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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 [할인행사]
박찬옥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였던 김현은 시인 기형도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혹해하면서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을 썼다. 그 해설을 통해 김현은 기형도의 시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시를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보기 힘든 괴이한, 부정적 이미지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령, 하늘을 두꺼운 종잇장으로, 태양을 노랗고 딱딱한 것으로 비유하는 이미지”라든가 “서로 엉키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비연대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기형도의 시가 김현에게(더불어 많은 독자들에게)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것은 이러한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뒤에, 아니 밑에,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다보는 개별자,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알려져 있듯이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은 어느새 유명을 달리한 지 10년을 훌쩍 넘긴 기형도의 동명의 시를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가 박찬옥을 움직였다는 것은 연출가 자신이 밝혔듯 분명한 사실일 테지만, 그의 시가 영화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이 간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 전문)
박찬옥은 기형도로부터 ‘질투의 힘’을 빌려오긴 했지만 그 힘의 결과는 기형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자신의 희망이란 결국 모두가 질투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아픈 인식과 함께 그리하여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었다고 고백한 기형도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서른의 나이로 (다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반면, 박찬옥은 영화 속에서 가장 기형도 시의 분위기와 닮은 주인공 이원상(박해일 분)으로 하여금 자신이 맹렬하게 질투하는 대상 속으로 자의적으로 편입하게 만듦으로서 그 질투의 궤를 달리한다. 물론 원상이 기형도의 나이에 이르면 어떻게 될는지는 또 모르는 일이지만, 질투, 혹은 질투의 힘을 읽어내는 박찬옥의 방식에는 기형도의 방식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 내재해 있다. 이건 어쩌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일 수도 있고, 실재한 일과 픽션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해석의 차이라는 건 차치하고라도.
만약, 많은 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을 바라보는 두 사람, 즉 문학평론가 김현과 영화연출가 박찬옥을 비교해 볼 수 있다면 뭔가 더 또렷해질 것 같다. 하지만 김현의 해설에는 기형도의 <질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렇긴 하지만 기형도의 유고시집 권말에 붙은 김현의 해설 전체에 녹아 있는 암울하고 슬픈, 혹은 허무주의적인 기운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그 미루어 짐작되는 것을 한 단어로 뭉뚱그린다면 ‘절망’이다. 생에 대한 모든 철저한 인식은 절망에 이르도록 만든다. 삶에 대한 느슨한 인식만이, 철저하지 못한 인식만이, 절망을 피해가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면밀하게, 그리고 깊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럽고 치사하고 모멸스런, 절망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더럽고 치사하고 모멸스런 삶이 타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서 절망에 이르게 되고, 그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새벽 세 시의 허름한 극장 안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의 삶 혹은 죽음의 방식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기형도의 <질투…>를 보는 김현의 시선이거니와 이때 ‘질투’라는 단어는 ‘반성’보다 더욱 철저하고 처절한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박찬옥이 기형도의 <질투…>를 바라보는 시선도 상당 부분 ‘절망’에 닿아 있다. 적어도 이원상의 경우에는. 하지만 그의 절망은 두 번씩이나 자신의 애인(!)을 빼앗아간 사내와 가까워지도록 만들고, 그를 부러워하게 만들며, 얼마큼 그를 닮게 만들고, 급기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조언을 구하게까지 만든다.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절망은 하지만 죽음은 없다. 이러한 점에서 박찬옥의 <질투…>는 기형도가 선택한(혹은 맞이한) 삶 혹은 죽음의 방식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그것은 한 시인이 걸어간 삶의 행로였을 뿐, 텍스트인 시 그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이건 어쩌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일 수도 있고, 실재한 일과 픽션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고,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현실에선 실제로 일어난단 말이야.” 시인의 질투는 시인을 죽게 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의 질투는 그를 살게 한다. 시인의 죽음은 실재한 일이고, 영화 속 등장인물의 삶은 픽션이다. 일어날 법한 일의 일어나지 않음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의 일어남 - 이 아이러니는 얼마나 진실한가? 시와 영화 중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천하의 우문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