투하는 대상 속으로 자의적으로 편입하게 만듦으로서 그 질투의 궤를 달리한다. 물론 원상이 기형도의 나이에 이르면 어떻게 될는지는 또 모르는 일이지만, 질투, 혹은 질투의 힘을 읽어내는 박찬옥의 방식에는 기형도의 방식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 내재해 있다. 이건 어쩌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일 수도 있고, 실재한 일과 픽션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해석의 차이라는 건 차치하고라도.


만약, 많은 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을 바라보는 두 사람, 즉 문학평론가 김현과 영화연출가 박찬옥을 비교해 볼 수 있다면 뭔가 더 또렷해질 것 같다. 하지만 김현의 해설에는 기형도의 <질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렇긴 하지만 기형도의 유고시집 권말에 붙은 김현의 해설 전체에 녹아 있는 암울하고 슬픈, 혹은 허무주의적인 기운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그 미루어 짐작되는 것을 한 단어로 뭉뚱그린다면 ‘절망’이다. 생에 대한 모든 철저한 인식은 절망에 이르도록 만든다. 삶에 대한 느슨한 인식만이, 철저하지 못한 인식만이, 절망을 피해가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면밀하게, 그리고 깊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럽고 치사하고 모멸스런, 절망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더럽고 치사하고 모멸스런 삶이 타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서 절망에 이르게 되고, 그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새벽 세 시의 허름한 극장 안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의 삶 혹은 죽음의 방식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기형도의 <질투…>를 보는 김현의 시선이거니와 이때 ‘질투’라는 단어는 ‘반성’보다 더욱 철저하고 처절한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박찬옥이 기형도의 <질투…>를 바라보는 시선도 상당 부분 ‘절망’에 닿아 있다. 적어도 이원상의 경우에는. 하지만 그의 절망은 두 번씩이나 자신의 애인(!)을 빼앗아간 사내와 가까워지도록 만들고, 그를 부러워하게 만들며, 얼마큼 그를 닮게 만들고, 급기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조언을 구하게까지 만든다.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절망은 하지만 죽음은 없다. 이러한 점에서 박찬옥의 <질투…>는 기형도가 선택한(혹은 맞이한) 삶 혹은 죽음의 방식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그것은 한 시인이 걸어간 삶의 행로였을 뿐, 텍스트인 시 그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이건 어쩌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일 수도 있고, 실재한 일과 픽션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고,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현실에선 실제로 일어난단 말이야.” 시인의 질투는 시인을 죽게 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의 질투는 그를 살게 한다. 시인의 죽음은 실재한 일이고, 영화 속 등장인물의 삶은 픽션이다. 일어날 법한 일의 일어나지 않음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의 일어남 - 이 아이러니는 얼마나 진실한가? 시와 영화 중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천하의 우문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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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SE - 비트윈 2disc, 할인행사
미하일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뻬르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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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언쟁을 벌인 뒤 그의 화실을 뛰쳐나온 고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귀를 잘라버린다. 그로부터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여름, 고흐는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는 끔찍한 유서를 남긴 채 서른일곱 살의 시퍼런 생을 마감했다. 권총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던 이틀 뒤였다.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의 <피아니스트La Pianiste>에 등장하는 빈 음악원의 교수 에리카 코후트(이자벨 위페르 분)는 연주회가 열리기 직전 콘서트홀의 로비에서 예리한 단도로 자신의 심장을 겨냥해 찌르고는 죽음을 암시하며 홀로 극장을 빠져나간다. 남자와 여자, 가난한 화가와 교수라는, 성과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흐와 코후트는 닮은꼴이다. 남의 애를 가진 창녀와 2년여에 걸쳐 동거를 한 고흐와 정기적으로 섹스숍을 찾아가 포르노비디오를 보면서 휴지통에 처박힌 낯선 남자의 정액 묻은 휴지를 콧구멍에 갖다대는 코후트 사이에 놓인 거리는 그다지 멀지가 않다. 고흐로 하여금 귀를 자르게 하거나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게 한 ‘무언가’는 코후트로 하여금 면도날로 음부를 자해하게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혹한다. 한 화가의 길지 않은 생을 온통 60도짜리 독주 압생트로 취하게 만든 ‘무언가’와 어린 제자(브느와 마지멜 분)에게 가학적 성행위를 요구하는 한 피아니스트의 변태적 욕망 사이에 차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넓지 않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비정상적이라는 수식어 외에 달리 떠올릴 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이 이토록 가혹한 행로를 걷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정신병원에 가두거나, 그 입구를 서성이게 만드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예술’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제시된 여러 개의 보기 중 하나를 고른 것일 뿐이다. 예술과 관계된 것이 그들을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예술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그들의 발길을 음습한 행로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유별나 보이는 그들의 삶과 평범한 인간의 삶을 가르는 준거로 예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가라고 모두가 그들처럼 난급한 삶의 행보를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범한 인생의 이면에는 반드시 굴곡진 어린 시절이 있다: 통과의례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이 말은, 그러나 자못 위험한 문장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아무런 검증 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상투성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희대의 사상가나 예술가, 혹은 난세의 영웅을 묘사하는 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것이 바로 이 굴곡의 유년이다. <피아니스트>의 코후트 교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녀가 딸에 대한 과민한 집착증을 가진 어머니를 가졌다는 사실은 아집에 사로잡힌 아버지를 가졌던 <샤인Shine>의 소년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을 연상시킨다. 이는 오래 전, 끊임없이 검은 망토를 걸친 아버지의 환영을 보는 <아마데우스Amadeus>의 어린 모차르트로부터 충분히 학습 받은 대목이기도 하다. 이 지나친 익숙함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하나는, 그 익숙함으로 인해 우리는 결국 비범한 인생의 그 비범한 가치에도 익숙해질 것이며, 그래서 그 비범의 진면보다는 이면에 흥미가 집중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천재의 상업적 이용을 부추길 것이고, 천재는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진다는 가치로운 덕목의 상실을 또한 부추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인간의 예술적 소외감이다. 굴곡진 유년과 같은 삶의 이면을 들추어내 거기서 비범한 자의 질료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는 한 평탄한 유년을 가진 수많은 천재는 예술로 상징되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장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이 대목에서 문득 권형진의 <호르비츠를 위하여>가 떠오르는데, 이 따뜻한 드라마가 천재를 그리는 기존의 기법과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천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새롭다.)


고흐, 데이빗 헬프갓, 모차르트, 그리고 에리카 코후트: 이들 삶의 비범함을 형성하는 참된 질료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하나의 답을 고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른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의 보기를 하나씩 선정해 나가는 것일지 모른다. 예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 예술 그 자체, 치열한 삶에의 의지, 독선, 엄정한 고독, 고독에의 의지, 뒤틀린 가족관계, 그로 인한 험난한 유년, 무엇이든 극을 달리는 성정, 척박한 토양과 공기, 절대성에의 두려움, 끊임없는 죽음에의 유혹, 광기……. 보기가 많아지면 질수록 예술적 천재의 비밀은 깊어지고, 마침내 그는 벗겨낼 수 없는 장막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비범한 인생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범하지 않은 인생들의 목마른 입술을 축여주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샘은 파헤쳐졌을 때 말라버린다. 우리에게 샘물인 그 비범한 인생을 형상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늘 상투성으로의 추락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피아니스트>는 올발랐는가를 묻는 일은, 괴롭지만 필요하다. 이때, 바하의 샤콘느가 전편을 휘감는 찰리 반 담Charlie Van Damme의 <바이올린 플레이어Le Joueur De Violon>를 비디오 데크에 꽂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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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 (CD + DVD) - [초특가판], Movie & Classic, Anton Bruckner - Symphony No. 9 D minor (Dem Lieben Gott)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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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던 날, 나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5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일곱 가구 스물다섯 명의 ‘도그빌’ 주민들이 갱단의 기관총에 비참하게 쓰러질 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주춤주춤, 연전 가을의 그 냉소와 굳은 침묵을 기억하면서. 하지만 <도그빌>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 눈에 고인 눈물은 그때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때의 침묵과 냉소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시에 대한 혐오가 가라앉은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혐오가 미국이나 미국인에 대한 혐오로 쉽게 전이되는 ‘불유쾌한 자동장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내 눈에는 왜 눈물이 고인 것일까? 나는 아직 그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도그빌>은 미국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혐오감을 극화한 첫 번째 작품”이라는 사전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 시간 동안 줄곧 내 의식은 미국과 미국에 대한 혐오감의 상징들을 좇는 데 바빴다. 그 분방한 추적은, 연극무대를 끌어온 형식실험과 니콜 키드만(여주인공 그레이스 역)의 ‘아름다운’ 연기, 내레이션을 모두 따라잡지 못하는 자막의 한계 같은 것으로 뻗어가던 생각의 가지를 쉽게 잘라내 버렸다. 그렇게 상징물의 추적에 몰두한 결과 내가 개인적으로 얻어낸 것은, ‘도그빌’이, 유럽의 이민들로 구성된 근대국가로서의 미국을 성립시킨, 그리하여 오늘날 현대의 유일 강국으로서의 미국을 가능하게 한 두 개의 중요한 질료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둘은 톰 에디슨 주니어(폴 베타니 분)로 상징되는 어설픈 지성과 톰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그빌 주민들이 지닌 ‘먹고살기’의 근대적 표현인 노동가 정신이다. 후자는 종종 신성한 노동이나 프론티어 정신과 혼용되기도 한다. 물론 시각장애인 맥카이(벤 가자라 분)의 예술가연한 고독, 빌(제레미 데이비즈 분)의 기술에의 맹목적 경도, 리즈 핸슨(클로에 세비니 분)의 지극히 개인적인 남성혐오 내지 페미니즘, 운송업자 벤(젤리코 이바넥 분)의 후안무치식 상업성, 과수업자 척(스텔란 스칼스가드 분)의 패배적 자연애와 구즈베리숲을 가꾸는 진저(로렌 바콜 분)의 호사가적 자연애도 각각의 질료들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또한 위의 두 개의 질료 속에 제각각 편입되어도 큰 하자는 없다. 이렇게, <도그빌>에서 어떻게든 미국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그빌을 근대(혹은 현대)의 미국으로 상정하는 일은 트리에의 3부작과 관련시켜 보자면 아귀가 맞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트리에 자신이 <도그빌>을 미국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말한 진술 자체는 영화 <도그빌>을 ‘미국에의 혐오’만으로 읽어버리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전제를 던지지 않았을 때 <도그빌>은 인간악의 원류를 치밀하게 탐색하고 있는, 한층 차원 높은 심리적 스릴러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트리에 자신이 인터뷰에서 “도그빌이 미국일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어느 마을일 수도 있다”(시네21, 413호, 47쪽)고 피력하고는 있지만, 그의 이 말은 뻔한 에두름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도그빌>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그빌이 미국으로 못박아놓고 얘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트리에가 3부작의 하나로 만들었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얘기할 것인가 - 이 둘 중에서 아무래도, 전문 평론가들은 차치하고 일반관객들조차, 감상의 무게중심을 전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찜찜함이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여섯 날의 창조를 끝내고 하루를 쉬었을 때, 세상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세상에는 없는 게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잉태의 수고를 담당할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뜯어내 만들어낼 때까지로 창조의 기간을 연장한다면 더더욱 신이 이 세상을 위해 준비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먹을 것과 쉴 곳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과,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진 하루와 그 하루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네 개의 선명한 계절로 대변되는 자연 - 이 둘은 다른 두 개가 아니었다. 삶과 자연은 하나였다. 자연은 결코 훗날 신의 피조물들이 엮어낼, 피와 욕망으로 얼룩지는 ‘커뮤니티’가 아니었다. 신의 자식들의 숫자가 불어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커뮤니티는 단순한 ‘사회’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진화를 거듭해 마침내 ‘국가’를 이루어낸다. 여기서 삶과 자연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신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었지만 그가 만든 인간은 그곳을 ‘영토’라고 이름지어놓고,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호미 대신 창과 칼을 만든 것이다. 적군의 늑골을 찌르는 창과 목을 베어낸 칼을 신전 앞에 내려놓고 신의 은총과 가호를 운운한 것은 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세상에는 더 이상 신이 창조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비열한 것이 바로 ‘국가’였다. 인간은 국가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그 안에서만이 의미 있는 존재였다. 인간이 저지르는 악은 국가에 의한 것이었고, 똑같은 악도 국가를 위해서는 선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그런 국가의 ‘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개였다. <도그빌>의 라스트신에서 하늘을 보며 짖어대던 그 개처럼. 도그빌(dogville)은 문자 그대로 개의 마을이고, 그런 개의 국가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의지 자체를 배신한 그 국가를 불태우고 그 시민들을 총살시킨 그레이스(Grace=은총)는 신의 사자, 혹은 신 자신이다.


사실, <도그빌>의 딜레마를 만들어내는 ‘도그빌’이 미국을 상징한 것이냐 아니냐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영화 <도그빌>에서는 도무지 ‘커뮤니티’의 악 따위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그빌>에는 연민에서부터 사악함까지 골고루 갖춘 스물다섯 명의 ‘신의 자식’들만이 존재한다. 도그빌은 에덴과 다르지 않으며, 그레이스는 ‘선악의 과일’로 명명된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경전이 이르듯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의 형상을 닮게 했다는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레이스 또한 한 대표적 인간이다. 신의 징벌처럼 보이는 그의 마지막 학살은 ‘복수’의 그럴듯한 치장에 불과하다. 그레이스는 도그빌이라는 ‘커뮤니티’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다만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가능성이라는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인 인간들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편입되어 들어왔을 뿐이다. 예수가 미구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인간들 속으로 걸어왔듯이. 하지만 예수는 복수 따위를 하지 않았지만, 그레이스는 이름만 그레이스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빈 라덴’이란 말인가?


영화 <도그빌>은 있지만, ‘도그빌’은 없다. ‘도그빌’은 허상이다. 국가가 허상이듯이. ‘나’는 ‘너’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국가는 그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지만, 국가와의 사랑은 일방적이다. 오직 우리만이 국가를 사랑할 뿐이다. 국가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허상과의 사랑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존재란 상호성을 의미한다. 국가는 일방적이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국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던 케네디의 연설은 독재자의 국가주의적 선동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세계 무역센터의 붕괴와 함께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내가 완강하게 침묵을 지킨 것은 그것이 국가의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인간악의 온상인 미국이라는 국가. 하지만 도그빌의 주민들이 살해될 때 눈물을 흘린 까닭은 그들의 죽음이 개의 죽음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갱단의 기관총에 쓰러지는 그들 가운데서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지 못한 국가를 위해 밤낮으로 헌신하는 한 마리의 개. 간혹 달(허상)을 향해 컹컹 짖어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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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6-11-1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권력)은 왜 폭력(권력)에 의해서밖에 제압당하지 않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게 기억납니다. 물론 그레이스의 마지막 권총에 결코 동감할 수 없었고요. 심성 곱고 예쁜데다 세상 판도를 뒤집을 수도 있는 권력까지 가졌다니 너무하잖아욧! ㅋ

책먹는하마 2006-11-16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복(說伏/說服)이란 말이 있긴 하죠...무척 드물긴 하지만, 최치원이 창 하나 들지 않고 격문으로 반란을 진압했다는 얘기가 설복의 가능함을 증거할 텐데...옛날얘기기도 하거니와, 드라마는 액션 판타지라, 설복을 그려내기가 또한 가능하지 않은 일일는지도...ㅎㅎ...니콜 키드만은 너무 차가워서(조디 포스터보다는 덜했지만) 좋아하질 않았었는데, 도그빌 보고나서 오히려 좋아졌다는 거, 이유가 그레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어쨌든, 라스트 씬 전까지는 천사였으니...-.-;;
 
달콤한 인생 일반판 (2disc)
김지운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두 개의 <달콤한 인생>이 있다. 우선, 1960년 칸에서 대상을 받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고전명작 ‘La dolce vita’가 있다. 제목만으로 보면 그야말로 달콤한 인생이다. dolce는 라틴어로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 김지운이 느와르로 만든 영화의 영어로 된 제목은 ‘The bittersweet life’, 달콤 씁쓸한 인생이다. 플롯과 내러티브, 등장인물과 배경이 모두 판이한 두 영화는 공유하는 제목조차 엇갈리지만 영화의 정조는 dolce와 bittersweet를 한 길로 흐르게 한다. 상류사회의 타락과 막연한 두려움을 흑백화면에 담아낸 펠리니의 달콤함이 감미로운 것도 부드러운 것도 아니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김지운이 펠리니의 제목을 끌어온 것, 그리고 bittersweet라고 붙여놓은 것은 일리가 있는 패러디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장화, 홍련>을 연출했던 김지운은 기왕에 보여준 그 독특함들을 <달콤한 인생>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유명한 선禪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맺는 것이 그렇다. 바람에 버드나무가 휘날리는 장면 위로 선우(호텔 매니저, 조폭 2인자:이병헌 분)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흐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선승에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냐,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냐 물었더니, 선승이 흔들리는 것은 네 마음이라 했다는 그 이야기. 여기서 선승은 달마를 시작으로 이어져온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祖師 혜능慧能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조폭이지만 이 고급한 선지禪志를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다. 흔들리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자신이 모시는 두목의 젊은 애인(첼리스트:신민아 분)을 사랑하게 된 그 마음. 영화는 그의 고요한 비련悲戀을 느와르 특유의 선혈을 뚝뚝 흘리며 진행시킨다. 잔인하고 비열하지만 화면은 아름답다. 그의 사랑은 이해가 가며, 동정을 끌어낼만하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버드나무도 아닌 자신의 마음이라고 시작했으므로, 그것이 선가禪家의 웅숭깊은 화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그의 처참한 복수는 단지 조폭들의 ‘개싸움’이 아니다. 흔들린 마음에 대한 응징이다. 흔든 것들에 대한, 그리고 흔들린 자신에 대한.


흔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바람이 있고, 나뭇가지가 있는 한. 그러나 흔들리지 않을 수는 있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승들이 화두로 삼을 만큼 ‘흔들리지 않음’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무소유를 상징한다. 선우는 가질 수 없는 사랑을 가지려 했으며, 그로 인해 대가를 치른다. 가지지 않았어야 했다. 무소유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그것을 제목으로 삼은 책까지 써냈던 유명한 현대의 한 선승이 쓴 인도여행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인도여행기는 이상하게도 ‘목욕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점철된 고단한 여행의 기록처럼 읽혔다. 이것이 오독誤讀이 아니었다면 그의 무소유 화두는 풀리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3천년 이전의, 무소유를 실천해낸 한 철학자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개 같은 학파犬儒學派’를 이끌었던 고대 희랍의 철학자(디오게네스)가 주인공이다. 지혜를 얻기 위해 그를 찾아간 한 왕자(알렉산더)는 그에게서 햇볕을 가리지 말라는 힐난을 듣고 “내가 왕자가 아니라면 기꺼이 그가 될 터인데…”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그 철학자는 길거리의 통 속에서 자거나 개집에서 개와 함께 잤다. 그가 가진 것은 물을 떠먹는 그릇이 유일했다. 어느 날 한 어린애가 손으로 물을 떠먹는 걸 보고 그는 그 그릇마저 버렸다. 비로소 완전히 ‘개’가 되었고, 소유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달콤한 인생>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그를 무소유의 길로 인도한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즉, 폭력계의 기린아 선우가 두목의 어린 애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조건’들을 제거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사랑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한 킬러(에릭 분)의 출현은 운명, 혹은 신의 선택이라고 할 만큼 난해하고 불성실한 결말처럼 보이지만, 몸에 힘을 빼고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거니와 명료하다. 실은 운명이나 신을 끌어올 필요도 없다. 에필로그 속의 그 한 단어, ‘꿈’으로 충분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 눈물짓는 제자에게 스승이 묻지 않는가. "왜 우느냐?"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꿈이었더냐? 슬픈 꿈이었더냐? 무서운 꿈이었더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느냐?"  "그것은,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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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6-11-11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름답습니다요, 아련한 계절처럼....

책먹는하마 2006-11-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와르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데,
단지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이 영화에 그만, 매료되었지요.
<무간도>를 1,2,3편 한꺼번에 빌려다 본 게 이 직후였다는 것...ㅎㅎ
다만...음...피 흥건한 걸 보는 건 힘이 무척 든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