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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SE - 비트윈 2disc, 할인행사
미하일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뻬르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고갱과 언쟁을 벌인 뒤 그의 화실을 뛰쳐나온 고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귀를 잘라버린다. 그로부터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여름, 고흐는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는 끔찍한 유서를 남긴 채 서른일곱 살의 시퍼런 생을 마감했다. 권총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던 이틀 뒤였다.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의 <피아니스트La Pianiste>에 등장하는 빈 음악원의 교수 에리카 코후트(이자벨 위페르 분)는 연주회가 열리기 직전 콘서트홀의 로비에서 예리한 단도로 자신의 심장을 겨냥해 찌르고는 죽음을 암시하며 홀로 극장을 빠져나간다. 남자와 여자, 가난한 화가와 교수라는, 성과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흐와 코후트는 닮은꼴이다. 남의 애를 가진 창녀와 2년여에 걸쳐 동거를 한 고흐와 정기적으로 섹스숍을 찾아가 포르노비디오를 보면서 휴지통에 처박힌 낯선 남자의 정액 묻은 휴지를 콧구멍에 갖다대는 코후트 사이에 놓인 거리는 그다지 멀지가 않다. 고흐로 하여금 귀를 자르게 하거나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게 한 ‘무언가’는 코후트로 하여금 면도날로 음부를 자해하게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혹한다. 한 화가의 길지 않은 생을 온통 60도짜리 독주 압생트로 취하게 만든 ‘무언가’와 어린 제자(브느와 마지멜 분)에게 가학적 성행위를 요구하는 한 피아니스트의 변태적 욕망 사이에 차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넓지 않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비정상적이라는 수식어 외에 달리 떠올릴 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이 이토록 가혹한 행로를 걷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정신병원에 가두거나, 그 입구를 서성이게 만드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예술’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제시된 여러 개의 보기 중 하나를 고른 것일 뿐이다. 예술과 관계된 것이 그들을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예술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그들의 발길을 음습한 행로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유별나 보이는 그들의 삶과 평범한 인간의 삶을 가르는 준거로 예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가라고 모두가 그들처럼 난급한 삶의 행보를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범한 인생의 이면에는 반드시 굴곡진 어린 시절이 있다: 통과의례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이 말은, 그러나 자못 위험한 문장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아무런 검증 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상투성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희대의 사상가나 예술가, 혹은 난세의 영웅을 묘사하는 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것이 바로 이 굴곡의 유년이다. <피아니스트>의 코후트 교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녀가 딸에 대한 과민한 집착증을 가진 어머니를 가졌다는 사실은 아집에 사로잡힌 아버지를 가졌던 <샤인Shine>의 소년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을 연상시킨다. 이는 오래 전, 끊임없이 검은 망토를 걸친 아버지의 환영을 보는 <아마데우스Amadeus>의 어린 모차르트로부터 충분히 학습 받은 대목이기도 하다. 이 지나친 익숙함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하나는, 그 익숙함으로 인해 우리는 결국 비범한 인생의 그 비범한 가치에도 익숙해질 것이며, 그래서 그 비범의 진면보다는 이면에 흥미가 집중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천재의 상업적 이용을 부추길 것이고, 천재는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진다는 가치로운 덕목의 상실을 또한 부추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인간의 예술적 소외감이다. 굴곡진 유년과 같은 삶의 이면을 들추어내 거기서 비범한 자의 질료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는 한 평탄한 유년을 가진 수많은 천재는 예술로 상징되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장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이 대목에서 문득 권형진의 <호르비츠를 위하여>가 떠오르는데, 이 따뜻한 드라마가 천재를 그리는 기존의 기법과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천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새롭다.)
고흐, 데이빗 헬프갓, 모차르트, 그리고 에리카 코후트: 이들 삶의 비범함을 형성하는 참된 질료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하나의 답을 고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른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의 보기를 하나씩 선정해 나가는 것일지 모른다. 예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 예술 그 자체, 치열한 삶에의 의지, 독선, 엄정한 고독, 고독에의 의지, 뒤틀린 가족관계, 그로 인한 험난한 유년, 무엇이든 극을 달리는 성정, 척박한 토양과 공기, 절대성에의 두려움, 끊임없는 죽음에의 유혹, 광기……. 보기가 많아지면 질수록 예술적 천재의 비밀은 깊어지고, 마침내 그는 벗겨낼 수 없는 장막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비범한 인생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범하지 않은 인생들의 목마른 입술을 축여주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샘은 파헤쳐졌을 때 말라버린다. 우리에게 샘물인 그 비범한 인생을 형상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늘 상투성으로의 추락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피아니스트>는 올발랐는가를 묻는 일은, 괴롭지만 필요하다. 이때, 바하의 샤콘느가 전편을 휘감는 찰리 반 담Charlie Van Damme의 <바이올린 플레이어Le Joueur De Violon>를 비디오 데크에 꽂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