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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서양문명이 특히 그렇지요. 따라서 내 생각에는 서양문먕에 대한 이해를 그 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온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비록 흔한 방법은 아닐지라고 썩 좋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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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이후였을까? 한국 사회에서 신을 둘러싼 이야기가 풍부해지기 시작한 때가. 올해만 해도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빅터 스텐저의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등 여러 권의 관련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알라딘에서도 이런 흐름에 맞춰 '우주와 생명에 대한 최후의 질문, 신은 있는가?'라는 이벤트를 마련해 많은 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은 바 있다.(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101020_god) 앞선 책들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문제를 바라본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와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도 기억해둘 만하다. 특히 <신을 위한 변론>은 기존의 논쟁에서 한 발짝 비껴나 신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되짚으며 신을 감각하고 공유하는 삶을 제안한다. 기존의 논의가 빠뜨린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통찰이다.
이런 흐름에 반가운 저작이 하나 더 나온다(라고 쓰지만 어제 나왔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 <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 등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김용규. 몇 년간 침묵하던 그가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신>으로 돌아왔다. 그간의 연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해, 서양문명을 7가지 코드로 읽어내는 작업 가운데 첫 책이다.(두 번째 책은 '이성'이다) 800쪽이 넘는 본문에는 신과 관련한 서양철학과 신학의 논의가 잘 정리되어 있고, 문학과 예술 작품을 넘나들며 설명하는 김용규의 글쓰기도 여전하다. 특히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기헌신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고, 삼위일체로 나타나는 신의 유일성이 인간공동체의 원형이라 읽어내는 시각은 독특하면서 설득력도 충분하다. 서양문명의 심층을 드러내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과제의 해법을 찾아보려는 저자의 시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자.
[북 엠바고]는 해당 저작이 나오기 전이나 출간 직후,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따로 마련한 자료를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아래 내용은 김용규 선생이 출간 이전에 출판사에서 진행한 강의입니다. 조금 길지만 800쪽이 넘는 본문에 비하면 한눈에 읽어볼 만한 수준입니다. 참, [북 엠바고] 후속편은 G20 직전 입국거부 사태로 다시 화제에 오른 <가난뱅이의 역습> 마쓰모토 하지메의 신작, <가난뱅이 난장판>입니다. 본문에 들어가는 사진과 만평 등 다양한 자료를 단독 입수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삼스레, 왜 다시 신인가
1
당신이 서구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로마에 도착해 석양에 물든 트레비 분수 앞 계단에 앉아 젤라또를 핥으며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맛을 즐기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당신은 이미 로마에서, 아니면 그리스나 파리에서, 서구문명이 낳은 예술품과 유적들을 구경하다가도 역시 예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감동을 적어도 한번쯤은 맛보았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이 감동은―당신이 지금 음미하고 있는 젤라또처럼―아주 특별한 것이지만 매우 흔한 것이기도 해서, 서구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장을 하고 스페인 광장 계단을 내려오다가 문득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 가운데 한 장면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장년의 신사이든, 아니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비욘세의 노래를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 부근에서 가장 맛있는 파스타집을 검색하는 젊은 아가씨이든 관계없다. 누구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종교를 가졌든 무관하게 예를 들어 성 베드로 성당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당신은 분명 뭔가 일상적이지 않고 세속적이지 않은 야릇한 기운에 순간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필경 당신이 나와 같은 한국인일 것이라고 가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서구인들 역시 이점에 있어서는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속절없는 것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예컨대 19세기 초 당시 지성을 대변하던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이탈리아 기행》을 보자. 그는 “로마는 전 세계를 위한 최고의 학교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이곳에서 정화되고 검증받고 있습니다.”라는 고고학자 빙켈만의 로마에 대한 소견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정말이지 와보지 않고는 이곳에서 사람이 어떤 식으로 정화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 갖고 있던 개념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신던 신발과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오면 제법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비록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삶과 세계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갖게 한다.”
그렇다. 이것이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제법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그 감동의 실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당신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맛본 엄청난 감동 뒤에 따라오는 일종의 성찰 같은 것인데, 바로 이것을 통해 우리가 교육되고, 정화되며,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에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개념들이 마치 어릴 때 신던 신발과 같이 하찮게 여겨지는 사유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얼핏 생각하기에 그것은 우리가 서구에서 대하는 예술품이나 유적들이 지닌 놀라운 정교함, 거대함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예술품이나 유적들 안에 자리하면서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어떤 위대한 정신적 가치에서 나온다. 미술이든, 건축이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문학이든, 학문이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하는 것들의 심층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가치들이 반드시 들어 있다. 서구문명에 있어서는 그것이 지난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신이라는 이름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하여 나타났는데, 내가 이 책에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2
그는 묵상기도를 마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꿇었던 무릎이 펴지질 않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기도실을 나서자 북구의 차가운 밤공기가 삽시에 온몸을 휘감았다. 정신이 번뜩 났다.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12기둥이 떠받치는 기나긴 수도원 주랑을 지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도중에 정원 한복판에 있는 조그만 연못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다. 물 위에 별이 떠 있었다.
방에 들어서 그는 벽에 걸린 십자가 밑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주여, 조그만 연못 안에 거대한 별이 들어 있듯이, 유한한 내 정신 안에 무한한 당신이 계십니다.”
짧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난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서랍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한 손으로 힘껏 틀어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냉큼 움켜잡은 다음, 한 뺨 가량만 남기고 싹둑 잘랐다. 남은 머리는 바싹 잡아당겨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필을 들었다.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이 존재한다.”
내 생각에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네딕트파 소속 베크 수도원의 부원장이자 수도원학교 교장이었던 안셀무스가 1077년 출간 한 《모놀로기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씌어졌다. 그는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의 동료 수사들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매우 특이하게도 그들은 어려운 청원을 하면서 까다로운 조건까지 달았는데, 그것은 글 안에서 아무 것도 성서의 권위에 의해 주장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명확한 형식과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논증 그리고 단순한 설명을 통해 진리의 필연성을 이성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건이 조건인 만큼 너그러운(?) 단서도 덧붙였다. 설사 그가 거의 바보 같은 논증을 하더라도 업신여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안셀무스는 이 일이 가진 위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자기가 믿는 신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되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크고,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일은 어찌하든 간에 신 앞에서는 죄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는 수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요리조리 기피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사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화와 같은 요청이 끊이지 않자, 그는 마침내 기도로 신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마음을 다잡았다. 죄 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작업은 어차피 세상에 나오자마자 마치 값싼 물건처럼 곧바로 잊혀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도 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의 뜻은 달랐다. 안셀무스의 글은 나오자마자 곧바로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베껴감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나중에 영국 국교회의 수장인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안셀무스가 이 책의 서두에서 언급한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은 당연히 신이다. 이것이 그가 동료들의 요청대로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만으로 파악한 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부르기 편하게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축약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셀무스 자신은 결코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에서 오히려 더 장황하게 늘여서 신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성, 최고 위대성,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一者性)”이라고도 불렀다.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태도나 방법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다. 전자는 은혜롭지만 자폐적이고, 후자는 설득적이지만 은혜롭지 못하다. 종교적으로는 전자가 우선시 되고, 학문적으로는 후자가 중시된다.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면서 평생 두 가지 태도를 균형 있게 견지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 quaerens intellectum)”이라고 스스로 이름 지었다.
그러나 《모놀로기온》을 쓰면서 그는 동료 수사들의 요청에 따라 신앙에 의지하거나 호소하지 않고, 오직 ‘이성만으로(sola ratione)’ 신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 주력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게 설득력을 높였다. 이후 그것이 스콜라철학의 전범이 되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저술한 《신학대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나는 바로 이 같은 태도를 취하며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책의 성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 책이 신앙보다는 신학에 관한 문제들을 주로 다룰 것이며, 따라서 은혜롭기보다는 설득적이기 위해 애쓸 것임을 의미한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베일을 벗고 이성이라는 거울 앞에 나타난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外延)이자 정점(頂點)’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인간적인 것(이성, 행복, 정의, 지혜, 진리, 선성, 미, 복락 등)도 있고 신적인 것(생명, 위대성, 불사성, 불변성, 영원성, 권능, 일자성 등)도 있지만, 어쨌든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가치들 가운데 신에게 속하지 않는 가치가 없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이 같은 생각을 안셀무스가 홀로 창안해낸 것은 아니다.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를 동일시하는 사유는 일찍이 플라톤이 《국가》에서 일자(신)를 ‘선자체’라고 규정하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초기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이 신을 존재자체(ipsum esse), 진리자체(ipsa veritas), 선자체(ipsa bonitas), 아름다움자체(ipsa pulchritudo)라고 부름으로써 기독교 안에 정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가 인간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그리고 신적인 가치들을 낱낱이 지적하여 그것들 모두의 정점으로 신을 명명했을 때,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야곱의 사다리’가 훨씬 더 넓어지고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가치들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고, 부단히 이끌어가며, 마침내 파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것은 기독교적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가치들이 아니었으면 인간과 세계는 시작하지도 않았고, 인간과 세계로서 유지될 수도 없으며, 파탄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이것은 윤리학적 표현이다) 서양문명의 가치중심적 성격이 명시적으로 선포되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이에 관해서 부단히 이야기 할 것이다.
3
신은 어느 문명에서든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종교 아닌 것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간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문학 속으로, 학문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룬다. 특히 서양문명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때문에 내 생각에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그 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온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흔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썩 좋은 방법이다. 그것을 심층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게 할뿐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가진 위험을 대변할 수 있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식수가 아주 귀한 어느 나라의 사람이 서구를 방문하여 수도꼭지에서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여럿 사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벽에 꽂아놓고 틀어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벽 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없이 물이 쏟아져 나올 리가 없지 않겠는가. 분명 누군가가 만들어낸 농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가 상당부분에서 이와 같지 않은지 심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에 대한 이해부터 그렇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신은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데,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놀라울 만큼 피상적이거나 왜곡되어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큰 혼란에 빠트리는 것은 오늘날에는 우리뿐 아니라 서양인들조차 그들 문명의 근간인 신에 대해 역시 심한 편견과 왜곡된 개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스티븐 호킹,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같은 저명한 자연과학자들의 신에 대한 담론들이 그러한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그들이 하나같이 각자의 전문분야에 서서 벽에 수도꼭지를 박아놓고 그것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이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에 대한 해법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먼 길을 떠나고자 한다. 우리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1장), 존재와 존재물에 속성에 대하여(2장), 창조주와 피조물의 의미에 대하여(3장),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기희생에 대하여(4장), 신의 유일성과 인간의 연대성에 대하여(5장) 이야기할 것이다. 도중에 우리가 잊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서도, 열정과 희생으로 그것들을 지켜온 영웅들에 대해서도, 개인의 삶과 세계의 역사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도, 서로 상반․대립하는 지식들의 종합과 충돌하는 문명들의 화해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할 것이며, 사이사이에 신과 연관하여 우리를 교육하고 감화하는 시, 소설, 회화, 조각, 음악, 역사, 과학, 철학, 신학에 대해서도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눌 것이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이 책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조금 색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은 내가 고대 헬레니즘시대의 교사나 성직자들, 예컨대 사도 바울이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할 때 즐겨 사용하던 디아트리베(diatribe)라는 수사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기분풀이’ 내지 ‘환담’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트리베는 설사 심오한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변론이라 할지라도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한다. 그리고 그것을 비속하지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 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수법이다.
예를 들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로마서 9:19~21)와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바울은 신도들에게 편지를 쓰며 곳곳에서 이처럼 신도들을 대신하여 질문도 하고 반문도 하면서 이에 답하는 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따라서 이 책을 펼침과 동시에 당신은 졸지에 딱딱한 강의실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서재나 아니면 카페 같은 곳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환담에 대화상대로 즉각 초대된다. 그리고 나와 마주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기분풀이 수다를 떠는 것처럼 여유로운 담화를 즐기게 된다. 나는 신과 서양문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되, 바울이 그리한 것처럼 되도록 자주 당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당신이 내게 물음을 던지게 하고 그에 답하기도 하며, 또 가끔은 내 논지를 반박하게 하고 그것을 수긍하거나 논박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것이다.
4
오늘날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역사를 맞고 있다. 이제 신은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또한 문학, 미술, 조각, 건축, 음악, 공연 같은 예술로부터도 점차 분리되어 잊혀가고 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서양문명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주된 원인이다. 어디 서양문명뿐인가? 이제 ‘가치의 위기’는 범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통념이 되었고, 이에 대한 무관심, 방기, 폄하, 비아냥거림은 하나의 지적 유행이 되었다.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도 대부분 바로 여기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신 대신 자연과 인간에 눈을 돌려 그것들을 연구하고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19세기 말엽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선지자적인 목소리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가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마냥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얼마 가지 않아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다. 얼핏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를 따라 신을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규정한다면, 신을 배제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신을 배제한 이성, 사회진보, 민중해방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가치한 이성, 무가치한 사회진보, 무가치한 민중해방이 아니겠는가? 이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이성, 진보, 해방이 아니다. 학문도, 예술도 마찬가지이며, 문명 자체가 매일반이다. 근대 이후 우리는 중세의 신본주의(神本主義) 대신에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내세웠다. 따라서 이때 말하는 인본주의는 당연히 ‘무신론적 인본주의’이지만, 신이 모든 인간적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배제한 인본주의는 인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적 귀결이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동안 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최고의 가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퇴치하고 근대 이후 활발히 전개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곧바로 스스로를 절대적 가치인양 정당화했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F. Lyotard) 식으로 표현하자면, 근대 이후 개발된 각종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적 지식들, 예컨대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회다윈주의, 자본주의, 헤겔의 변증법, 역사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과 같은 한갓 ‘작은 이야기(petit rcit)’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스스로 ‘큰 이야기(grands rcit)’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른바 근대성(modernity)의 실체인데, 그것이 연출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우리는 샤워실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굴락, 여인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확인하고 전율했다. 이후 라캉, 푸코,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을 시작으로 리오타르, 하버마스, 로티와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마치 프로크루스테스를 퇴치한 테세우스처럼―이 무참한 야수를 해체하려고 실로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은 미완이다. 게다가 새로운 위험들도 속속 자라고 있다. 근래에 유전공학, 진화생물학과 함께 부활하고 있는 과학주의가 통섭이라는 미명 아래 다시 큰 이야기로 등극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작은 이야기들 역시 큰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한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헌신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이라 해서 입을 닫고 있다.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들로부터 방어막이 되어주던 모든 것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내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버렸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었던 레닌의 팔은 잘렸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우리가 변하는 동안 세계도 변했다.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로 진입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홀로 떠맡게 되었다. 자고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이다. 전자는 전근대적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다.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그렇다. 바우만이 이름붙인 ‘유동하는 공포(Liquid Fear)’다.
“발전소가 폭발하고, 석유매장량이 동이 나며,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온갖 대기업들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당연한 것처럼 누리던 여러 서비스가 끊기는 한편, 든든해 보이던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져 버리고, 제트기끼리 충돌하여 수천 개의 화물과 수백 명의 승객들이 공중에서 쏟아지고, 시장가격이 미쳐버려 가장 귀하고 소중했던 자산들이 물거품처럼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난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 하며―또는 이미 넘치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현명한 사람이든 바보든 단숨에 삼켜버리려 한다. 날마다, 우리는 위험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거의 매일 새로운 위험이 나타나고 경고된다. 얼마나 더 많은 위험이 남아 있는지, 어떤 것들이 우리의 눈을 피해―전문가의 눈조차!― 어딘가 숨어서 예고 없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바우만은 신과 자연과의 유대를 단절하고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로 한 근대적 이성이 유동하는 공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말은 조금 폭넓게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공포는 신과 자연과의 유대를 단절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유대마저 단절했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으며 예측할 수도 없는 공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신을 불러와야 할까? 아니면 다시 이성을 내세워야 할까? 약방문은 분분하지만 공인된 처방은 아직 없다. 바우만도 《유동하는 시대》에서 나름의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각각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에 비유해 설명했다.
전근대는 자연이 사냥터이고, 인간이 사냥터지기로 활동했던 시기이다. 사냥터지기의 임무는 ‘자연적 균형’, 즉 신이 지혜로 조화롭게 질서지어 놓은 ‘존재의 대연쇄(The great Chain of Being)’를 보존하는 것이다. 반면에 근대는 인간이 정원사로 일했던 시기이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을 설계한 다음, 그에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적합하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을 한다. 그의 임무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나고 말았다.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다. 사냥꾼은 “오직 한명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나, 또는 많은 무리 중 한 무리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로서 사냥터나 다른 동료야 어찌 되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이다. 그의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바우만은 세계가 이처럼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그것을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 이것이 그가 제시한 약방문이다. 그에 있어 “유토피아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정원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옥을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한다.
그렇다. 그가 일면 옳다. 오늘날에도 계몽, 연대, 혁명은 여전히 필요하고 또한 유효하다. 그럼에도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근대를 지나며 우리는 훌륭한 정원사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폭력적이다. 이를 통제할 믿을 만한 처방도 없이 다시 정원사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간파한 대로 이미 사냥꾼으로 지옥에 떨어졌다. 세계화의 깃발과 함께 사냥나팔이 울렸고 사냥개들은 뛰기 시작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불변의 법칙이 있다면,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저 위대한 르네상스도 헬레니즘시대로 고스란히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샤를 페로(C. Perrault)가 1687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당당하게 낭송했듯이, 그들은 아름다운 고대를 존경하면서도 무릎은 꿇지 않고 새 길을 갔다. 그렇다면 우리의 새 길은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그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5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한다.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이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된다.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함으로써 그들이 서로 보완하면서 견제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이미 1,6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틀의 처방을 내린 적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탐욕, 곧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끈질긴 성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모두 죄로 몰아 금하는 기존의 교리와 사뭇 다른 처방을 내렸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네 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준다.
내가 이 책에서 전개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도모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뒤 따르는 문제들이 없기야 하겠는가. 곧바로 예상되는 난제가 서로 상반․대립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충돌하는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바우만의 표현을 빌려 바꾸어보면 그것의 난해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일은 이 책이 애초 설정한 영역을 벗어난다. 그럼에도 잠시 주목할 필요는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집요하게 천착하는 기독교의 신 개념은 애당초 상반․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이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것은 인류가 이루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종합이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주축으로 한 서양문명이 이 종합을 통해 비로소 출발을 알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시 학자들이 이뤄낸 놀라운 지적 노력을 추적하면서 상반․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탈시간화와 시간화의 논리, 러브조이의 이중적 논법, 쿠사누스의 대립의 일치,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몰트만의 해석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것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찰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종합을 이뤄낼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이미 짙게 내렸으니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날아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고대가 저물어갈 즈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루어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었을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이제 우리도 새로운 사유의 길을 찾아야 할 때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종합이 될 것이며 새로운 르네상스가 될 것이다. 자, 우리 이제 신을 이야기하자!